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이상한 규칙
다음날 동틀 무렵, 석목은 사람들과 함께 한 집사의 안내에 따라 거처를 떠났다.
전날 석목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후새뢰도 합류했다.
이른 시간이라 길거리에는 행인이 전혀 없었다. 명월교에서 시합을 앞당긴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혀 공표하지 않은 것 같았다.
거리를 거니는 도중 다른 지역에서 온 무리도 하나둘씩 합류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발전에 참가하는 인원은 거대한 인파를 이루었다. 그들은 집사의 안내에 따라서 곡양성을 벗어나 서쪽으로 향했다.
시합이 진행되는 장소는 석목이 아는 것처럼 성 안에 있지 않았다. 한 식경 뒤, 석목 일행은 시합장으로 보이는 매우 거대한 건물에 도착했다.
시합장의 중앙에는 거대한 연무대가 있었고 주위 사방에는 관중석이 있었다. 다만 오랫동안 수리를 하지 않은 탓인지 조금 낡아 보였다.
둘레가 몇 리나 되는 연무대는 예선전에서 승리한 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두 올라가도 전혀 붐비지 않을 만큼 컸다.
석목은 연무대의 한쪽 구석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뿌연 하늘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후새뢰는 석목의 곁에 조용히 서 있었고 채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여의가 살짝 웃으며 다가왔다.
“목 형.”
여의의 곁에는 붉은 피부의 청년, 그리고 키가 크고 늘씬하지만 외모는 평범한 녹색 옷을 입은 묘령의 여인이 함께 있었다.
석목이 여의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최근 며칠간 외출을 하지 않는 것 같던데, 부적을 제작했나요?”
여의가 아첨하는 듯한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여의는 석목이 부적을 판매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 그가 부적술사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뒤로 더욱 호의를 가지고 다가왔다.
“하하, 최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조금 만들어보았습니다.”
석목이 웃으며 대답했다.
같이 웃던 여의는 석목의 옆에 서 있는 후새뢰를 보고 물었다.
“이분은 얼굴이 낯선 것 같은데 누구시죠?”
“이쪽은 제 친구 후새뢰입니다. 이쪽은 여의예요.”
석목이 간단하게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후새뢰가 인사했다.
여의도 인사를 하고 곁에 있는 두 사람을 석목에게 소개시켜주었다.
두 사람은 모두 술사였으며, 피부가 붉은 나 씨 성의 청년은 성계술사 초기, 녹색 옷을 입은 혁 씨 성의 여인은 영계술사의 끝자락에 있었다.
두 사람은 영계술사의 실력을 숨기고 있는 석목에게 별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여 형은 소식이 빠르니 오늘 어떤 시합이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겠죠?”
석목이 물었다.
“부끄럽군요. 저도 이리저리 알아보려 했지만 보안이 워낙 철저해 어떤 정보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여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면 기다리며 지켜보도록 하죠.”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무대 주위의 관중석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정면에 있는 둥근 천장의 건물 앞에 명월교의 제자 몇 명만 서 있을 뿐이었다.
그 건물 안에는 유안이 무거운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 옆에는 그의 사매인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있었다.
“대사형, 어떻게 종문의 제단 근처에서 나천귀왕이 중상을 입을 수가 있죠?”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천귀왕의 말에 따르면, 당 전주의 수정 해골을 습격했던 하얀 갑옷을 입은 녀석이 벌인 짓이라고 하더구나. 복수심에 눈이 돌아간 당 전주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나천귀왕도 중상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야.”
유안은 평온한 말투로 말햇다.
“전쟁으로 긴박한 상황에 당 전주의 죽음까지…. 엎친 데 덮친 격이군요.”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문이 열리더니 붉은 눈썹의 사내 적봉이 걸어 들어왔다.
“어떤가요?”
유안이 물었다.
“상황이 조금 좋지 않아. 통천선교와 천마종의 공세가 갈수록 거세져서 이미 서하고국 깊숙이 파고들어왔어. 이대로 가면 아마 하루도 되지 않아 곡양성까지 밀어닥칠 거야.”
적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호법과 다른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죠?”
유안이 물었다.
“우호법이 걱정하지 말고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하더군. 그와 총단을 지키고 있던 전주들은 서해 바닷가로 갔어.”
적봉이 말했다.
“적 사형, 잠시 후 시합에서 이긴 사람은 곧바로 해변으로 보내서 즉시 배에 태워주세요. 배에 사람이 가득 차는 순서대로 바로 출발시키도록 하고요.”
유안이 잠시 생각하다가 적봉에게 말했다.
적봉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패배한 사람들은?”
“바로 총단으로 데리고 가세요. 일부는 곡양성에도 남겨서 출항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하세요.”
유안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적봉은 그의 차가운 두 눈을 보고 몸을 흠칫 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린 적봉은 연무대 위의 사람들을 보며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시간이 거의 다 됐으니 시작하죠.”
유안이 말하며 건물 밖으로 나갔다. 적봉과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대답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이 높은 단상 위에 오르자 연무대 위의 사람들이 입을 닫고 고개를 들어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인파들 사이에 섞여 있던 석목은 유안을 발견했다.
최근 석목은 유안의 신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됐기 때문에,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늘 이곳에서 선발전의 두 번째 경기가 열릴 것이다.”
유안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흥분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합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사항을 공지하겠다. 성계술사 중기, 혹은 선천무인 중기 이상인 자는 시합에 참가할 필요가 없다. 경지가 확인되면 바로 세 번째 시합의 참가 자격이 주어질 것이다.”
유안이 이어서 말하자 장내가 순간 소란스러워졌다.
후새뢰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여의와 그의 일행인 두 사람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으며,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고 유안을 바라보았다.
유안이 언급한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들은 인파 속에서 나와서 명월교 제자의 안내에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석목의 경지가 선천중기인 것을 알고 있는 후새뢰가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석목은 태연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선천무인 중기나 성계술사 중기의 경지에 오른 실력이 있는 자들은 대부분 명월교 각 지부에서 당주(堂主)급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연무대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의 수는 오륙백 명 정도에 그쳤다.
본래 실력이 강한 자들이었기에 다른 참가자들도 여기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사람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후새뢰와 같은 성계 초기의 경지인 여의는 연무대 위에 남았다.
잠시 후, 더 이상 걸어 나오는 사람이 없자 유안이 말했다.
“그럼 남은 사람들은 두 번째 시합을 진행하겠다. 우선 모두가 투구를 하나씩 분배 받으면 구체적인 규칙을 공지하겠다.”
그가 말을 마치자 회색 투구를 든 명월교의 집사 수십 명이 연무대 주위로 다가왔다.
금속 재질의 투구는 어릿광대의 모자처럼 원뿔 모양으로 솟아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람들은 차례로 모자를 나눠 받기 시작했다. 석목도 자신의 모자를 보며 입술을 삐죽였지만 결국 머리에 착용했다.
그 순간, 모자에 빛이 감돌더니 가운데 ‘1052’라는 숫자가 생겨났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평범한 모자처럼 법력의 파동조차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석목은 모자에 정신력을 주입해보았다.
웅!
정신력이 주입된 모자가 살짝 진동하더니 숫자가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석목의 머릿속에 ‘430’이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가 스쳐지나갔다.
“이번 시합의 규칙은 아주 간단하다. 법모(法帽)에 정신력을 주입한 사람들은 그 안에 기록된 숫자를 모두 확인했을 것이다. 이번 시합의 목표는 그 숫자와 동일한 숫자가 적혀 있는 모자를 뺏는 것이다. 만약 모자를 뺏기 전에 자신의 모자를 빼앗기면 탈락이며, 떨어트리게 되면 즉시 실격이다. 뿐만 아니라 상대에게 중상을 입히는 자 역시 실격이다. 실격자가 발생하면 그 실격자의 경쟁 상대였던 사람은 자동으로 통과한다.”
유안의 목소리가 다시 연무대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연무대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특이한 시합 방식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규칙 때문이었다.
명월교에서는 주어진 자원을 분배하기 위해 이전에도 종종 시합을 진행했는데, 지금처럼 이상한 규칙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물론 살인을 하면 안 된다는 규칙은 종종 있었지만, 무기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니 시합 중에 사람이 다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유안은 사람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잠시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보아하니 모두 시합의 규칙을 잘 이해한 것 같군. 그럼 이제 시합을 시작하겠다!”
유안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사람과 거리를 벌리며 서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쾅!
벌써 자신의 목표를 찾았는지 몇몇 사람은 행동에 나섰다.
석목과 여의 일행 다섯 명도 서로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석목은 후새뢰와 함께 몸을 움직여 세 사람과 거리를 벌렸다.
“목표가 몇 번이지?”
석목이 전음을 사용해 후새뢰에게 물었다.
“2067번입니다. 저의 모자가 목표라면 바로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후새뢰가 즉시 대답했다.
“아니다.”
다행히도 두 사람은 서로의 목표가 아니었다. 석목은 즉시 자신의 목표 숫자를 후새뢰에게 전음으로 알려주었다.
“목 형, 후 형,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만 명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서로가 적이 될 확률은 적을 겁니다. 제 목표는 3605번입니다.”
여의가 자신의 번호를 말하고 옆에 있는 청년과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의의 뜻을 알아들은 두 사람도 각자 자신의 목표 번호를 알려주었다. 다섯 사람 중에는 서로의 목표가 없었다.
“개별 행동을 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 것 같은데, 함께 힘을 모으는 것이 어떨까요?”
여의가 제안했다.
후새뢰는 아무 말 없이 석목을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함께 행동하지요.”
석목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잘됐군요!”
그 말을 들고 여의가 기뻐했다.
그들은 다섯 사람 모두가 목표한 모자를 얻은 뒤 함께 연무대 아래로 내려가기로 약속했다.
“뒤에서 습격당하는 것을 피해야 하니 우선 구석으로 이동하죠.”
석목의 말에 따라 다섯 사람은 동그랗게 등을 맞대고 주위를 경계하며, 연무대의 한쪽 구석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동을 하면서 각자 자신의 목표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연무대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혼잡한 탓에 목표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상당수 사람이 석목 일행과 똑같이 무리를 이루어 행동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채아가 연무대 외곽에 착지했다.
채아가 자리를 잡은 곳은 연무장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곧 채아가 하얗게 빛나는 눈으로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채아와 시야를 공유한 석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목표를 찾았다.
“찾았다!”
상대는 술사로 보이는 이십 대 초반의 청년으로, 지금 그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어 석목은 후새뢰를 대신해서 그의 목표를 찾았다. 붉은색 대도를 들고 있는 상대는 선천초기의 무인으로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저와 후 형은 목표를 찾았습니다. 그쪽은 어떻죠?”
그 말을 들은 여의와 두 사람이 깜짝 놀랐고, 후새뢰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목 형의 목표가 확인되었으니 먼저 그곳으로 가서 목 형 상대자의 모자를 뺏죠.”
여의가 말했다.
“급할 필요 없습니다. 우선 세 사람의 목표를 찾아줄게요.”
석목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