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192화 (192/916)

192화. 잠에 빠지다

끝없이 이어진 오래된 길 위, 두 사람이 각자 말을 타고 질주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의 어깨에는 검은 앵무새가 매달려 있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이십 대 후반쯤의 청년이었다.

두 사람은 바로 석목과 후새뢰였다.

석목과 후새뢰가 백봉진에서 출발한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서하고국의 국토 면적은 육산왕조보다는 작았지만 대진국과 비슷한 크기로,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두 사람은 한 달을 이동해 겨우 서하고국의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석목은 달리는 도중에 도로의 양쪽을 바라보았다.

서하고국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지만 주위 풍경은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이 도로는 교통 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도로였으나 주위 마을과 도시에는 생기가 없었다. 길가에 정처 없이 떠도는 사령생물들만 종종 보일 뿐이었다.

석목은 과거 명월교와 통천선교와의 결전이 얼마나 처참했기에 나라가 이렇게 변해 버렸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석목은 곁눈질로 어깨 위의 채아를 보았다.

채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상당한 양의 영석을 먹은 채아는 최근 며칠간 이전의 활기를 잃고 줄곧 나른해했다.

하지만 석목은 채아의 생기가 오히려 갈수록 강대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자 주위의 공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게다가 습도가 높아서 굉장히 답답했다.

“오전 내내 길을 재촉했으니 잠시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후새뢰가 말했다.

석목은 눈썹 끝을 치켜 올렸다. 본인은 괜찮았지만 그가 타고 있는 말은 이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후새뢰가 꽤나 많은 돈을 써서 얻은 이 서하고국의 말은 보통 말보다 몇 배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석목과 운철의 무게를 견뎌내는 게 가능했다.

“그게 좋겠군.”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길가의 그늘진 곳에 멈춰 섰다. 멀지 않은 곳에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물이 그런대로 깨끗했다.

후새뢰가 말들을 끌고 물을 먹이러 간 사이, 석목은 나무 아래 앉아서 운철흑도를 뽑아들었다.

최근 들어 석목은 운철의 비밀을 풀기 위해 흑도에 영석을 조금씩 먹이고 있었다.

석목은 하급 화속성 영석 두 개를 꺼내 그중 하나를 흑도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흑도가 반짝이더니 붉은색 영석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동시에 영석에서 붉은빛의 가닥들이 흘러나와 흑도에 흡수됐다.

몇 번 호흡을 하는 사이에 붉은 빛이 완전히 소실된 영석이 부서졌다.

흑도를 몇 번 휘둘러본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영석 하나도 흡수시키려 했다.

“석두.”

줄곧 눈을 감고 있던 채아가 눈을 떴다.

“깼어?”

석목이 고개를 돌려 채아를 보았다.

채아가 석목의 손에 들려 있는 영석을 바라보았다.

“또 먹고 싶어?”

석목이 영석을 들어보이며 묻자 채아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이 살짝 웃으며 영석을 던져주자 채아는 입으로 받아 한 입에 삼켰다.

“석두, 하나 더 줘!”

채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몽롱해 보이는 표정으로 석목을 향해 말했다.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영석이 그렇게 빨리 소화될 리가 없을 텐데. 몸은 괜찮은 거야?”

“괜찮아. 어서.”

채아의 목소리는 살짝 잠겨 있었지만 말투는 확고했다.

“좋아.”

석목은 화속성 하급 영석을 하나 더 꺼냈다.

그러자 채아가 갑자기 말했다.

“이번엔 하급 말고 중급 영석으로 줘.”

“중급?”

석목이 놀라서 물었다.

하급 영석의 백 배에 달하는 영력이 담긴 중급 영석을 먹는 것은 화염구를 삼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석목은 채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채아의 결연한 눈빛 속 깊숙이 붉은 빛이 반짝이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객기를 부리는 건 아닌 것 같네.”

석목은 한숨을 쉬더니 중급 화속성 영석을 꺼냈다.

“중급 영석은 비싸다고. 계속 이렇게 먹다가는 조만간 가난해질 것이 분명해.”

“마지막이야, 마지막.”

환호성을 지르며 영석을 받아먹은 채아가 트림을 했다.

그 순간, 갑자기 채아의 몸에서 타오르는 화염 같은 모양의 강력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쾅!

그중에서도 머리 위의 깃털이 뿜어내는 빛은 특히나 강렬했다.

채아는 두 눈을 감고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다가 비틀거리며 석목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석목이 황급히 손을 뻗어 채아를 받아 품에 안았다.

채아는 엄청난 고통을 참는 듯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석목은 채아의 몸을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채아는 조금은 편안해졌는지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잠시 후, 떨림이 완전히 멎은 채아는 두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놀란 석목은 황급히 채아의 몸을 확인했다. 몸이 살짝 뜨거울 뿐 다른 이상은 없었다.

석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현재의 상태로 봐서 채아는 한동안 깨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잠시 생각을 하던 석목은 채아를 품속에 넣었다.

그때 후새뢰가 말을 끌고 돌아왔다.

그는 석목의 품속에서 잠들어 있는 채아를 봤지만 눈치껏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비록 짧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후새뢰는 석목이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비밀들을 많이 알아봐야 그에게는 좋을 것이 없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두 사람은 다시 출발할 준비를 했다.

“이 방향으로 한 달 가량 더 이동하면 명월교의 지부가 있는 비성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비성….”

석목은 서하고국의 지도가 담긴 옥간에서 금세 그 지역을 찾아냈다.

“그곳에 대해 잘 알고 있나?”

석목이 후새뢰에게 물었다.

“이전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 지부에도 친구가 몇 명 있습니다.”

후새뢰가 말했다.

“좋다. 그럼 그곳에 가서 물품을 보급하고 서해를 건너기 위한 정보를 얻도록 하지.”

석목이 말에 오르며 말했다.

곧 두 마리의 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서하고국의 수도 곡양성(曲阳城) 주위에는 거대한 회색 산맥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일 년 내내 음기에 뒤덮여 있는 이 산맥의 이름은 음시산맥(阴尸山脉)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옆으로 누운 거대한 시체처럼 보여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곡양성 근처에는 이 산맥에 속한 거대한 회색 산봉우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산은 언제나 회색 구름에 뒤덮여 있어서 일 년 내내 정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구름 위로 날아가서 산의 정상을 내려다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 분명했다. 산 정상에는 놀랍게도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회색 해골이 있기 때문이다.

늑대나 호랑이의 것으로 보이는 해골은 생전 몸 크기가 족히 산봉우리만큼 됐을 것 같았다. 해골은 네 개의 발을 산봉우리에 깊게 박고 있었으며, 먼 곳 어딘가를 보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괴수의 해골 아래에는 수많은 검은색 대전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건물들 사이사이로 양 소매에 핏빛달의 문양이 자수되어 있는 회색 옷차림의 사람들이 분주히 지나다니고 있었다.

이곳은 명월교의 총단이 위치한 산봉우리였다.

바로 그때, 산 아래에서 날아올라온 회색 구름이 산 정상에 위치한 광장에 내려앉았다.

곧 회색 구름이 반짝이더니 흩어지며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중 한 사람은 은색 옷을 입고 붉은 장발을 한 잘생긴 청년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붉은 옷을 입은 소녀였다. 그녀는 아담한 체구에 외모가 매우 수려했다.

“유안 사숙께서 돌아오셨다!”

“유 사숙을 뵙습니다!”

광장의 주위에 있던 명월교의 제자들이 두 사람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유안은 제자들의 인사를 무시하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붉은 옷의 소녀는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곧 두 사람은 검은색 대전으로 들어갔고, 대전의 내부에는 긴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아무 말 없이 복도를 따라 앞으로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의 앞쪽에 회색 옷을 입은 곱슬머리 청년이 나타났다.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팔자주름이 깊게 파인, 조금 악랄해 보이는 인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유 대전주(大殿主)가 아닌가? 정말 오랜만이군.”

곱슬머리의 청년은 유안과 소녀를 보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유안과 소녀는 어쩔 수 없이 멈춰서서 곱슬머리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천우성에서 벌인 일은 정말 놀라웠네. 고작 여섯 명으로 통천선교에게 도전하다니, 그 용기와 기백에 탄복했어. 동방교주님의 애제자답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더군.”

청년이 말했다.

소녀의 얼굴이 즉시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안을 한 번 보더니 화를 꾹 참았다.

“그런데 어찌 유 대전주와 견 사매 둘뿐이지? 다른 사람들은?”

청년이 일부러 두 사람의 뒤를 보며 물었다.

분노를 참지 못한 소녀가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가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때, 유안이 손을 뻗어 소녀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창랑 전주, 무슨 일이지?”

“몇 년 만에 만나는 것 아닌가? 유 대전주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안부를 묻는 것뿐이네. 그렇게 무섭게 말하지 말게.”

청년이 일부러 ‘무사히’라는 말을 강조하며 말했다.

유안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때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이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두 눈썹이 붉은 삼십 대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유 사제, 드디어 돌아왔구나!”

유안을 발견한 붉은 눈썹의 남자가 기쁜 표정으로 다가왔다.

“적 사형, 오랜만입니다.”

유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잘 돌아왔어.”

남자가 감격한 표정으로 유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적 사형.”

“견 사매도 무사해서 다행이네.”

소녀도 남자를 향해 인사했고, 남자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야기나 좀 나누자꾸나.”

남자는 유안의 손을 잡아끌고 빠르게 걸어갔다.

남자는 곱슬머리 청년의 옆을 지나가면서도, 마치 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시선 한 번을 주지 않았다.

곱슬머리 청년은 멀어져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음침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유안과 소녀는 남자의 안내에 따라 어느 건물의 응접실에 도착했다.

붉은 눈썹 남자의 거처로 보이는 이곳에서는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적 사형, 또 술을 마셨군요.”

소녀가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하하, 간단하게 한 잔 하며 슬픔을 달랬지. 자, 앉게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세 사람은 각자 자리에 앉았다.

“적 사형, 지금 교내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유안이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뭐 어떨 것이 있겠는가. 사제도 봤듯이 똑같아. 동방교주가 돌아가신 뒤로 비어 있는 교주 자리를 두고 줄곧 세력다툼만 하고 있어. 그로 인해 명월교의 힘은 갈수록 약화되고 있지.”

남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안이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제가 돌아왔으니 이제 됐어. 사제는 과거 동방교주가 지정한 후계자 아닌가. 사제가 교주의 자리를 계승하기만 한다면 우리 명월교도 다시 부흥할 가능성이 있어!”

남자가 말했다.

“사숙은 어떻게 지내고 있죠?”

유안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말도 마! 과거 음풍동(阴风洞)에 들어가 폐관수련을 시작한 뒤로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전혀 기별이 없어. 교내의 신진제자들은 아마 본교에 좌호법이 있다는 사실도 모를 거야.”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숙께서 천위에 오르면 정말 좋을 텐데요.”

유안이 말했다.

“그러길 바라야지. 참, 천우성에서의 일은 조금 듣기는 했다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남자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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