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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217화 (217/916)

217화. 거대 문어

과거 서하고국에서 가장 번화했던 수도인 곡양성은 현재 한바탕 전쟁을 치른 뒤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시체는 깨끗하게 치워졌으나 도처의 무너진 건물들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특히 명월교가 자리를 잡고 있던 서쪽 구역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동쪽 구역 서광가에 위치한 한 건물만은 홀로 전쟁을 피해간 것처럼 온전했다. 그곳은 바로 천오무기상점이였다.

그때, 천으로 얼굴을 가린 소녀가 천오무기상점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목격한 모든 광경이 그녀의 마음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강한 바람에 의해 얼굴을 가린 천이 들춰지며 그녀의 깨끗한 피부와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바로 종수였다.

서신 한 장을 손에 쥔 채 상점 앞을 한참 서성이던 종수는 결국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석 달이 지난 후, 이른 아침.

뜨거운 태양이 높이 걸려 있었으며, 바다에는 바람이 없고 파도도 잔잔했다. 서해에서는 보기 드문 좋은 날씨였다.

십 여 척의 한해거주는 서해를 가르며 일렬로 항해하고 있었다.

한해거주는 영기급의 선박이었지만, 세 달이라는 긴 시간을 쉬지 않고 항해하며 곳곳이 손상돼 있었다. 또 열여덟 척이었던 배는 이제 열일곱 척밖에 남지 않았다.

침몰한 배는 이전에 곽청과 함께 돌아온 두 척의 한해거주 중 하나였다. 당시 손상이 비교적 심했던 그 한해거주는 거센 파도와 해수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결국 침몰했다.

채아가 넓은 범위를 탐지해 해수가 있는 곳을 찾아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길을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석목은 제일 앞서 있는 1호 한해거주에 타고 있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흡일식의 자세를 취하는 중이었다.

가끔 명월교의 제자들이 한두 명씩 주위를 지나갔지만, 경외하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기만 할 뿐 누구도 감히 방해하지 못했다.

해수의 매복을 간파해낸 덕에 석목은 한해거주에서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는 날씨가 허락하는 날이면 항상 꿈속에서 탄월식과 흡일식을 수련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석목이 그저 어떤 심법을 수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석목이 두 눈을 떴다.

망망대해 위에는 높은 산이 없어 흡일식의 효과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머릿속에 있는 금색 결정은 이미 손톱 만하게 커졌고, 은색 결정도 용안 만하게 커져 있었다.

석목은 이런 성과에 비교적 만족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푼 뒤 선수로 걸어가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전방에는 한없이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끝이 없는 바다와 비교하면 열 몇 척의 한해거주는 가련할 정도로 보잘 것 없었다.

바다를 보던 석목은 문득 고향을 떠올렸다. 동해도 이곳과 비슷한 풍경이었는데, 지금 그곳의 상황은 어떤지 궁금했다.

그 순간, 채아가 날아와서 석목의 어깨에 앉았다.

“왜 벌써 돌아온 거야?”

석목이 물었다.

“최근에는 해수의 수가 확연히 줄어서 안전해.”

채아가 말했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석목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해수의 수가 줄었다니, 서하대륙 도착이 머지않은 건가?’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 형, 일어났습니까?”

고개를 돌린 채아가 유안을 발견하고 다급히 돛대 위로 날아갔다.

“유 형.”

석목이 유안에게 인사했다.

“하하, 아무래도 채아는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군요.”

석목의 옆에 선 유안이 채아를 보며 말했다.

“채아에게 전방의 해역을 다시 탐색하라고 지시한 것이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채아가 정말 고생이 많군요. 덕분에 항해가 순조로워요.”

유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가슴에서 나온 진심이었다. 채아의 능력은 그들이 준비해온 어떤 해저 탐측 법기보다도 훨씬 뛰어났다.

“별 말씀을요. 참, 채아에게 듣기로는 최근 며칠 사이에 해수의 수가 확연히 줄었다고 하더군요. 혹시 서하대륙에 도착할 때가 다 된 겁니까?”

석목이 물었다.

“그럴 겁니다. 본교에서 소지하고 있는 기록에 적힌 대로라면, 지금 우리가 위치한 곳은 서하대륙 근해에 근접한 곳입니다.

유안이 말했다.

“드디어 도착하겠군요.”

그 말을 들은 석목이 눈을 빛냈다.

“석 형은 서하대륙에 도착하면 무엇을 할 계획입니까?”

유안이 물었다.

“아직은 계획이 없습니다. 무엇을 할지는 도착해서 생각해볼 계획이에요.”

석목은 유안과 대화를 몇 마디 더 나눈 뒤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아 방으로 돌아갔다.

유안의 말이 맞았다. 사흘 후 전방의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곳에 검은색 선이 나타났다.

한해거주에 타고 있는 명월교의 제자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바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것은 바로 해안선이었다.

석목도 흥분한 눈빛으로 해안선을 바라보았다. 감추어져 있던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유안이 소리쳤다.

“접안 전까지는 절대 경솔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자 제자들의 환호성 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들은 이미 유안을 일행의 대표로 여기고 있었다.

그때, 명월교의 한 제자가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건 뭐지?”

주위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의 수면 위에는 검은색 물체가 불쑥 솟아 있었다.

“섬인가?”

누군가 말했다.

그것은 섬처럼 거대했으나 나무는 한그루도 자라 있지 않았다.

“이런! 섬이 아니라 해수다!”

석목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말에 유안을 포함한 주위의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 순간, 검은색 물체가 갑자기 진동하더니 주위 수백 장의 수면이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거친 물살에 영향을 받은 한해거주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우현으로 전타! 빨리!”

유안이 급박하게 외쳤다.

한해거주들은 힘겹게 균형을 잡는 동시에 우현으로 방향을 꺾었다.

쾅!

그때 엄청난 두께의 촉수가 갑작스레 수면을 뚫고 솟아나와 2호 한해거주를 덮쳐왔다.

하늘을 덮은 거대한 촉수를 본 명월교 제자들은 질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일부 담력이 있는 제자들은 검기와 술법을 날려 거대한 촉수를 막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촉수에 작은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힘없이 사라졌다.

거대한 촉수가 한해거주에 닿으려는 순간, 배의 표면이 하얗게 빛나더니 주위에 빛의 장막이 형성됐다. 장막은 촉수의 공격을 아주 일순간 버텨냈지만 곧바로 파괴되었다.

우지직!

견고한 한해거주가 마치 계란이 깨지듯 손쉽게 파괴됐다.

그곳에 타고 있던 명월교 제자들은 비명조차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전부 죽음을 맞았다.

쾅!

한해거주를 조각낸 촉수가 그대로 수면까지 내려치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산봉우리처럼 거대한 해일이 일었다.

가까이 있던 3호 한해거주가 거대한 해일에 휩쓸려 날아갈 듯 세차게 밀려났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일순간 허공에 떠올랐다가 강하게 아래로 내팽겨졌다. 그중 몇몇 재수가 없는 사람은 날아가서 바다에 빠졌다.

석목은 1호 한해거주의 현측 난간을 꽉 움켜쥐고 자석처럼 붙어 있었다.

“저건 무슨 괴물이지?”

석목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의 여정 동안 수많은 거대 해수를 봐왔지만, 눈앞의 저 해수처럼 거대한 것은 여태 보지 못했다.

쾅!

그 순간, 수면 위로 솟아나온 또 다른 촉수가 석목이 있는 1호 한해거주를 덮쳐왔다.

그때, 선수에 있던 유안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두꺼운 촉수를 향해 거대한 핏빛 명주를 날렸다.

푹!

명주에 베여 거대한 상처를 입은 촉수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유안도 비틀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고통 가득한 포효소리가 수면 아래에서 들려오더니 부상을 입은 촉수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쾅!

곧이어 수면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검은 해수의 본체가 수면 위로 천천히 떠올랐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그것은 문어의 모습을 한 해수였다.

문어의 몸집은 마치 커다란 산봉우리만큼 컸다. 촉수는 총 여덟 개가 있었으며, 그것들이 움직일 때마다 수면에 수많은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문어가 뿜어내는 거대한 기운은 마치 거대한 산이 짓누르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할 만큼 압력이 엄청났다.

깜짝 놀란 석목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사이 명월교의 여섯 전주가 유안의 곁에 모여들었다.

문어는 일곱 사람이 뿜어내는 강력한 기운을 느끼기라도 한 듯, 휘두르려던 촉수를 멈추고 포효했다.

유안을 포함한 일곱 전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수적으로는 그들이 우위에 있었지만, 눈앞의 해수는 모두 힘을 합친다 해도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리가 해수를 붙잡아둘 테니 너희는 먼저 떠나라!”

유안이 소리치며 거대한 문어를 향해 천귀번을 휘둘렀다.

다른 여섯 명의 전주도 각자의 영기를 꺼내거나 사령생물을 소환해 문어에게 달려들었다.

열여섯 척의 한해거주는 전방의 해안선을 향해 곧장 직진하기 시작했다. 1호 한해거주에 타고 있던 한 제자가 푸른색 부적을 꺼내 허공에 높이 던졌다.

후욱!

푸른색 부적이 찢어지며 허공에 강한 바람이 일자 한해거주의 돛이 팽팽해졌다. 속도가 두 배 가까이 빨라진 한해거주는 해안선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해거주들 역시 똑같은 방법을 사용해 빠르게 달아났다.

살짝 안도한 석목은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일곱 전주가 문어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문어의 두꺼운 촉수 여덟 개가 일으키는 풍압은 강력했다. 지계 혹은 월계의 경지에 오른 전주들조차 몸이 흔들릴 정도였다.

유안과 곽청을 제외한 나머지 전주들은 문어와 정면으로 맞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은 몸이 작다는 이점을 활용해 문어의 공격을 전력으로 피해 다녔고, 어쩌다 한 번씩 공격을 날려 문어를 견제하는 정도였다.

유안은 무진과의 전투 중 손실됐던 영성을 이미 상당히 회복한 뒤였다. 그의 천귀번은 핏빛 명주로 변해 문어의 촉수와 격돌하기를 반복했다. 문어의 촉수에 상처가 늘어나고 피가 솟았다.

그 상처들은 겉보기에는 상당히 컸지만 문어에게는 전혀 치명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화를 돋우기에는 충분했는지, 문어는 괴성을 지르며 촉수를 더욱 세차게 휘둘렀다.

하지만 월계 혹은 지계의 존재인 일곱 전주가 손쉽게 공격에 맞아줄 리가 없었고, 문어의 공격은 단 하나도 명중하지 못했다.

그 순간, 문어가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무언가 하려는 것 같으니 다들 조심하게!”

유안이 소리쳤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문어가 입을 벌리더니 칠흑같이 검은 액체를 뿜어냈다.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액체는 날아가던 도중 안개처럼 주위로 퍼졌고, 순식간에 수십 장 범위를 덮었다.

광범위한 공격을 피해내지 못한 일곱 전주는 다급히 빛의 장막을 형성해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부식성이 강한 검은 액체에 닿자 장막은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릿해졌다.

그때 문어가 다시 괴성을 지르며 그들을 향해 촉수를 휘둘렀다.

일곱 전주는 다급히 몸을 피했으나, 동작이 가장 느린 검은 피부의 전주가 촉수에 맞았다.

문어는 입에서 피를 뿜으며 날아가는 그를 놓치지 않고 촉수로 휘감았다.

“육 전주!”

유안이 소리쳤다.

중상을 입은 육전주는 질겁하여 발악했으나,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촉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문어는 입을 쩍 벌리고 육 전주를 한 입에 삼켰다. 문어의 몸속에서 들려오는 육 전주의 비명소리가 점차 작아지다가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나머지 여섯 전주는 분노했지만, 문어를 상대로는 복수를 할 실력도 용기도 없었다.

문어는 사람을 먹고 나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촉수를 흔들었다.

그 순간, 문어는 여섯 전주 너머로 멀리 달아나고 있는 한해거주들을 발견했다. 전주들이 한참 싸우는 사이에 배들은 이미 상당히 멀어진 뒤였다.

분노한 문어는 거대한 촉수를 휘저으며 한해거주를 향해 헤엄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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