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총단에서 온 사자
반 시진 후, 백 명 가량이 더 들어오자 드디어 지하교역회가 시작되었다.
“시간도 다 되었고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군요. 그럼 교역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석제 탁자 쪽에서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탁자 뒤에는 어느새 녹색 옷을 입은 사람이 한 명 서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떠드는 것을 멈추고 흥분한 눈빛으로 탁자 쪽을 바라보았다.
“이번 교역회에서는 거래 물품에 대한 어떤 제한도 없습니다. 진귀한 재료나 단약, 법기, 심법 등 전부 거래 가능합니다. 다만 모든 거래는 영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역회가 이루어지는 동안 각자 단 한 번씩만 단상에 오를 수 있으며, 거래가 이루어지면 거래 당사자 두 명은 반드시 각각 삼 할의 수수료를 주최 측에 지불해야 합니다,”
녹색 옷을 입은 사람의 말이 끝나자 장내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석목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성 안 세력들이 지하교역회를 개최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백 명 가까운 사람이 영석으로만 거래를 하며 각각 삼 할의 수수료를 낸다면?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주최 측에서도 희소한 자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교역회에서의 거래는 매매하는 이들의 안전과 비밀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모두가 비싼 수수료를 내고서라도 거래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럼 마음이 급한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장내가 조용해지기도 전에 한 마른 남자가 탁자 옆에 섰다.
그보다 한발 늦은 대여섯 명은 씩씩거리며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두 시진 후, 석목은 객잔으로 돌아왔다.
교역회에서 석목의 관심을 끈 물건은 명월교에 전해 내려오는 ‘건천부경(乾天符经)’을 제외하면 특별한 게 없었다.
원래 주인의 소개에 따르면, 이 서적에는 수십 가지의 고급 부적 제작법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성계술사의 경지에 오른 데다 뛰어난 시력을 가진 석목은 이전부터 고급 부적 제작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결국 석목은 천오백 개의 영석을 지불하고 그 서적을 얻었다.
석목의 행동은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의 곁눈질과 비웃음을 샀다.
부적술사는 돈이 상당히 많이 드는 직업이었다. 배후에 큰 규모의 종문의 지지가 없다면 혼자 힘만으로는 초급 부적술도 익히기 어려운데, 하물며 고급 부적술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종문에는 고급 부적을 그릴 수 있는 실력 있는 부적술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이런 부적서적도 흔하게 존재했다. 그리고 이렇게 종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부적서적은 더욱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 석목은 그저 남들이 하면 다 따라하고 싶어 하거나, 기껏해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물론 석목은 그런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석목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채아를 품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옆에 두었다. 그리고 나무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어 건천부경이 기록된 회색 옥간을 이마에 가져다댔다.
* * *
물살이 거센 동해의 해역.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수면이 하늘까지 닿을 것처럼 거대한 파도가 연달아 일었다.
해면 곳곳에는 검은 폭풍이 돌아다니면서 끊임없이 합쳐지고 흩어져 파도와 한데 뒤섞였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파도 소리가 온 하늘을 무너트릴 듯한 기세로 끊임없이 울렸다.
거센 파도 사이에 검은 섬 하나가 묵묵히 떠 있었다.
주위에 있는 자연의 기가 마치 어떤 무형의 힘에 영향을 받는 듯, 한곳에 모여들어 거대한 깔때기처럼 생긴 영기의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 검은 섬이 바로 깔때기의 중심에 있었다.
섬은 전체적으로 검은 빛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었으며, 자연의 기가 그 깔때기를 통해 검은 섬에 대량으로 주입되고 있었다.
만약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 이곳에 있다면, 자연의 기가 흘러들어갈수록 검은 섬이 천천히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한편 섬 주위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이 빼곡히 서 있었다.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들은 몸에서 갖가지 색을 뿜어내면서 수면 위에 안정적으로 떠 있었다. 그들은 파도와 폭풍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모습은 다양했다. 어떤 이는 드러난 피부에 화려한 비늘이 돋아 있었고, 어떤 이는 반인반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로 동해의 수족이었다.
수백 명의 수족은 검은 섬 주위를 둘러싸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갖가지 색의 빛이 솟아나오고 있었는데, 그 빛은 허공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진법을 형성했다.
섬에 있는 검은 산봉우리 주위 허공에는 파란색 옷을 입은 절세미녀가 떠 있었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몸에서 투명한 파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점점 밝아지며 그녀의 전신을 모두 덮었다.
그녀는 바로 향주였다.
향주의 머리 뒤에는 별 모양의 환영 일곱 개가 아른아른 빛나고 있었다.
점점 더 밝아지던 파란 빛은 결국 폭발음과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 그것은 곧 파란색 빛의 기둥을 형성했다.
주위에 모인 수족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은 그와 동시에 더욱 강해져서 향주를 향해 모여들었다.
거대한 계란 모양을 한 빛의 장막이 천천히 형성되며 검은 산봉우리를 에워쌌다.
빛의 장막에 가로막힌 자연의 기는 더 이상 산봉우리에 스며들지 못하게 됐다.
향주는 창백해진 얼굴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거대한 빛의 장막이 형성된 것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향주는 갑자기 쓰러질 것처럼 몸을 휘청거렸다.
바로 그때, 파란색 궁의를 입은 여인이 옆에 나타나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사부님.”
“향주야, 정말 잘했구나. 앞으로도 너의 힘이 계속 필요하니 우선 내려가서 쉬도록 하렴.”
여인이 향주에게 말했다.
향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몸을 돌려 검은 산봉우리를 바라보는 여인의 뒤에 수족 여덟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동해 수족의 장로였다.
“성녀가 절령진혼대진(绝灵镇魂大阵)을 설치해 신물과 외부를 단절시켰으니 예정대로 계획을 진행하도록 하세요.”
여인이 말하자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인 후 흩어졌다.
* * *
보름 뒤 비성의 어느 객잔.
정신을 집중한 채 나무탁자 앞에 서 있는 석목의 눈이 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석목의 왼손에는 풍속성 중급 영석이, 오른손에는 청목(青木)으로 제작한 법붓이 쥐여 있었다. 그는 이보다 더 느릴 수 없을 것 같은 속도로 방금 익힌 고급부적 ‘풍영부(风影符)’를 금색 부적지에 그리고 있었다.
풍영부는 풍속성의 고급 부적으로, ‘건천부경’에 기록된 몇 개 없는 오행부적 중 하나였다.
이 부적을 사용하면 주위에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환영을 만들어 적의 시각과 청각을 교란시킬 수 있었으며, 또 사용자의 속도도 대폭 높여주었다.
이 풍영부는 건천부경의 가장 강력한 부적은 아니었다. 오히려 책에 기록돼 있는 다른 오행부적이나 음(阴)속성 저주부적의 실용성이 훨씬 높았다.
석목이 이 부적을 제작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맨 처음 석목은 고급 음속성 저주부적 제작을 시도했다. 건천부경은 명월교의 것인 만큼 음속성 술법이 가장 강력했으며, 대체로 그런 종류의 부적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석목은 과거 얼굴을 가린 유안의 사매와 전투를 할 때 이 음속성 술법 때문에 애를 먹은 적이 있었고, 그 이후 이 술법에 굉장히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답답하게도 석목은 어떤 방법을 써도 음속성 부문을 깨우칠 수가 없었다. 꿈속 원숭이의 머릿속에서도 이 음속성 부문의 형상은 그려지지 않았다. 시작부터 진행이 안 되니 그 뒤로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석목은 결국 그것을 포기하고, 건천부경에 기록된 오행부적을 열성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고급부적을 제작하는 것은 그의 상상보다 훨씬 복잡한 작업이었다. 법붓과 부적지, 심지어 법묵에도 모두 다른 요구사항이 따랐으며, 부적마다 각종 괴상망측한 요구나 제한이 있었다.
그 결과 석목은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비성 곳곳을 헤집고 다녔고, 지하교역회에 두 번이나 더 참가한 뒤에야 겨우 풍영부 제작을 위한 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쓴 영석만 무려 이천 개 가까이 됐다. 그것도 겨우 백 번 정도 제작을 시도할 정도의 적은 양이었다.
풍영부는 스물일곱 개의 복잡한 풍속성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아주 조금이라도 틀리면 바로 실패하기 때문에 제작 성공률이 매우 낮았다.
석목은 뛰어난 시력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열 번 넘게 시도해서 겨우 두 장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똑! 똑!
그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석목의 붓끝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자 이미 절반 가까이 만들어진 부적지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석목은 낯빛을 살짝 흐리며 붓을 내려놓고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후새뢰가 서 있었다.
기쁜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던 후새뢰는 석목의 표정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지?”
석목이 물었다.
후새뢰는 요즘 석목을 대신해서 줄곧 성에서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눈치가 굉장히 빠른 편이라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절대 석목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았다.
“비성에서 이루어지는 예선시합을 담당하는 명월교의 사자가 성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현재 성의 서쪽에 위치한 객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후새뢰가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자.”
석목은 방을 나와서 문을 열쇠로 잠갔다.
후새뢰는 기뻐하며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일 각 후, 두 사람은 그리 크지 않은 객사 앞에 도착했다.
그 앞에는 명월교의 복장을 한 사람이 이미 많이 모여 있어서 매우 소란스러웠다.
석목은 말없이 서서 주위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 사자 어르신은 이전에 오신 분들과는 다른 것 같군.”
“응, 확실히 좀 달라. 비성의 지부 내에서는 거물급인 이 선배님마저 방금 인사드리러 갔다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했다고 하더군.”
“사자 어르신은 어젯밤에 상인으로 위장해 몰래 성에 들어왔다고 해.”
* * *
그들의 말을 듣고 석목은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총단에서 온 사자는 외부인과 접촉을 꺼리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잠시 말없이 생각하던 석목은 객사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후새뢰가 다급히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객사를 한 바퀴를 돈 두 사람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석목은 객사 안의 유일한 삼 층 건물을 눈여겨본 뒤, 자신의 객잔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하늘에 휘영청 밝은 달과 수많은 별이 떠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검은 옷을 입은 석목과 후새뢰가 객사의 담 옆에 다시 나타났다.
그곳은 비교적 구석진 곳이라 경비가 지키고 있지 않았다.
잠시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석목은 담 너머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후새뢰를 붙들고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곧 두 사람의 발아래 나타난 하얀 구름이 나타나서 그들을 태우고 삼 층 건물을 향해 천천히 날아갔다.
평소보다 법력의 소모량이 증가하긴 해도, 기운술로 다른 사람을 태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후새뢰는 흥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행술법은 아주 보기 드문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계술사라 하더라도 공중을 비행할 수 있는 자는 매우 희귀했다. 그러니 영계술사인 그가 비행을 해봤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삼 층 건물의 꼭대기에 내려섰다.
건물 전체에서 오직 삼 층의 응접실에서만 등불이 빛나고 있었고, 안에서 어렴풋이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이동한 석목은 기와를 하나 벗겨내고 그 사이로 내부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응접실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회색 옷을 입고 사십 대로 보이는 앙상한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명월교 비성 지부의 권 집사였다.
회색 옷을 입은 남자의 몸에서 느껴지는 법력의 파동을 가늠해보니 그는 성계술사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선발대회의 예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석목은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명월교 총단에서 파견된 사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권 집사는 바로 그 남자의 사제였다.
석목이 둘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이, 권 집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 사형, 제가 최근에 좋은 정보를 얻었는데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권 집사가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정보지?”
회색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물었다.
권 집사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품속에서 하얀색 옥간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가 팔을 흔들자 옥간이 하얀 빛을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