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운철의 능력
석목은 단상 위의 유안을 힐끔 본 뒤 모자를 눌러쓰고 옷깃을 세워 얼굴을 가렸다. 이어 신비로운 금빛으로 변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뛰어난 시력을 가졌군요. 대단합니다!”
여의가 말했다.
석목은 부인하지 않고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후, 그가 어느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붉은 피부의 청년에게 말했다.
“하나 찾았습니다. 앞쪽 멀지 않은 곳에 목표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청년이 기뻐하며 감격한 표정으로 석목을 보았다.
“우선 저것을 먼저 뺏죠.”
일행은 석목의 제안에 이견이 전혀 없었다. 그들이 빠르게 목표에 다가갔다.
상대는 삼십 대로 보이는 남자로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붉은 나무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찾는 듯 연무대의 한쪽 구석에서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고개를 돌린 남자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석목 일행을 발견하고 표정이 굳었다.
남자의 머리 뒤에 별이 두 개 반짝이며 나타났다. 이어 남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달아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 붉은 빛이 반짝이면서 반 장 길이의 화염 뱀 여덟 마리가 생겨나 석목 일행을 향해 날아갔다.
순간 날아가며 허공에서 서로 뒤엉킨 화염 뱀들은 뜨거운 화염의 파도로 변해 석목 일행을 집어삼킬 기세로 몰아쳤다.
쾅!
석목이 무언가 행동하려 할 때 갑자기 지면이 큰소리와 함께 흔들리더니, 몇 장 높이의 두꺼운 흙벽이 일행 앞에 솟아올랐다.
여의가 바닥을 두 손으로 짚고 있었다. 그의 몸에 노란 빛이 감돌고 있는 것으로 보아 흙벽은 여의가 시전한 술법인 것 같았다.
쾅!
화염의 파도가 흙벽을 덮쳤다. 곧 커다란 소리와 함께 화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흙벽이 충격에 마구 흔들렸다. 그러나 흑벽이 붕괴되기 직전에 화염의 파도가 먼저 힘을 잃고 소멸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급하게 몸을 피해 화염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바로 그때, 흙벽의 옆에서 튀어나온 석목이 아직 뜨거운 공기 사이로 뛰어들며 손을 휘둘렀다.
석목의 손에서 하얀 빛의 사슬이 쏘아져서 도망가는 남자의 몸을 순식간에 묶었다.
남자는 고함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고,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차가운 칼날이 그의 목에 닿았다.
검은 도를 들고 있는 석목을 본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반항을 포기했다.
그때, 붉은 피부의 청년이 달려와 남자의 머리에서 모자를 채갔다.
“여 형, 목 형, 고마워요!”
붉은 피부의 청년이 석목과 여의를 바라보며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동하죠.”
높은 단상 위에서 시선을 느낀 석목이 다시 모자를 눌러 쓰고 자리를 피했다.
다른 일행은 석목이 어째서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별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단상 위에서는 유안이 묘한 표정으로 연무대의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유안의 옆에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그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유안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녀는 깜짝 놀랐다. 서하고국에 돌아온 이후 유안이 웃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유안이 보고 있던 곳을 바라보았으나,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적 사형, 이곳을 부탁할게요. 견 사매, 가자.”
유안이 옆에 있는 적봉에게 말한 뒤 소녀를 데리고 건물을 나섰다.
* * *
석목은 수백 장을 이동한 뒤 멈췄다.
단상 위를 바라본 석목은 유안이 이미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석목은 비록 유안을 몇 번 밖에 본 적 없었지만, 그가 매우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천우성의 경매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면 그의 실력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석목이 통천선교와 천마종에게 지명수배를 당하게 된 것도 그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유안은 석목을 끌어들이고 싶어 했지만, 명월교에 가입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상 그와는 최대한 접촉을 피하는 것이 좋았다.
‘서하대륙에 가면 그와 다시 만날 일도 없겠지.’
석목이 생각했다.
“목 형, 무엇을 보는 겁니까?”
여의가 물었다.
“아닙니다.”
석목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연무대 위에서는 어느새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목표를 찾아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장내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상대에게 중상을 입혀서는 안 된다는 규칙 때문에 격렬한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목표로 가죠.”
석목이 일행을 이끌고 앞으로 걸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싸움은 점점 격렬해졌다. 실력으로 상대의 모자를 뺏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른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금전적인 거래를 통해 모자를 교환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명월교 집사들은 전혀 제지를 하지 않았다.
시합이 시작되고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이미 이천 명에 달하는 사람이 연무대를 떠났다. 당연히 그중 통과한 이는 절반에 불과했다.
통과한 사람들은 명월교 집사들의 안내를 받아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탈락한 이들과 규칙을 어긴 이들도 집사들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떠났다.
쾅!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날아가서 연무대 바닥에 강하게 처박혔다.
그 자는 안색이 창백해졌을 뿐 중상은 입지 않았으나, 모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몸을 일으킨 남자는 원한이 서린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3605’가 적혀 있는 모자를 들고 있는 여의가 있었다.
“더 싸우고 싶은 건가?”
모자를 챙긴 여의가 그 남자를 보며 말했다.
주위에는 남자의 일행이 몇 명 더 있었지만, 그들은 겁에 질려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 앞에는 운철흑도를 손에 쥔 석목이 서 있었다.
여의를 노려보던 남자는 시선을 돌려 공포에 찬 눈빛으로 석목의 얼굴을 보다가, 결국 연무대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남자의 일행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 석목 일행과 거리를 벌렸다.
석목의 안내에 따라 연무대 위를 누비는 동안 일행은 여의와 후새뢰의 모자를 노리는 무리들과 마주쳤다.
상대를 상처 입혀서는 안 되는 규칙 때문에 일행은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모자를 떨어뜨렸고, 그 덕분에 그 모자를 목표로 하던 이들이 이득을 보았다.
현재 여의를 포함한 세 사람이 모자를 구했고, 이제 석목과 후새뢰의 모자만 손에 넣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목 형, 감사합니다. 덕분에 모자를 벌써 세 개나 모았군요.”
여의가 석목에게 말했다.
“별 것 아닙니다.”
석목이 말했다.
“이제 두 사람의 것만 모으면 되겠군요. 목표는 어디에 있죠?”
여의가 말했다.
“따라와요.”
석목이 일행을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는 줄곧 자신과 후새뢰의 목표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다.
잠시 후, 석목이 발걸음을 멈추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수십 장 앞에 여덟 사람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들 중 대표로 보이는 자는 덩치가 커다란 사내였는데, 그는 붉은 옷을 입고 붉은 군도를 들고 있었다.
사내가 쓰고 있는 모자를 본 후새뢰가 눈을 빛냈다. 그 모자에는 후새뢰의 목표 숫자인 ‘2067’이 적혀 있었다.
시선을 느낀 상대 일행이 석목 일행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가죠!”
석목이 노란색 부적을 꺼내 사용하며 외쳤다.
허공에 노란빛이 모여 들더니 곧 몇 장 크기의 빛의 그물이 여러 개 생겨나 날아갔다.
붉은 옷을 입은 사내가 민첩하게 몸을 움직여 노란 그물을 피했다.
하지만 실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그의 동료들은 그처럼 재빠르게 반응하지 못했고, 노란 빛의 그물에 깔려 속박됐다.
그물에 깔린 이들은 마치 늪 속에 빠진 사람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토뇌부(土牢符)!”
붉은 옷을 입은 사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토뇌부는 상대를 순식간에 속박시키는 매우 강력한 부적이었다. 중급부적 중에서도 매우 희귀해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데, 눈앞에 있는 사람이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양을 사용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내가 몸을 움직이려 하는 순간 그의 앞에 연기가 솟구쳐 오르더니, 키가 일 장 가까이 되는 거대한 해골이 나타났다. 그 해골은 자기 키의 절반만한 크기의 검은 도를 손에 들고 있었다. 파란 영혼의 화염을 가진 그 해골은 선천의 실력을 가진 사령생물이었다.
후새뢰가 주문을 외우며 한 손으로 사내를 가리켰다. 그러자 거대한 해골이 검은 도를 휘두르며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여의가 주문을 외워 사내를 향해 푸른빛의 바람의 칼날을 날렸다.
사내가 화난 표정으로 붉은 장도를 뽑아들었다. 그러자 도에서 눈부신 붉은빛과 함께 섬뜩한 도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어 사내가 바닥을 세차게 밟은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휙! 휙! 휙!
그러자 여의가 날린 바람의 칼날이 전부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 순간, 귀신처럼 선천해골의 앞에 나타난 남자가 장도를 거세게 휘둘렀다.
장도는 반원으로 붉은 궤적을 그리며 해골의 왼쪽 어깨로 파고 들어가서 오른쪽 아래로 나왔다.
뼈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대각선으로 두 동강이 난 선천 해골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본 후새뢰가 깜짝 놀랐다.
“내 모자를 뺏으려면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남자는 섬뜩하게 눈을 반짝이며 후새뢰를 향해 붉은빛이 터져 나오는 도를 내려베었다. 규칙 따위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사나운 공격이었다.
놀란 후새뢰가 뒤로 후퇴하며 뼈 방패를 소환했다.
뚝!
그러나 붉은 도는 뼈 방패를 두 동강낸 뒤 멈추기는커녕 더욱 강한 기세로 후새뢰의 몸에 바짝 다가갔다.
바로 그때, 어느새 후새뢰의 옆에 나타난 석목이 후새뢰의 몸을 잡아 뒤로 던지는 동시에 운철흑도를 위로 올려 베었다.
깡!
사내는 비틀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 밀려났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석목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후새뢰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하지만 석목은 그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운철흑도만 넋 놓고 바라보았다.
곧 다시 고개를 든 석목이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끼어들지 마십시오!”
석목이 사내에게 달려들며 운철흑도를 휘둘렀다.
나머지 일행은 석목의 말을 듣고 토뇌술에 붙잡힌 이들을 둘러쌌다. 그리고 그들이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사내는 선천진기를 주입해 붉게 빛나는 도를 휘둘러 석목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쾅!
붉은 도와 검은 도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석목이 다시 운철흑도를 보았다. 칼날이 충돌하는 순간 도의 표면이 반짝이더니 검은 빛이 살짝 뿜어져 나왔다.
남자의 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이 운철흑도의 검은 빛과 닿는 순간 대폭 어두워졌다. 이어 거대한 힘에 뒤로 밀쳐진 사내는 손이 떨려서 도를 떨어뜨릴 뻔했다.
석목은 공격을 하지 않고 운철흑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검은 빛이 다시 사라지며 도의 무게가 살짝 늘어났다.
석목은 미칠 듯이 기뻐했다. 아무래도 운철에는 상대의 공격에 담긴 진기를 삼키는 기능이 있는 것 같았다.
사내가 흉흉한 눈빛으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네가 죽음을 자초한 것이니 나를 탓하지 말거라!”
사내의 몸이 갑자기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어 피부가 검푸른 색으로 변하고 전신에서 두꺼운 검은 털이 자라났다.
순식간에 검은 강시로 변한 사내가 진기가 가득 담긴 붉은 도를 엄청난 기세로 휘둘렀다.
“조심하세요!”
주위에 있던 일행이 놀라서 석목에게 소리쳤다.
시합이 진행되면서 그들은 석목이 무공과 술법을 동시에 익혔으며, 선천무인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상대가 강시공을 시전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시공은 수련하는 과정에서 자아를 잃을 위험이 있지만, 일단 선천의 경지까지 오르는데 성공하면 피부가 강철처럼 견고해졌다. 거기에 진기까지 사용해 몸을 보호할 경우 평범한 법기로는 상처조차 낼 수 없었다. 힘도 대폭 증가해서 동일한 경지의 다른 선천무인보다 훨씬 강해졌다.
일행 중에서는 석목의 실력을 잘 알고 있는 후새뢰만이 유일하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석목이 웃으며 강시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운철의 비밀을 일부 알아낸 석목은 이 기회에 그 기능을 완벽히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