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뜻밖의 일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 서노자는 곧장 독립된 석실을 향해 걸어갔다. 석목은 그의 뒤를 따라가며 석실을 바라보았다. 파란색 돌을 깎아 만든 석실은 언뜻 봐도 굉장히 특별해 보였다.
“서 대사님.”
“사부님!”
서노자를 발견한 사내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공손히 인사했다.
서노자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하나씩 화답했다.
서노자와 석목이 들어간 파란 석실은 크기가 크지 않은 개인 작업공간이었다.
정중앙에 놓여 있는 커다란 화로에는 불이 붙어 있었는데, 그럼에도 놀랍게도 석실의 내부는 전혀 뜨겁지 않았다. 무언가 대단한 술법으로 열기를 차단한 것 같았다.
화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검은 모루가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철제로 된 무기 거치대가 있었다.
거치대에는 누런 장궁 하나, 그리고 검은 도와 곤봉이 하나씩 있었다. 외관으 보면 이전과 대체로 비슷했다. 거치대 옆에는 검은 깃 화살도 스무 개 정도 세워져 있었다.
“우선 이 활을 보십시오. 흑익사취의 근육으로 활시위를 교체했으며, 그 깃털을 사용해 취미전(鹫尾箭)을 스무 개 만들었습니다.”
서노자가 파천궁과 깃이 검은 화살을 석목에게 건네며 말했다.
파천궁의 몸체 표면에는 부문이 늘어나 있었으며, 활시위는 완전히 새로 바뀌어 있었다. 화살은 총 스무 개였는데 깃은 흑익사취의 털을 사용했으며, 화살대에 부문들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활과 화살 모두 강한 법력의 파동을 뿜어내는 상급 법기였다.
석목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파천궁과 취미전을 진묘계 안에 챙겨 넣었다.
“감사합니다. 서 대사님.”
서노자가 손을 흔들더니 거치대에서 흑도와 곤봉을 들어 석목에게 건넸다.
무기들을 받아 든 석목은 먼저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중량은 이전과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았지만, 불순물을 모두 제거한 탓인지 크기는 조금 작아졌다.
둘 다 구조는 이전과 대체로 비슷해서, 하나로 합쳐 협도를 만들 수 있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석목은 운철흑도와 곤봉을 손에 쥐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친숙함을 느꼈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서노자가 한 말을 떠올리고 흑도와 곤봉을 자세히 살펴보았고, 문제가 무엇인지 곧바로 발견했다. 두 무기에는 어떤 술법진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석목은 고개를 들어 의아한 표정으로 서노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서노자가 먼저 설명을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제가 자만했습니다….”
처음에 서노자는 무기에서 불순물을 제거한 뒤 사람을 시켜 술법진을 새기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경도가 너무 높아진 것이 문제였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조그만 흔적조차 남길 수 없었으니, 술법진을 새기는 것은 더더욱 무리였다.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은 이것들을 법기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서노자가 죄송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전에 작업 보수로 받았던 영석 주머니를 저장반지에서 꺼내 석목에게 건넸다.
그는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 일은 제 실수입니다. 약속했던 일을 해내지 못했으니 이 영석들은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영석을 받은 석목이 갑자기 물었다.
“이곳을 제가 잠시 빌려 쓸 수 있을까요?”
“이곳을요? 가능합니다만….”
서노자는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화로 등의 사용방법들을 세세하게 가르쳐주었다.
서노자가 자리를 뜨자 석목은 병을 하나 꺼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과거에 남겨두었던 화금석의 독액이었다.
석목은 조금 불안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모루 쪽으로 다가갔다.
* * *
명월교 총단에 있는 명신전의 대전 안.
그곳에는 유안과 입이 큰 중년 남자의 자리를 제외한 나머지 십 대 전주의 자리가 전부 채워져 있었다.
“유 전주와 당 전주는 어디 갔지?”
주석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백발의 노인이 물었다.
원래도 쪼글쪼글했던 그의 얼굴에 주름이 더욱 많아진 것 같았다.
“당 전주는 소환수인 수정 해골이 사령계의 제단 근처에서 봉변을 당해, 직접 범인을 찾겠다며 사령계로 갔습니다. 유 전주의 행방은 저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곱슬머리 청년 곽청이 말했다.
“그럼 그 둘은 빼놓고 시작하도록 하지. 모두 이틀 전 일어난 일에 대해 대강은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구체적인 내용은 거문 전주가 설명해 주게.”
우호법은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틀 전 통천선교와 천마종의 부대가 각각 위국과 진국(陈国)을 통해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동남쪽에 위치한 동림과 임해, 동북쪽에 위치한 흑하행성(黑河行省)이 하룻밤 사이에 그들에게 함락되었죠. 그들은 함락한 성과 마을에 소수의 제자들만 남겨두고 밤낮없이 서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 속도라면 아마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이곳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상황은 이렇다. 모두 각자의 생각을 말해 보거라.”
백발의 노인이 말했다.
“현재 선발전에 참가한 제자들이 거의 다 모였습니다. 한해거주만 준비되었다면 유 전주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이어진 침묵을 깨고 묘령의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전주가 말했다.
“공 전주는 유 전주가 배를 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회의에 얼굴도 비추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배는 단 한 척도 구하지 못했을 것이네.”
곽청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창랑 전주, 애초에 유 전주가 말했던 기한은 두 달이었네. 아직 보름 밖에 지나지 않았고.”
붉은 눈썹의 남자 적봉이 반박했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네. 지금처럼 긴급한 상황에서 통천선교와 천마종이 두 달을 기다려줄 것이라고 생각하나? 총단이 포위된 뒤에 유 전주가 한해거주를 가져온들 어디 쓰지? 시체라도 싣자는 것이오?”
“그건….”
적봉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때, 밖에서 유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호법, 전주님들, 일이 있어 늦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유안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백발의 노인에게 인사한 뒤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유 전주, 이렇게 중요한 회의에 늦다니, 설마 한해거주 스무 척이라도 가지러 갔던 것인가?”
곽청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맞네.”
유안이 담백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의 말에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던 모두는 곧 기쁜 표정이 되었다.
“잘했다!”
백발의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말도 안 돼!”
곽청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본교의 존망이 걸린 일이니 모두 해변으로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유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반 시진 후, 곡양성 밖 서해의 어느 외진 바닷가에 명월교의 고위층들이 모였다.
“유 전주, 어디 한번 보여주게나.”
곽청이 말했다.
모두들 기대하는 눈으로 유안을 바라보았다.
유안은 아무 말 없이 저장반지에서 현묘한 부문이 촘촘하게 새겨진 소형 배를 꺼냈다. 강력한 영력의 파동을 뿜어내는 그것은 영기가 분명했다.
“한해거주가 맞구나!”
우호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안은 말없이 소형 배에 법력을 주입한 뒤 허공으로 던졌다. 그러자 회색 연기에 뒤덮인 배는 천천히 수면 위에 안착했다.
그 순간, 작은 배는 반짝 빛나더니 엄청난 속도로 커졌다.
각종 부문이 가득 새겨져 있는 이 배는 5층 누각선으로, 길이가 오십여 장, 너비가 십여 장이었다. 물 위로 드러난 높이는 오 장이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작은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것 같았다. 측면에는 덮개에 가려진 사각형 포문들이 있었다.
누각의 뒤에는 여러 사람이 겨우 둘러쌀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운 돛대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은은한 빛이 감도는 십여 장 길이의 커다란 돛이 걸려 있었다.
유안의 오른손이 끊임없이 반짝이자 똑같은 모양의 한해거주가 계속 나타났다.
모든 것이 끝나자 수면 위에는 스무 척의 한해거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곽청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말도 안 돼….”
적봉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존경의 눈빛을 담아 유안을 바라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한해거주가 준비됐다는 것은 계획대로 교내의 정예제자들을 데리고 서하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었다.
우호법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했다.
“좋다! 과연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구나.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차단하고 누구도 성을 나서지 못하도록 모든 성에 명령을 하달하라.”
* * *
한 시진 후, 명월교 지부의 거처.
나무 탁자에 앉은 석목은 손에 들린 운철흑도와 곤봉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러 차례 시도를 해봤지만 지금의 운철흑도와 곤봉에는 화금석의 독액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결국 운철로 만든 자신의 무기들은 매우 견고해졌지만, 그 대신 술법진을 새길 방법이 없어지면서 오히려 위력이 크게 감소한 셈이 됐다.
석목이 손에 맞는 새로운 상급 법기를 사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앞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연나가 나타났다.
“곤봉 빌려줘.”
석목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 곤봉에 살짝 문제가 생겼어.”
연나는 석목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라색 영혼의 화염을 반짝였다.
“곤봉에 새긴 술법진이 사라져서 더 이상은 법기가 아니야.”
석목이 말했다.
“상관없어. 곤봉 빌려줘.”
“연나, 혹시….”
석목은 문득 연나가 처음 운철곤봉을 빌려갔을 때의 상황이 떠올라서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석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람이 몰아치더니,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운철곤봉이 사라져 있었다.
석목이 고개를 들자 어느새 운철곤봉을 가져간 연나가 그것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 순간, 운철곤봉의 표면에 검은빛이 감돌더니 그 빛에 닿은 공간이 일그러졌다.
이어 검은빛이 다시 사라지더니 곤봉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그 과정은 석목이 방금 일어난 일이 착각이라고 느낄 정도로 평온했다.
깜짝 놀란 석목이 운철흑곤을 바라보았다. 방금 검은빛이 나타났을 때 운철흑곤에서 금전검보다도 훨씬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영석은?”
연나는 만족한 듯 영혼의 화염을 들썩이며 말했다.
석목은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진묘계에서 영석 천 개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꺼내 연나에게 던져주었다.
“더 필요해!”
“…얼마나?”
“주머니 네 개 더 줘.”
연나의 말에 석목의 눈가에 경련이 일어났다. 주머니 하나에 영석 천 개가 들어있으니 다섯 개면 무려 오천 개인데, 연나는 너무 쉽게 말하고 있었다.
“줄 거야, 말 거야?”
“주는 것은 가능해. 그 대신 먼저 이 운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해줘. 그리고 곤봉의 영기(灵气)를 소모하는 방법도.”
석목이 한 번에 두 개의 질문을 했다.
“그건…. 나도 몰라. 그저 익숙할 뿐이야.”
연나는 운철흑곤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영석 주머니 네 개를 더 꺼내서 연나에게 던져주었다.
영석 주머니를 받아 든 연나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치더니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석목은 연나가 떠난 후 그 자리에 서서 운철흑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연나의 말과 영기를 흡수해 무기의 중량이 늘어나는 현상을 종합해보면, 이 운철의 재질은 매우 특수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보다 훨씬 강한 연나가 굳이 이곳까지 와서 곤봉을 빌려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석목은 조금 흥분되어 운철흑도를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꼬박 하루 동안 수많은 방법을 시도해봤지만, 결국 어떤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래도 운철흑도와 곤봉에 대한 석목의 흥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으며, 새로운 법기를 사겠다는 생각도 사라졌다.
그 뒤 이틀 동안 석목은 선발전 때문에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부적을 제작해서 비싼 가격에 팔았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명월교 총단에서 일정을 앞당겨서 그 다음날 아침에 선발전을 시작하겠다는 공지가 갑자기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