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삼엄한 수비
보름 후, 수백 마리의 말이 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흙먼지를 뭉게뭉게 일으키며 어느 거대한 성 앞에 멈춰 섰다. 바로 석목 일행이었다.
명월교 총단의 소환령을 받은 후, 이들은 거의 쉬지도 않고 질주해서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다.
앞쪽에 보이는 거대한 성은 바로 서하고국의 수도 곡양성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지쳐 있었으며, 그들이 타고 있는 말들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가장 뒤에 있는 석목이 탄 말은 입가에 흰 거품을 물고 몸을 살짝 떨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석목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말의 호흡이 조금 편안해지며 몸의 떨림이 멎었다.
석목은 말의 목을 두드려준 뒤 입가를 쓰다듬어주며 단약을 먹였다.
말이 작게 울며 단약을 씹어 삼켰다. 그러자 곧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빠르게 잦아들었다.
석목은 시선을 돌려 성을 바라보았다. 외관을 보니 천우성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웅대한 성이었다.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수리되지 않았는지 성벽 곳곳에 파괴된 흔적이 있었다. 줄줄이 균열이 난 그 모습이 마치 늘그막 노인의 얼굴에 패인 주름처럼 보였다.
“후…. 드디어 도착했군.”
총단의 사자로 변장한 후새뢰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뒤따라오던 수백 명의 사람 역시 말에서 내렸다. 그들은 눈앞의 거대한 성, 그리고 회색 연기에 뒤덮인 채 멀지 않은 곳에 우뚝 솟아 있는 산맥을 바라보았다.
오백 명이 넘는 이들은 모두 명월교의 제자였지만, 그중 절반 정도는 이곳에 오는 것이 처음이었다.
“가자. 성으로 들어간다.”
후새뢰가 말을 끌고 성문을 향해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성문 입구에서는 회색 갑옷을 입은 서하고국의 병사가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었다.
성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누구나 엄중한 검문을 거쳐야 했으며, 특히 명월교도가 아닌 사람은 몸수색까지 받았다.
“흠, 이상하군요.”
석목의 옆에 있던 여의가 말했다.
“이전에는 지금과 달랐나요?”
석목이 물었다.
“이 년 전에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애초에 성문을 지키는 병사조차 없었지요.”
여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일행을 따라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채아는 평범한 앵무새처럼 석목의 어깨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 앵무새는 정말 얌전하네요.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는 것 같지가 않아요.”
여의가 채아를 한 번 보더니 말했다.
석목이 웃으며 손을 뻗어 채아를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견과를 하나 먹였다.
석목은 갑자기 나타난 채아에 대해 숲의 호숫가에서 주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채아는 며칠간 평범한 앵무새인척 연기했고, 사람들은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일행이 성문 근처에 도착했을 때, 거대한 대열을 이룬 그들은 이미 주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석목은 성문의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는 이곳에서 정신력을 뿜어낼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 대신 채아와 시야를 공유했다. 그러자 성문 주위의 모든 것이 매우 뚜렷하게 보였다.
“넷, 다섯, 여섯…. 총 여섯 명.”
석목이 눈을 반짝였다.
성문 주위에는 강력한 기운을 가진 사람 여섯 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성계술사 혹은 선천무인이었다.
“누구냐!”
수문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비성에서 왔네.”
후새뢰가 침착하게 말하며 품속에서 검은색 옥판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상대는 옥판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후새뢰에게 인사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들어가시지요. 길을 열어라!”
그가 옥판을 후새뢰에게 돌려준 뒤 손을 흔들며 외치자 경비병들이 길을 텄다.
“검문은 받지 않아도 되나?”
후새뢰가 물었다.
“이 검문은 적국의 첩자를 막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명월교의 정예 제자이니 당연히 검문을 할 필요가 없지요.”
수문장이 말했다.
후새뢰는 속으로 조금 긴장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표정의 변화를 제어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수문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새뢰는 일행을 끌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서하고국의 수도인 곡양성은 이전까지 봤던 성들과는 달랐다. 도로에는 돌이 평평하게 깔려 있었으며 길가의 건물들은 상당히 깨끗하고 넓었다. 성 안에 유동인구도 상당한 걸 보니 꽤나 번화한 것 같았다.
석목은 성 안을 둘러보았다. 그는 여의에게 미리 설명을 들어서 곡양성이 크게 동쪽과 서쪽 구역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교적 작은 서쪽 구역은 명월교가 통제하는 지역이었다. 성에는 명월교의 커다란 지부가 있었는데, 이어지는 선발전은 바로 그곳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동쪽 구역에는 민가와 상점이 집중되어 있었다. 현재 일행이 있는 곳이 바로 성의 동쪽 구역이었다.
“지부에 가면 그쪽에서 너희를 위한 거처를 마련해두었을 것이다. 긴 여정동안 길에서 먹고 자느라 힘들었을 테니 우선 휴식을 취하도록.”
후새뢰가 몸을 돌려 모두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후새뢰에게 인사했다. 그들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많이 지쳐 있었기에, 확실히 휴식이 필요했다.
석목이 사람들 사이에서 놀란 눈으로 주위 상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게들의 규모는 천우성의 커다란 상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상당했다.
석목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등 뒤의 도와 곤을 보았다.
“물건을 사시려는 겁니까? 제가 이 성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원한다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여의가 말했다.
“고맙지만 아직은 고민 중이에요. 도움이 필요하면 그 때 다시 부탁할게요.”
석목의 말에 여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 시진 후, 일행은 회색 건물들이 넓게 깔려 있는 서쪽 구역에 도착했다.
명월교의 대형 지부가 위치한 이곳은 선발전 때문인지 많은 제자들이 오가고 있었다.
일행이 한 대전 앞에 도착하자 회색 옷을 입은 집사가 제자 두 명과 함께 걸어 나왔다.
“비성지부에서 선출된 참가자들이죠? 방금 입성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후새뢰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창랑전의 당주 이신입니다. 비성의 선발전 참가자들을 인솔하기 위해 사자로 파견됐지요.”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집사는 품속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 후새뢰의 얼굴과 비교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후새뢰는 속으로 마음을 놓았다.
“따라오시지요. 너희는 저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안내해라.”
집사가 옆에 있는 두 제자에게 지시한 뒤 대전 안으로 향했다.
후새뢰는 석목을 향해 눈에 띄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뒤, 집사를 따라 대전으로 들어갔다.
“저희를 따라오시지요.”
명월교의 두 제자가 정중한 태도 말하며 앞장서 걸어갔다.
석목은 후새뢰의 뒷모습을 한 번 본 뒤 몸을 돌려 그들을 따라갔다. 어느새 그의 어깨 위에 있던 채아가 사라졌는데도 그것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집사를 따라간 후새뢰는 응접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은발의 노인이 기다란 탁자에 앉아서 마치 졸고 있는 듯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후새뢰는 노인의 기운을 살짝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는 마치 바다처럼 깊은 기운을 가진 월계술사였다.
“방 장로님, 비성의 대회 참가자들이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이분은 그들을 이끌고 온 총단의 사자 이신입니다.”
집사가 은발의 노인에게 공손히 말했다.
후새뢰 역시 그를 따라 인사했다.
그 말을 듣고 눈을 뜬 노인이 후새뢰를 한 번 보더니 꼿꼿이 앉으며 말했다.
“아, 오느라 고생했네.”
“종문을 위한 일이니 이 정도 고생이야 당연한 것입니다.”
후새뢰가 검은 옥판을 꺼내 은발의 노인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넸다.
노인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임무를 완수했으니 보상을 받으러 가거라.”
그는 옥판을 받아들더니 고개조차 들지 않고 후새뢰를 내보냈다.
후새뢰는 노인에게 인사하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대전을 나와 노인의 시야에서 벗어난 후새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뒤를 한 번 돌아본 뒤 다시 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갔다.
그는 노인이 말한 보상은 받으러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약 물건을 받을 때 명월령을 제출하게 된다면 정체가 탄로 날 가능성이 높았다. 또 애초에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후새뢰는 옷깃을 세워 얼굴을 절반 가까이 가린 뒤 건물을 벗어나 계속 걸었다.
일 각 후, 어느 외진 골목에 도착한 그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의 전신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하하,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디 쓰겠나.”
놀란 후새뢰는 검은 지팡이를 꺼내들고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소리의 근원지는 옆의 벽 위에 올라앉은 채아였다.
“채아, 깜짝 놀랐잖아!”
후새뢰가 채아를 보고 한숨을 쉬며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흥, 만약 석두가 가보라고 하지 않았다면 나도 오지 않았을 거야!”
채아가 구시렁거렸다.
그 말을 들은 후새뢰가 물었다.
“목 대인이 앞으로 어떻게 하라고 하셨지?”
“너 역시 대회에 참가하기는 하지만, 만약에 대비해 주위의 아무 객잔이나 찾아서 머물고 있으라고 했어.”
채아가 말했다.
“좋아, 거처를 정하면 방법을 찾아서 알리겠다고 네가 전해줘.”
후새뢰가 말했다.
채아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대답한 뒤 날아갔다.
후새뢰는 그 자리에서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고 삿갓까지 쓴 뒤 골목을 나섰다.
* * *
“이곳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바깥의 안내판에 선발전에 관련된 소식이 게시될 예정이니 자주 확인해주세요.”
명월교의 제자가 방문을 열며 말했다.
석목은 열린 문 사이로 내부를 둘러보았다. 방은 넓지 않았으며 안에는 침상 하나와 의자 하나, 탁자 하나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방의 한쪽 구석에는 외부에서 정신력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차단시켜주는 진법이 새겨져 있었다.
석목이 있는 곳은 검은색 고층 건물의 내부였다. 명월교에서 선발전 참가자들을 위해 마련한 거처로, 제공된 방은 평범한 객잔의 객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석목의 방은 일 층이었으며 근처에 커다란 게시판이 세워져 있었다.
“고맙습니다.”
석목이 방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명월교의 제자는 또 다른 사람의 거처를 안내해주기 위해 곧바로 떠났다.
석목은 방 안을 한 바퀴 돌아본 뒤 침상 위에 앉았다.
바로 그때, 창밖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날아온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 착지했다.
“석두, 후새뢰가 무사히 일을 마치고 벗어났어. 네가 말한 대로 이곳 근처에서 머물라고 했어.”
채아가 말했다.
“잘됐네. 한동안은 네가 그를 감시하도록 해. 금신주가 내 손에 있는 이상 배신은 하지 않겠지만, 이곳은 명월교의 소굴이니 신중을 기해야 돼.”
석목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걱정 마. 내 능력이라면 이곳에서도 언제든 그 원숭이 놈을 감시할 수 있어.”
“원숭이….”
채아의 말에 석목은 할 말을 잃고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무언가 중요한 공지가 올라왔는지 게시판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목 형, 왔군요.”
게시판 주위에 서 있던 여의가 석목을 발견하고 다가와 인사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죠? 무슨 중요한 공지라도 있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아, 다음 시합의 날짜가 한 달 뒤로 결정됐습니다.”
여의가 말했다.
“한 달? 그렇게나 빨리요?”
석목이 살짝 놀랐다.
그가 알기로는 원래 다음 시합은 두 달 정도 뒤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여의가 소리를 낮춰 말했다.
“명월교의 고위층이 최대한 빨리 서하고국으로 떠나길 원해 시합 일정을 앞당겼다고 합니다. 전국에서 모여들고 있는 제자들의 도착이 늦지만 않았다면 아마 일정이 더욱 앞당겨졌을 거예요. 참, 듣자하니 이번에 첫 번째 시합을 통과한 제자가 만 명이 넘는데 최종 선발되는 인원은 겨우 이백 명이라고 하니, 경쟁이 정말 치열할 겁니다!”
“그렇군요.”
선발전 참가자의 수를 들은 석목은 살짝 놀랐다. 명월교가 아무리 몰락을 했다지만 제자들이 곳곳에 퍼져 있을 뿐, 여전히 상당한 저력을 가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