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199화 (199/916)

199화. 깨어나다

유안이 말을 이었다.

“백 년 동안 때를 기다리던 두 종문이 현재 다시 힘을 합쳐 우리 국경을 침범하려 하는 것은, 아마도 좋은 의도 때문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만약 그들과 맞서 싸우다가 명월교가 와해된다면 하늘에서 동방교주와 명주를 무슨 낯으로 뵐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것인지 명확히 말하시오.”

곽척이 물었다.

“각 지부의 제자들에게 두 종문의 동향을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하고, 상대가 영토에 침범한 순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격 속도를 지체시키도록 지시해야 합니다. 동시에 총단에 일부 제자를 남겨둬서 호교대진으로 지키도록 하고, 나머지 사람이 정예 제자들을 데리고 서하대륙으로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안이 장내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려면 너무 많은 제자를 희생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묘령의 여인이 물었다.

“모두가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니 일부 포기와 희생은 감수해야지. 하지만 일말의 희망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가치 있는 희생이라고 생각하네.”

유안이 말했다.

“유 전주의 말이 맞네. 서해를 건넌다면 두 종문도 한동안 우리를 어찌할 방도가 없을 거야. 서하대륙은 위험하지만 자원이 풍부하니, 잘만 한다면 재기를 해서 반격을 꽤할 수 있겠지.”

피부가 검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 전주, 그 계획은 나쁘지 않으나 우리에게는 한해거주(瀚海巨舟)가 다섯 척밖에 없네. 한 척에 이백 명이 탈 수 있다고 계산하면 겨우 천 명 밖에 갈 수 없어. 그들마저 바다를 건너는 과정에서 일부 목숨을 잃을 텐데, 서하대륙에 간다 해도 그 정도 인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

곽청이 말했다.

사람들이 다시 유안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선박이 부족한 것은 큰 문제였다.

서하대륙으로 향하는 바닷길은 무려 만 리에 달했고, 도중에 무수한 해수와 풍랑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일반적인 배로는 바다를 건너는 것이 불가능했다. 영기급인 한해거주를 타야 서하대륙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오천 명은 확실히 태우고 갈 방법이 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네.”

유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본교의 존망이 걸린 일인데 어찌 유 전주의 말만 믿고 행동할 수 있겠나. 실패하면 처벌을 받겠다는 군령장(军令状)이라도 써야지.”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적봉이 무언가 말하려 할 때 유안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좋네. 약속하지. 우호법님과 각 전주에게 약속드립니다. 만약 두 달 안에 선박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두 말 없이 반역죄로 처분을 받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눈빛으로 유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선박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시간이 급박해. 본교의 정예 제자들은 각지에 흩어져 있는데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인원을 선발해 집결시킬 생각이지?”

묘령의 여인이 다시 물었다.

“그와 관련된 것은 이미 생각해둔 방안이 있습니다. 현재 각 지부에서 서하대륙 원정을 위한 선발전이 이루어졌으니 우리는….”

유안이 살짝 웃으며 생각해둔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반론을 내놓지 않았다.

“이 일은 유 전주가 전권을 맡도록 하게. 교내의 자원 역시 필요한 만큼 사용해도 되네. 다만 서해대륙 깊은 곳에는 해수가 많으며, 해족이 우리 명월교에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반드시 유의해야 하네.”

백발의 노인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유안이 백발의 노인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다.

* * *

어느 넓은 길 옆에 거대한 호수가 있었다.

저녁노을에 금빛으로 물든 호수는 불어오는 바람에 물결이 일어 반짝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백 마리의 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고, 가장 앞에 있는 사람은 회색 옷을 입은 마른 남자였다.

남자는 하늘을 한 번 보더니 고삐를 잡아당겼다.

뒤따라오던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고 각자 말을 멈춰 세웠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곳에서 하루 묵고 내일 다시 출발한다.”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오백 명이 넘는 사람이 대답을 한 뒤 말에서 내려 각자 휴식을 취할 곳을 찾았다.

회색 옷을 입은 남자는 역용술로 변신한 후새뢰였다.

그들이 비성에서 출발한지 벌써 일주일가량이 지났다.

국력이 쇠퇴한 서하고국은 마을이 상당수 줄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야외에서 숙영을 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일행은 이미 그것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석목도 말에서 내렸다. 그를 태우고 하루 종일 달린 말은 진즉에 지쳐 있었다. 만약 그가 수시로 진기를 주입해주지 않았더라면 벌써 지쳐 쓰러졌을 것이다.

석목은 말을 호숫가로 끌고 가서 물과 사료를 먹인 뒤, 쉴 만한 곳을 찾아갔다.

“목 형.”

그가 막 자리에 앉았을 때 얼굴에 푸른 문신을 하고 회색 옷을 입은 여의 청년이 다가왔다.

석목이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의는 여정 내내 틈만 나면 다가와 석목에게 말을 붙였다.

여러 차례 대화를 통해 석목은 그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서하대륙에 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그는 실력이 있는 사람과 친분을 쌓아 선발전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주워들은 소문에 따르면, 곡양성에 도착한 뒤 이루어지는 경기 중에는 일대일 시합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석목은 그 소식에 대해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으며, 힘을 합치자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의는 틈만 나면 석목을 찾아와 말을 걸었고, 그 덕분에 석목은 곡양성에 관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서하고국의 수도 곡양성은 명월교 총단이 있는 음시산맥과 인접해 있었으며, 서쪽으로는 서해와 맞닿아 있는 바다와 산을 낀 커다란 성이었다.

과거 서하고국이 번성했을 시기에 곡양성은 육산왕조의 천우성과 비견할 수 있을 만큼 번화한 곳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명월교가 백 년 전 전쟁에서 패하면서 서하고국의 국력이 피폐해지자, 곡양성 역시 날이 갈수록 쇠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곡양성은 여전히 서하고국에서 최고로 번화한 곳이었다.

어느새 점점 석양이 지고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아주 약간 남아 있었다.

여의와 잡담을 나누던 석목이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곧 하늘이 어두워지고 새들도 전부 보금자리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주 높은 하늘에는 아직도 남아서 배회하는 새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석목이 미간을 찌푸렸다.

“목 형, 무슨 일이죠?”

석목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여의가 물었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늘에서 검은 새가 우리를 뒤쫓고 있어요.”

석목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들이 비성을 떠날 때 나타난 검은 새들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줄곧 일행을 뒤쫓았다.

“흑익사취(黑翼狮鹫)들을 말하는 건가 보군요.”

여의가 하늘의 검은 새들을 한 번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흑익사취요?”

석목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여의의 태도를 보니 그는 아무래도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저것은 천마종이 기르는 새입니다. 적의 정황을 탐색하는데 사용하죠.”

“천마종? 여 형의 표정을 보아하니 별로 놀라지 않는 것 같네요?”

석목이 말했다.

“천마종은 몇 십 년 전부터 흑익사취를 우리 서하고국 국경 내에 수시로 보냈어요. 흑익사취는 실력이 상당히 강하며 빠르고 높이 날아서 일반인은 그것들을 어찌하지 못하지요. 종문 역시 저것들을 처리하기 위해 강한 제자를 파견해 일 년 넘게 공을 들였지만 효과는 미약했습니다.

지계의 존재 혹은 여러 명의 성계술사가 힘을 합쳐야 겨우 처리할 수 있으니 대가가 너무 큰 것이죠. 천마종은 흑익사취를 보내는 것 말고는 다른 이상한 행동은 하지 않기에 더 이상 저것들을 잡기 위해 열을 올리지 않았고, 시간이 흘러서 모두 익숙해졌어요.”

여의가 차분하게 말했고, 석목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 형은 전혀 몰랐어요?”

여의가 의아한 듯 물었다.

“저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느라 서하고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원래는 다른 나라에 있었나보군요. 그럼 그전에는 어디에서 활동했나요?”

여의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육산왕조요.”

석목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러자 여의의 표정이 흔들렸다.

“유안 전주 때문에 육산왕조가 최근 명월교 교도들을 몰아세우고 있어요. 더 이상은 그곳에서 지낼 수 없게 되어 서하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석목이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여의가 말했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석목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먼저 실례할게요.”

그는 여의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끌고 자리를 떠났다.

그 바람에 여의도 일어나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하루 종일 길을 재촉한 탓에 일부는 이미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모닥불을 지피고 아직까지 큰소리로 웃고 떠드는 이들도 있었다.

석목은 말을 끌고 무리의 가장 외곽으로 걸어갔다.

그는 주위를 한 번 살펴보고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어딘가로 달려갔다.

무리에서 몇 리나 이동한 석목은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고 품속에 손을 넣어 채아를 꺼냈다.

채아의 몸은 붉은 빛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빛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채아는 기절한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석목은 점점 밝아지는 붉은빛을 보며 크게 기뻐했다.

붉은빛이 점점 밝아지다가 굉음과 함께 화염으로 변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채아의 깃털에 칠해진 검은 염료가 점점 벗겨졌다.

석목은 살짝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선천진기를 뿜어내 뜨거운 열기를 차단했다.

화염이 타오르며 채아의 몸에 칠해진 염료가 전부 깨끗하게 녹아내렸고, 곧 화사한 깃털이 드러났다.

석목은 멍청한 표정이 되어 채아의 머리를 보았다.

채아의 머리 위 붉은색 깃털 옆에 어느새 하얀색 깃털이 자라 있었다.

바로 그때, 화염에 감싸인 채아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채아의 눈에는 하얀 빛이 감돌고 있었다.

석목의 표정이 굳었다. 채아의 눈이 자신의 마음속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기분에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 하얀빛은 채아의 몸을 뒤덮은 화염과 함께 곧 사라졌다,

“석두!”

석목의 어깨에 날아와 앉은 채아가 폭신폭신한 머리를 그의 볼에 비비며 소리쳤다.

“드디어 일어났네.”

석목이 채아의 머리를 밀어내며 말했다.

“내가 오래 잤어?”

채아가 물었다.

“응. 벌써 한 달이 넘었어.”

“그렇게나 오래?”

채아가 놀란 듯 눈알을 굴렸다.

채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이전보다 상당히 강해져 있었다.

“영석을 먹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탈바꿈하는 것은 건앵 일족 사이에서 흔한 일이야?”

석목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나 같이 순수한 혈통을 가진 건앵만이 가능해.”

채아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석목이 무언가 말하려 할 때 채아가 갑자기 석목이 걸어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석두, 조심해. 누군가 오고 있어!”

놀란 석목 역시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정신력을 발산했다.

하지만 그의 시력과 정신력으로는 어떤 수상한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석목은 눈썹을 찌푸리며 채아의 시야를 공유했고, 그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나무, 하늘, 지면이 무척이나 뚜렷하게 보였으며, 주위 수십 리의 모든 정황이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시야를 가린 나무는 반투명한 회색으로 변해 투시할 수 있었다.

주위 호수를 들여다보자 마치 물이 없는 것처럼 호수 안에 있는 것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바로 그때, 숲속의 나무를 관통한 석목의 시야에 회색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후새뢰야. 역용술을 사용해 다른 사람으로 변했을 뿐이야.”

석목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안심했는지 채아가 날개로 가슴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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