191화. 운철의 비밀
호리병 모양의 검은 산골짜기.
산골짜기 중앙에는 백 평 가까운 크기의 저수지가 있었다.
칠흑같이 까만 저수지의 중앙에는 짙은 녹색 식물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그 식물에는 한 송이 꽃이 피어 있었는데, 그윽한 녹색 빛을 뿜어내는 그 꽃송이는 굉장히 눈에 띠었다.
바로 그때, 골짜기 밖에서 소동이 일어났는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얼마 이어지지 않고 곧 멈췄다.
곧이어 하얀 갑옷을 착용하고 검은 곤봉을 든 자가 골짜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자의 뒤에는 모습이 제각각인 해골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 * *
며칠 후, 하늘에 검은 구름이 짙게 깔린 어느 날.
어느 버려진 집 안에서 두 눈을 살짝 감은 석목이 나무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석목 일행은 한 버려진 작은 마을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후새뢰의 말에 따르면 이 마을의 주민들은 몇 년 전 도적 무리에 의해 몰살당했다고 한다.
그때, 방 안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연나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석목은 방의 온도가 갑자기 떨어진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가 연나를 발견하고 기뿐 표정을 지었다.
연나의 한 손에는 운철흑곤이, 다른 한 손에는 녹색 꽃이 들려 있었다. 차가운 기운은 바로 그 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석목이 입을 떼기도 전에 연나가 다가오더니 녹색 꽃과 운철흑곤을 건넸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받은 석목은 순간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끼고 멈칫했다.
운철흑곤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석목은 곤봉에 영석을 따로 먹이지 않았지만, 공기 중에 있는 자연의 기를 일 년 넘게 흡수한 곤봉의 무게는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처음 제작했을 때 천백 근이었던 곤봉은 연나에게 빌려줄 때는 이미 천오백 근으로 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연나가 돌려준 곤봉의 무게는 처음 제작했던 때의 천백 근으로 돌아가 있었다.
고민하던 석목은 자초지종을 물으려 했지만, 연나는 이미 검은 연기 사이로 사라진 뒤였다.
석목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다시 삼키고 기쁜 표정으로 녹색 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운철흑도를 한 쪽 벽에 세워두고, 나무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꽃잎 하나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꽃잎은 녹색 꽃에서 떨어진 순간 부서지며 차가운 기운으로 변해 손으로 스며들었다.
반 시진 후, 석목은 밝은 표정으로 눈을 떴다.
녹색 꽃을 전부 흡수한 석목은 체내의 법력이 대폭 늘어났다. 녹색 꽃이 하나만 더 있다면 온신술 13단계에도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은 석목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그 순간 석목의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는 운철흑곤을 집어들고 진묘계에서 영석이 가득 차 있는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안에는 가지각색의 영석이 천 개 정도 들어 있었다.
석목은 뼈아픈 표정으로 운천흑곤과 영석을 번갈아 보다가, 이를 악물고 곤봉을 주머니 속에 쑤셔 박았다.
순간 주머니 안에서 강력한 영력의 파동과 함께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금세 빠르게 어두워졌다.
석목은 운철흑곤을 들고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곤봉의 무게는 거의 이천 근에 달했으며, 주머니 안의 영석은 거의 대부분 소진되었다.
석목은 운철흑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운철흑곤이 흡수할 수 있는 영석은 최대 천 개 정도인 것 같았다. 영석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흡수되지 않고, 곤봉의 무게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듯했다.
연나가 무엇을 했기에 곤봉이 처음의 무게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덕분에 영석 천 개를 몽땅 날려버린 셈이 되었다.
석목은 입술을 삐죽이며 운철에 무슨 비밀이 더 숨겨져 있는지 연구해보려 했다. 그때 갑자기 채아가 방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석두, 배고파. 영석 좀 줘!”
석목은 채아를 한 번 본 뒤 주머니의 영석을 전부 나무침상 위에 쏟아 부었다. 대부분 이미 회색으로 변해 있었으며, 남은 것은 고작 하급 영석 몇 개였다.
환호성을 지르며 침상 위에 내려앉은 채아가 영석을 한 입에 하나씩 삼켰다.
석목이 다시 운철흑곤을 들어 관찰하려는데 채아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석두, 너무 적어서 배가 부르지 않아.”
“몇 개 더 줄게.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야.”
석목은 진묘계에서 영석 다섯 개를 꺼내 나무침상 위에 던져주고 운철흑곤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시도를 해봐도 곤봉에 새겨진 중급 부문만 발동될 뿐, 다른 효과나 무게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 시도를 더 해본 석목은 결국 포기했다. 그리고 추후에 기회가 생기면 연나에게 묻기로 결심했다.
* * *
대진국 서북쪽의 한 마을.
흩날리는 눈이 모든 건물의 처마 위에 두껍게 쌓여 있었고, 아래로는 고드름이 늘어져 있었다.
마을 입구 주위에 자리 잡은 식당에서는 눈보라를 피해 들어온 마을사람, 그리고 외지의 장사꾼들이 몸을 녹이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식당의 문이 벌컥 열리며 검은 망토를 걸친 여인이 들어왔다. 두꺼운 망토를 입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요염한 몸매는 완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순간 가게 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전부 그녀에게 쏠렸다.
“간단한 요리와 뜨거운 술 한 잔.”
망토를 입은 여인은 그녀를 맞이하러 간 점소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주문을 마치고 깨끗하게 정리된 식탁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여인이 망토의 모자를 벗자 가게 안 모든 사람의 눈이 빛났다.
여인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였으며, 아름다운 얼굴 생김새에 피부는 살구꽃처럼 뽀얗고 뺨은 복사꽃처럼 붉었다.
그녀는 바로 금소채였다.
이런 외진 마을에는 평소 이런 절세미녀가 올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남자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한 탁자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특히 비단옷을 입은 한 남자는 대놓고 금소채를 위아래로 바라보았다.
금소채는 다른데 정신이 팔린 듯, 아름다운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넋을 놓고 있었다.
사내들은 대놓고 쳐다봐도 금소채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서로를 한 번씩 쳐다본 후 더욱 흥분한 표정이 되었다.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금소채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삼십 대 쯤의 나이에 호방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는데, 문인(文人) 같은 옷차림에 머리에는 두건을 두르고 있었다. 또 큰 눈이 쏟아져 내리는 날씨임에도 부채를 들고 있었는데, 고상한 척을 하려는 것이 뻔히 보이는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얼굴이 굉장히 낯선데 이 설암진(雪岩镇)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마침 제가 이 마을 촌장의 아들이니 무언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저에게 부탁하시지요.”
금소채는 그제야 시선을 돌려 남자를 보았다.
“꺼져.”
남자에게 방해를 받자 화가 난 금소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인 것 같은데 단호하게 거절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혼자 술을 마시면 적적할 테니 제가 함께 해드리겠습니다.”
사내는 웃으며 고집스럽게 금소채의 옆에 앉으려 했다.
그러자 금소채가 낯빛을 흐리며 방금까지 입고 있던 망토를 몽둥이처럼 말아서 남자를 향해 휘둘렀다.
남자는 전혀 놀라지 않고 한 손으로 외투를 잡았다. 그러나 손바닥이 외투에 닿는 순간 그의 몸이 떠오르더니 몇 장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남자는 몇 개의 식탁과 연달아 부딪힌 후에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남자는 산산조각 난 나무 사이에 파묻힌 채, 피를 토해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금소채를 바라보았다. 식당 안의 다른 사람들 역시 그 광경을 보고 넋을 잃었다.
“오늘은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으니 꺼져!”
금소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살기를 뿜어냈다.
바깥의 눈보라보다 열 배는 차갑게 느껴지는 살기에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단옷을 입은 사내의 일행이 다급히 사내를 부축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게 안의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금소채를 바라보았다. 겁이 많은 몇몇 사람은 서둘러 계산을 하고 뒷문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금소채는 그 모습을 보며 콧방귀를 뀌고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천마종을 떠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석목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어떤 수확도 없어서 매우 짜증이 난 상태였다. 그녀는 이 식당에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려 했다.
바로 그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금소채의 들려왔다.
“성격이 그리 불 같으니 훗날 어느 남자가 너에게 장가를 들지 참 궁금하구나.”
금소채는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어느새 검은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팔자수염을 기르고 기품 있어 보이는 그는 웃음을 짓고 금소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은…. 종주를 뵙습니다!”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금소채가 즉시 일어나서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 남자는 바로 천마종의 종주 사도호였다.
“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 앉으렴.”
사도호가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금소채가 사도호를 한 번 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한 사이인 것으로 보였다.
“금자는 잘 지내고 있니?”
사도호가 잠깐의 침묵을 깨며 갑자기 물었다.
“할아버지는 잘 계십니다.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종주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금소채가 말했다.
사도호는 또다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당시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가장 어린 제자였던 네 할아버지에게 동해 반도의 흑마문을 맡겼지. 그 일에 대해서는 수백 년이 지닌 지금까지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단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일에 대해 전혀 원망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금소채가 말했다.
사도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겠지. 그동안 대전 때문에 바빠서 내가 너를 신경 쓰지 못했구나. 대전이 끝나면 찾아가려 했는데 네가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다. 이곳은 날씨가 무척 추우니 우선 천마종으로 돌아가자꾸나.”
사도호의 말을 들은 금소채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마양대전에서 선발되지 않아서 마양단은 줄 수 없지만, 네가 빠르게 지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울 만한 다른 방법이 있단다.”
사도호가 말했다.
“종주님의 호의에 감사하기 그지없으나, 수련에 관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저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천마종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금소채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어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수련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지?”
금소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친구의 부탁을 받아 사람을 하나 찾으려 합니다.”
“사람을 찾는다고? 누구를?”
금소채는 입을 다물었다. 석목은 천마종에서 지명수배가 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도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같이 흑마문에서 출발한 동문의 이름이 석목이었나?”
사도호가 갑자기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놀란 금소채가 사도호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 자를 찾는 것이라면 그렇게 무작정 찾아다닐 필요 없다. 그는 갈 곳이 없으니 분명 사하고국으로 향했을 거야. 나와 함께 천마종으로 돌아가면 내가 대신 찾아주겠다. 그 자가 살아만 있다면 찾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게다.”
사도호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금소채가 물었다.
그러자 사도호는 입술을 살짝 움직이며 금소채에게 전음을 몇 마디 날렸다.
그의 말을 들은 금소채는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럼 함께 돌아가자꾸나. 그전까지 더욱 강해지는 것이 좋을 게야.”
사도호의 말에 금소채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호가 손을 휘두르자 검은 빛의 장막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감쌌다. 이어 빛이 반짝이며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