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사칭
옥간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빛이 허공에서 빛의 장막을 형성했다. 곧 장막의 표면에 잔잔한 파문이 일더니 커다란 덩치를 가진 남자의 모습과 작은 글자가 몇 줄 나타났다.
남자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검은 흑발을 가지고 있었으며, 등 뒤에 검은색 곤봉과 도를 교차해 메고 있는 모습이 매우 사나워 보였다.
석목 옆에 엎드려 있던 후새뢰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석목을 한 번 힐끔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석목은 후새뢰의 행동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석목? 이 자는 누군데 유안과 함께 지명수배가 되었지? 유안 곁에 이런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물었다.
“그것까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유 전주가 새로 거둔 측근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 수배령은 진짜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보세요!”
권 집사가 말했다.
“지금 이걸 나에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지? 설마….”
회색 옷을 입은 남자의 표정이 흔들렸다.
“얼마 전 이 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며칠 전 우연히 이 지명수배령을 보고 알아챘죠. 사람을 시켜 확인해본 결과 이 자는 아직까지 성 안에 있어요. 아마 선발대회의 예선을 위해 남아 있는 것이겠죠.”
권 집사가 남자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우리 두 사람이 함께라면 고작 성계술사 하나를 처리하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겠지. 일이 잘 마무리되면 네가 이 낡은 성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창랑전주에게 잘 말해주도록 하겠다.”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사형!”
그 말을 들은 권 집사가 기뻐하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 순간, 건물 옥상의 상공에서 갑작스럽게 생겨난 법력의 파동이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나가 건물을 뒤덮었다.
그와 동시에 건물 밖의 모든 기척이 일순간 사라졌다. 법력의 파동을 감지한 회색 옷을 입은 남자와 권 집사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천장이 폭발하더니 금색 빛줄기가 권 집사를 향해 쏘아져 날아왔다.
동시에 일 장 크기의 붉은 도광이 회색 옷을 입은 남자를 향해 날아왔다.
권 집사는 깜짝 놀란 와중에도 상당히 빠르게 반응했고, 순간 그의 머리 뒤로 별 모양 환영이 하나 나타났다. 그가 어디선가 꺼내든 지팡이를 힘차게 휘둘렀다.
지팡이에서 회색 연기가 솟아나오더니 그 사이에서 세 개의 두개골이 나타났다. 두개골에서 뻗어 나온 흰색 실이 금빛의 물체를 하얀 실타래처럼 휘감았다.
하지만 바로 뒤이어 실타래가 금빛으로 폭발하더니 하얀 실들이 가닥가닥 끊어져 떨어졌다.
그 사이에서 솟아나온 금전단검이 금색 화염이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검으로 변해 세 해골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퍽!
거대한 금색의 검이 두개골들을 일격에 가루로 만들었다.
“영기!”
권 집사가 놀라서 소리쳤다.
거대한 금전검이 방향을 돌리며 손잡이로 권 집사의 머리를 살짝 쳤다.
권 집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기절했고,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옥간을 떨어뜨렸다.
같은 시간, 회색 옷을 입은 남자의 머리 뒤에는 별 모양의 환영 다섯 개가 나타났다. 두 손으로 계속해서 수인을 맺고 있는 그의 전신에서는 회색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서른 자루가 넘는 뼈창이 연기 사이에서 빼곡히 나타나더니, 빠르게 다가오는 도광을 향해 한꺼번에 날아갔다.
펑! 펑! 펑!
십여 자루의 창이 도광과 충돌했고, 그러자 붉은 도광은 결국 붉은 빛으로 변하면서 흩어져 사라졌다.
그 순간 남자가 한 팔을 들어 올리자, 남은 십여 개의 창이 방향을 전환해 위쪽으로 날아갔다.
창이 향하는 곳에는 파괴된 천장 사이로 뛰어내린 석목이 내려오고 있었다.
석목은 어느새 하얗게 변한 두 주먹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창들을 향해 뻗었다.
펑! 펑!
창들은 마치 망치에 맞은 것처럼 창끝부터 갈라지기 시작했고, 결국 부서져서 바닥에 쏟아졌다.
바닥에 착지한 석목이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금색 검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며 남자에게 날아갔다.
그 순간, 남자가 어느새 손에 나타난 회색 부적을 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부적이 폭발하더니 은은한 회색빛으로 변해 금색 검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금전검의 움직임이 멈추더니 활활 타오르던 금빛 화염이 꺼졌고, 동시에 뿜어내던 빛 역시 매우 약해졌다. 허공에서 잠시 흔들거리던 금전검은 결국 바닥에 떨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하, 너였구나. 찾으러 가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제 발로 걸어 나왔군! 네가 무공의 경지가 높을 뿐 아니라 영기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네놈에겐 안타깝게도 나에겐 예령부(秽灵符)가 한 장 있었지. 이제 얌전히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자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금전검을 힐끗 보며 말했다.
“설마 같은 명월교 사람을 적국에게 갖다 바치고 현상금을 받으려는 건가?”
석목이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권 집사 옆에 떨어진 옥간을 보며 물었다.
“하하, 그렇다! 나는 언제나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일을 처리하니, 들킬 걱정은 해주지 않아도 좋다. 설령 유안이 직접 찾아오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나를 어떻게 할 수 없겠지! 이제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목숨을 내놓아라!”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석목의 발치에 있던 뼈창의 조각들이 분분히 날아올라 족쇄로 변하더니 석목의 두 다리를 속박했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몸이 마치 공기라도 주입한 것처럼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이어 피부가 검푸르게 변하고 전신에 검은 털이 빼곡히 자라났다.
또한 그의 입에서 두 쌍의 어금니가 자라났고, 괴수의 그것처럼 손톱이 길고 날카롭게 솟아나왔다.
알고 보니 이 남자는 상당한 경지의 성계술사였을 뿐만 아니라 선천후기의 수준까지 강시공을 수련한 자였다.
“죽어라!”
강시는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갔다. 이어 강시의 두 팔이 순간 흐릿해지더니, 곧 실내에 빼곡히 나타난 조영이 석목을 조각낼 기세로 날아갔다.
바로 그때, 석목의 가슴에서 검은빛이 반짝이더니 두 팔과 두 다리에 검은 비늘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석목이 푸른 부적을 몸에 가져다 댔다.
펑! 펑!
석목의 두 다리를 속박하고 있던 뼈 족쇄가 순식간에 부서져 사라졌다.
속박에서 벗어난 석목은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바로 앞까지 다가온 조영이 그의 몸을 순식간에 갈기갈기 조각냈다.
그 순간, 조각난 석목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흩어져 사라졌다. 그것은 풍영부에 의해 만들어진 환영에 불과했다.
강시로 변한 남자가 아직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 뒤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지계의 강자에 근접한 엄청난 힘이 쏟아졌다.
퍽! 퍽! 퍽!
여러 개의 권영이 그의 등 곳곳에 일정한 속도로 꽂혔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뒤이어 석목의 손날이 그의 뒷목을 스치듯 치고 지나갔다.
기절해서 바닥에 쓰러진 강시는 앙상한 남자의 모습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쓰러진 남자의 뒤에 서 있는 석목의 전신에는 푸른빛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나쁘지 않군….”
석목은 만족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상대를 빠르게 제압하기 위해 처음으로 고급 부적인 풍영부를 사용했다. 동시에 괴수화까지 하자 움직임이 놀라울 정도로 빨라져서 손쉽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금전검을 주워든 석목은 그것을 정신력으로 점검해보고 살짝 안심했다.
예령부는 금전검의 영성을 일부 없애 잠시 기능할 수 없게 만들었을 뿐, 영기 자체를 손상시킨 것은 아니었다. 체내에 한동안 담아두면 다시 영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전검을 챙긴 석목은 바닥에 떨어진 흰색 옥간을 진묘계 안에 챙겨 넣고 구멍 난 천장을 향해 손짓했다.
석목이 손을 드는 순간 후새뢰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어째서 두 사람을 전부 살려둔 것이죠?”
후새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는 석목의 실력에 대해서 갈수록 경외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 총단의 사자는 비성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용술이 뛰어난 네가 그로 변장해 예선전을 진행하도록 해라.”
석목의 말에 후새뢰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변장 후 무슨 일을 해야 되는지는 네가 그에게 직접 묻도록 해라. 권 집사에게 지명수배령에 관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언급하지 않았는지 물어보는 것을 잊지 말고.”
석목이 말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후새뢰가 순간 기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석목의 말에서 자신을 굉장히 신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후새뢰는 해골 두 구를 소환해서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을 방 안으로 옮겼다.
곧 끔찍한 비명소리가 방 안에서 울려 퍼졌다.
석목은 그 소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제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눈을 감았다.
* * *
반 각 후, 건물 안.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다 말했으니 목숨만은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일은 절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습니다!”
총단의 사자는 회색빛에 전신이 뒤덮여 있었다. 그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는지 일그러진 얼굴로 후새뢰에게 계속 빌었다.
그는 옆에 쓰러져 있는 권 집사를 힐끔 보았다. 권 집사는 바닥에 팔다리가 못 박힌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이미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며, 두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명월교에는 사람의 영혼과 육신에 끔찍한 고통을 줄 수 있는 수단이 있었다. 후새뢰는 교내에서 지위가 높진 않았지만, 이런 방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회색 옷을 입은 남자 역시 과거 이 수단을 이용해 많은 사람으로부터 자백을 받아냈다. 그러나 당시에는 자신이 똑같은 방법에 당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후회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그는 명월교 총단에서 고작해야 소두목에 불과했는데, 창랑전주 덕에 특사의 신분으로 비성까지 오게 됐다. 한 몫 벌 수 있는 기회인데 하필 석목을 노리다가 현재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남자가 갑자기 문 쪽을 향해 말했다.
“제가 석 대인을 따르겠습니다! 불안하시다면 금신주에 저의 원신을 일부 담아서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제가 배반할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 말에 후새뢰는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오는 석목을 보고 말했다.
“물어봐야 할 것은 전부 물어봤습니다.”
“석 대인, 이 자는 고작 영계술사에 불과합니다. 저는 무공과 술법을 동시에 익혔으며 경지가 훨씬 높으니 분명 저 자보다 유용할 것입니다!”
남자가 빠르게 말했다.
분노한 후새뢰는 그 자를 단칼에 찔러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석목이 바로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꾹 참았다.
석목이 손을 흔들어 후새뢰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놀란 후새뢰는 남자를 바닥에 던지고 옆으로 물러났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인이 추후 반드…..”
몸이 풀려난 남자는 아등바등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리고 왼손을 허리춤에 몰래 넣어 부적을 쥐었다.
바로 그때, 한 줄기 금빛이 남자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푹!
남자의 목에 뚫린 커다란 구멍에서 선혈이 마구 솟구쳐 나왔다.
남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필사적으로 목을 틀어막아 피가 흘러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곧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서 바닥에 쓰러진 채로 숨이 끊어졌다.
이어 금빛이 다시 한 번 날아가더니 옆에 있는 권 집사의 목을 꿰뚫었다.
후새뢰는 그 광경을 가만히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