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의심이 일다
깡! 깡! 깡! 깡!
두 사람의 무기가 부딪치며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석목은 흑도를 시원시원하게 휘두르며 풍치도법을 시전했다. 이전처럼 묵직한 도영은 생겨나지 않았지만, 때로는 날카롭고 매서우며 때로는 부드러운 도법이었다. 그 강인하고 변화무쌍한 도법에서는 무언가 순수함마저 느껴졌다.
일행은 사내의 맹렬한 공격을 가볍게 받아내는 석목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석목은 상대와 공격을 주고받으며 운철흑도가 진기를 삼키는 법칙을 점차 깨달았다.
운철흑도는 진기와 직접 접촉을 한 순간에만 상대의 무기 혹은 공격에 담긴 진기를 삼킬 수 있었다. 흡수하는 양은 많지 않았지만 반복되어 누적되면 그 효과는 얕볼 수 없었다.
고수들의 싸움에서는 아주 미미한 차이가 전투의 결과를 좌우하는 법이었다.
사내는 맹공을 퍼부었지만 자신의 진기가 빠르게 소모되는 것에 비해 공격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반면 원하는 답을 얻은 석목은 더 이상 싸움을 계속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진기를 끌어올리자 운철흑도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석목은 열세 번의 검격이 하나로 합쳐진 풍치도법을 세 번 시전했다. 그러자 일 장 가까운 크기의 검은 도영 세 개가 상대를 향해 엄청난 기세로 날아갔다.
깡! 깡! 깡!
석목의 공격을 막아낸 사내가 몸을 떨며 한참 뒤로 밀려났고, 강시로 변한 상태였는데도 팔이 저려왔다.
그나마 이조차도 석목이 시합의 규칙을 고려해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었다.
석목은 연이은 세 번의 공격을 퍼부은 후, 뒤로 물러나는 사내에게 그림자처럼 다가갔다. 그리고 운철흑도로 사내의 붉은 도를 내려쳤다.
팔에 힘이 다 빠진 사내는 석목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무기를 놓쳤다.
쿵!
석목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주먹으로 사내의 가슴을 쳐서 멀리 날려버렸다. 사내는 멀리 날아갔지만, 석목이 힘을 절묘하게 조절했기 때문에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사내의 몸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하얀빛의 사슬이 날아가 그의 몸을 묶었다.
퍽!
바닥에 떨어진 사내의 몸에서 검은 털이 사라졌다. 부풀었던 몸과 파랗게 변했던 피부도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후새뢰가 다가가 사내의 모자를 낚아챈 뒤 빠르게 물러났다.
사내는 분개했지만 체내의 진기를 대부분 소모했기 때문에 기환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만 출발하죠.”
석목이 후새뢰의 손에 들린 모자를 확인한 후, 도를 거두고 손을 흔들어 기환장을 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석목을 바라보던 사내는 어쩔 수 없이 연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사내의 일행도 황급히 달아났다. 그들은 토뇌술에서 벗어났지만 석목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봤기 때문에 감히 덤빌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편 후새뢰가 모자를 뺏었을 즈음 시합은 매우 과열되어 있었다. 인내심과 이성을 잃은 사람들은 점점 포악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몸을 사려야 하는 기괴한 규칙을 모두가 납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상자와 사망자가 생기며 점점 많은 사람이 시합 자격을 잃었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공을 들이지 않고 시합을 통과했다.
시합이 시작된지 한 시진 정도 지나자 연무대 위에는 삼천 명도 채 남지 않았다.
“이제 제 모자만 남았군요.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석목이 일행의 손에 들려 있는 모자를 보며 말했다. 곧이어 그는 인파 사이를 물고기처럼 헤집고 들어갔다.
일행이 상황을 인지한 뒤에는 석목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석목은 전신에서 은은한 푸른빛을 뿜으며 나는 듯 빠르게 이동해 네 사람의 앞을 막았다.
석목은 거리낌 없는 시선으로 그중 한 마른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가 쓰고 있는 모자에 적힌 숫자는 ‘430’이었다.
석목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청년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푸른색 옥여의를 들어올렸다.
“귀하의 목표가 우리 넷 중 하나의 모자라면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네 사람 중 대표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앞으로 반 보 걸어 나오며 외쳤다. 남자는 손에 일 척 길이의 녹색 자를 들고 있었다.
남자가 말하는 사이 세 사람이 각자의 무기를 석목에게 겨누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모두 성계술사였다. 이들이 힘을 합쳤을 때 상대할 수 있는 적수는 이 연무대 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은 시합 통과까지 마지막으로 모자 하나만 남겨두고 있었다.
네 사람에게 석목의 행동은 분수를 모르는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석목의 모자를 빠르게 떨어뜨려 탈락시키려 했다.
갑자기 석목의 발아래에서 성인남자의 팔뚝만한 두께의 녹색 넝쿨들이 솟아나 두 다리를 묶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얼음송곳과 바람의 칼날, 화염구가 석목의 모자를 노리고 사방에서 날아왔다.
하지만 석목의 모습은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곧 사라졌다. 넝쿨이 붙잡은 것은 어느새 없어진 석목의 잔상일 뿐이었다.
그 순간, 석목이 네 사람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의 운철흑도가 반짝이는 듯하더니 네 개의 도광이 되어 각각 네 사람을 향해 날아갔다.
깜짝 놀란 네 사람은 급하게 몸을 돌리며 술법을 시전해서 몸을 방어했다.
쾅! 쾅! 쾅! 쾅!
네 사람은 석목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몇 장 밖으로 물러난 석목의 손에는 어느새 모자가 들려 있었다.
멍청한 표정으로 머리 위를 만지작거리던 마른 청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 사람을 동시에 공격하고, 상대가 방어를 하는 틈에 모자를 뺏을 여유까지 있다니…. 석목의 실력은 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자 감사합니다!”
석목이 순식간에 네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세 사람은 동정하는 눈빛으로 모자를 빼앗긴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강한 상대의 목표가 된 것은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간, 여의를 포함한 네 사람은 연무대의 한쪽 구석에 서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석목이 다가오며 말했다
“이…이제 겨우 일 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모자를 빼앗아 오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여의가 석목의 손에 들린 모자를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나이가 어린데도 실력이 이렇게 뛰어나다니, 엄청납니다.”
“덕분에 시합을 쉽게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나 씨 성의 청년과 혁 씨 성의 여인도 덧붙였다.
후새뢰는 속으로 자신이 줄을 참 잘 섰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과찬입니다. 모두 모자를 얻었으니 어서 연무대 아래로 내려가죠.”
석목이 말했다.
연무대 아래로 내려간 일행은 명월교 집사의 안내를 받아 어느 건물 앞에 도착했다.
“두 번째 시합을 통과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한 중년의 남자가 마중 나와서 다섯 사람을 안으로 데려갔다.
잠시 후, 석목 일행은 건물 내부의 어느 공간에 있었다. 그곳에는 두 번째 시합의 승리자로 보이는 명월교의 제자가 이미 백여 명 와 있었다.
“잠시 후 세 번째 시합이 열리는 곳으로 안내할 것이니,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놀란 여의가 물었다.
“세 번째 시합이 바로 시작되나요?”
“맞습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잠시 후 다른 사람이 와서 설명해줄 겁니다.”
중년의 남자는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럼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죠.”
석목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사람이 겨우 백여 명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시합을 통과한 사람들은 여러 곳에 나뉘어 대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행은 실내에 마련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반각 후 건물 안에는 이백 명 가까운 사람이 모였다.
끼익!
바로 그때, 옆에 있는 문이 열리며 회색 옷을 입은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장내의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고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십 대로 보이는 그녀는 외모가 상당히 수려했지만, 매우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석목은 그녀의 기운을 감지하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지계의 존재였으며, 명월교의 장로 혹은 전주인 것 같았다.
“모두 따라오도록 해라.”
여인은 실내의 한쪽 벽으로 다가가더니 벽을 두드렸다.
쿠구궁!
벽이 갈라지며 높이가 일 장 가까이 되는 반달 모양의 입구가 생겨났다. 그 안쪽은 매우 어두워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모두 들어와라. 세 번째 시합이 진행되는 장소로 안내하겠다.”
여인이 그렇게 말하고 앞장서 걸어 들어갔다.
실내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를 따라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번 선발전은 굉장히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 것 같군요. 세 번째 시합은 대체 무엇일까요?”
여의가 말했다.
“기다려보면 알 수 있겠죠.”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석목은 이 선발전을 주최하는 측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석목은 바로 뒤따라 들어가지 않고 건물의 입구 쪽을 한 번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입구에서 날아온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 앉았다.
여의가 놀란 표정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가죠.”
석목은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선발전의 두 번째 시합이 진행되는 도중, 서하고국은 이제껏 없었던 엄청난 참사를 겪고 있었다.
동주대륙에서 가장 큰 두 세력이 서하고국 내 명월교의 거점과 지부를 석권지세(席卷之勢)로 휩쓴 것이다.
만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명월교는 서하고국의 국교였으며, 국내에 엄청난 수의 신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저항할 힘이 없는 이 신도들조차 명월교의 교도와 함께 무참히 살육을 당했다.
두 세력은 이단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상대가 무력을 지녔는지의 여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특히 천우성 습격을 핑계로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더한 이들은 무차별 적인 살육에 조금의 거리낌도 느끼지 않았다.
한순간 서하고국의 도처에 난민이 넘쳐나게 되었으며, 피가 강이 되어 흐를 정도로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다.
현재 두 세력은 그들의 최종 목적지, 즉 명월교 총단이 자리 잡고 있는 음시산맥의 반고봉(盘古峰)에 도달해 있었다.
구름 위로 솟은 반고봉의 정상은 거대한 회색빛의 장막에 뒤덮여 있었다.
반투명한 회색빛의 장막 너머로는 전투를 대비하고 있는 명월교의 제자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만 명 가까운 제자 중 상당수는 방금 두 번째 시합에서 패배한 이들이었다. 전송진법으로 총단에 들어온 이들은 반고봉 주위를 빼곡히 포위한 적들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반고봉을 포위한 사람들 중 북쪽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으며, 남쪽에는 파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양쪽의 인원은 각각 오륙천 명 정도로 비슷했다.
게다가 검은 옷과 파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아직도 계속 모여들고 있는 중이었다.
일 각 후, 사람들이 전부 모이자 양측의 인원은 각각 만여 명에 달했다.
산봉우리의 정상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마치 극명하게 구분된 검은색과 파란색 반원이 회색빛의 장막을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고봉의 남쪽에 가득한 통천선교 제자들의 상공에는 커다란 조롱박이 있었다. 그 위에는 어깨에 불자를 아무렇게나 걸쳐둔 백발의 정정한 노인이 두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는 바로 통천선교의 교주 무진도인이었다.
무진도인의 뒤에는 여섯 명의 도인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