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219화 (219/916)

219화. 혈전

물속에서는 싸움이 점차 격렬해지는지 우레와 같은 굉음과 포효가 들렸고, 수면은 더 강하게 요동쳤다.

채아는 초조한 표정으로 여전히 허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쾅!

그 순간, 폭음과 함께 문어와 원숭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둘 모두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촉수를 절반이나 잃은 문어는 이곳저곳에 생긴 깊은 상처들에서 흘러나온 피로 몸을 절반 가까이 적시고 있었다.

원숭이 역시 멀쩡하지 못했다. 전신 곳곳이 썩어 문드러졌고, 커다란 상처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분노한 문어는 남아 있는 촉수를 휘두르며 다시 원숭이에게 달려들었다.

원숭이는 살짝 힘에 부치는 듯 숨을 크게 헐떡이며 문어의 공격을 피하기 시작했다.

문어는 원숭이가 피할 걸 알기라도 한 듯 흥분 가득한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자 문어의 전신에 파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웅웅!

문어가 촉수를 율동하듯 흔들자 주위의 수면에 파란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파란빛은 곧 원숭이 주위의 수면까지 퍼졌고, 그 순간 원숭이의 움직임이 굳었다. 주위의 해수가 파란 진흙처럼 변해서 원숭이의 움직임을 강력하게 봉쇄한 것이다.

원숭이는 굼뜬 움직임으로 몇 차례 문어의 공격을 피했으나, 결국 두 촉수에 몸을 구속당했다.

문어가 포효하며 전력으로 원숭이를 짓눌렀다.

원숭이도 발버둥을 쳐봤으나, 이미 너무 큰 상처를 입고 있는 탓에 벗어날 수가 없었다.

푸욱!

문어가 원숭이에게 검은 액체를 뿜어냈다.

원숭이는 검은 액체를 온 몸에 뒤집어쓰고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곧 원숭이의 몸이 은빛으로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오 장도 안 되는 크기로 작아졌다.

은빛은 멈추지 않고 점점 밝아지더니 원숭이의 몸을 은색 고치처럼 덮었다. 고치 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원숭이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어는 원숭이의 움직임이 멎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기뻐하며 은색 고치를 한 입에 삼켜버렸다.

원숭이를 잡아먹은 문어는 즉시 몸을 돌렸고, 이미 상당히 멀리 달아난 한해거주의 행렬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문어의 배 부분이 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몸속에서 강하게 빛나는 은빛이 몸을 뚫고 피부까지 밝힌 것이었다.

그 순간, 문어가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은빛은 문어의 몸을 뚫고 밖으로 나오려는 듯 점점 더 밝아졌다.

문어는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지만, 고통의 원인이 자신의 몸속에 있는지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촤악!

은빛이 점차 밝아지더니 결국 문어의 배가 갈라졌다. 은빛은 문어의 배를 뚫고 나온 뒤로도 멈추지 않고 서남쪽 방향으로 거침없이 날아갔다.

은빛 속에서 겨우 이 장 크기밖에 되지 않은 원숭이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배를 꿰뚫린 문어는 천지를 뒤흔들 것 같은 커다란 소리로 울부짖었다.

문어의 배에 생긴 커다란 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가 주위의 해수를 빨갛게 물들였다. 몸 안의 내장이 다 드러날 정도로 심각한 상처였다.

명월교 교도들이 타고 있는 한해거주는 그 사이에 멀찌감치 달아나서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결국 문어는 추격을 포기했는지 바다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채아는 은빛이 날아간 방향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 * *

푸른 물결이 드넓게 펼쳐진 바다 위.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 위로 신선한 바람이 서서히 지나갔다. 물결이 살짝 일며 햇빛에 반짝였다.

바로 그때, 멀리서 한 물체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그 물체는 수면을 가르고 거센 파도를 일으켰다.

그것은 전신이 반투명한 은빛에 뒤덮였으며, 몸 크기는 사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하얀 원숭이였다.

원숭이의 몸에는 많은 상처가 있었으며, 그곳에서 흘러나온 피가 전신의 하얀 털을 물들이고 있었다.

원숭이는 상처를 전혀 돌보지 않고 오직 앞을 향해 날았다. 간혹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금색 눈은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바로 그때, 뒤에서 나타난 금빛 물체가 질풍 같은 속도로 원숭이를 쫓아갔다. 그것의 속도는 원숭이보다 훨씬 빨라서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금빛 물체 위에는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센, 콧수염과 턱수염을 가슴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기른 도사가 타고 있었다. 눈처럼 하얀 불자를 들고 있는 그 도사에게서는 무언가 비범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도사가 타고 있는 것은 몸길이가 이백여 장에 달하는 금색 교룡이었다.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교룡은 긴 몸에 도인을 태우고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도사는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전방의 원숭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교룡 역시 증오가 가득한 눈빛으로 원숭이를 보았다.

그때, 갑자기 교룡의 가운데 머리가 입을 크게 벌렸다. 교룡의 입에서 금빛 광선이 뻗어나가 원숭이를 향해 날아갔다.

공격이 가해진 것을 감지한 원숭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급강하를 했고, 광선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이번에는 도사가 코웃음을 치며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오색찬란한 빛이 원숭이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날아갔다.

그 빛은 계란 크기 정도의 흰색 구슬을 하나로 엮어 만든 구슬꿰미가 뿜어내는 것이었다.

원숭이는 그 구슬을 몹시 두려워하는 듯한 기색이었고, 몸을 피하려 했으나 결국 어깨에 맞고 말았다.

우드득!

원숭이의 어깨에 안쪽의 뼈까지 드러날 정도의 큰 상처가 생겼다.

피를 뿜어내며 혼절한 원숭이는 아래로 추락해 물 속 깊숙이 가라앉았다.

도사가 차가운 눈빛으로 또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구슬꿰미는 원숭이의 머리를 노리고 바다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바로 그때, 원숭이의 머리가 금빛으로 반짝이더니 그 위로 금색의 서적이 떠올랐다.

촤라락!

금색 서적은 자동으로 펼쳐져 책장이 넘어가더니 갑자기 멈췄다. 그 장에는 부적처럼 보이는 아주 복잡한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그 도안은 갑자기 빛을 뿜어내더니 원숭이의 몸을 금빛으로 뒤덮었고, 빛이 반짝이며 원숭이와 금색 서적이 동시에 자취를 감췄다.

서적을 보고 놀란 도사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의 해역에는 원숭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한참이나 서 있었다. 그리고 손을 휘둘러 구슬꿰미를 회수한 뒤 교룡의 몸을 두드렸다.

금색 교룡은 불만이 담긴 울음소리를 냈지만, 결국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끝없는 어둠 속.

시간의 흐름마저 불명확하게 느껴지는 그곳에서는 매 순간이 마치 수만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석목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 눈을 번쩍 떴다.

그는 곧바로 움직이려 했지만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전신 곳곳에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순간 목구멍에서 단맛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피가 울컥 올라오려 했다.

석목은 곧바로 움직임을 멈추고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눈 닿는 곳에는 오직 칠흑 같은 어둠밖에 없었다. 몸에서 느껴지는 감촉으로 미루어보아 그곳은 깊은 바다 속인 것 같았다.

“해저?”

석목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곧 그의 두 눈에 금빛이 감돌더니 눈앞의 모든 광경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해저에 누워 있었으며, 주위에는 다양한 모양의 산호들이 널려 있었다. 어떤 것은 부채같이 생겼으며 어떤 것은 맷돌같이 평평했다. 알록달록한 산호들 사이로 아름다운 빛깔을 가진 작은 물고기들이 가끔 한가롭게 드나들었다.

그 순간, 석목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바로 그때, 전방에서 어떤 물체가 석목이 있는 곳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헤엄쳐왔다. 그것은 회색의 해수였다.

외형이 상어와 흡사한 그 해수는 몸길이가 오 장 가까이 됐으며, 머리는 송곳처럼 뾰족했다. 입에는 검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잔뜩 자라 있어서 상당히 흉포해보였다.

그 해수는 비록 강하지는 않았지만, 석목은 지금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긴장으로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곧 해수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석목은 전력을 다해 체내의 진기와 법력을 끌어올려봤으나, 이미 체내의 기운이 전부 고갈된 상태였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해수는 석목의 머리 위를 지나 멀리 사라졌다. 마치 석목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석목은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몸은 투명한 빛의 장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슴 부근에서는 살짝 열이 나고 있었는데, 빛의 장막의 발원지는 바로 그 부위인 것 같았다.

석목은 잠시 운기조식을 통해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한 뒤, 힘겹게 손을 들어 품속에서 파란색 구슬을 꺼냈다. 그것은 해족의 성녀인 향주가 선물한 조개 진주였다.

아무래도 해수가 그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진주의 능력 덕분인 것 같았다.

석목은 진주의 능력을 깨닫고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진주를 다시 품속에 집어넣은 뒤 이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 노력했다. 한해거주에서 도망 나온 뒤 문어에게 잡혀 기절한 이후의 기억이 흐릿했다.

그는 하얀 원숭이로 변해 문어와 혈전을 벌이다가, 마지막에 다시 중상을 입고 기절한 것까지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기절한 뒤 꾼 꿈에서 하얀 원숭이는 도사에게 쫓기고 있었으며,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꿈은 또 뭐지?’

석목은 생각에 잠겼다.

‘노인이 타고 있던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교룡은 이전에 꿈에서 원숭이가 죽인 놈이었어. 혹시 두 꿈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설마….’

석목은 다양한 추측을 계속 이어갔다.

서하대륙의 능천봉에 도착하면, 어쩌면 하얀 원숭이에 대한 궁금증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당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구전현공을 포함해서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석목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석목은 고개를 저으며 잡념들을 떨쳐버렸다. 지금은 체력을 회복해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석목은 마음을 다잡고 산호에 기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회복 단약과 치료 단약을 복용한 뒤 눈을 감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석목이 다시 눈을 뜨자, 체내의 진기가 절반 가까이 회복돼 있었다. 전신의 상처도 상당히 많이 나은 상태였다.

석목이 손을 휘두르자 그의 발아래 푸른 옥 북이 나타났다. 옥 북은 그의 몸을 받치고 위로 떠올랐다.

촤악!

잠시 후, 석목을 태운 옥 북이 수면 위로 날아올랐다.

주위는 망망대해였지만 멀지 않은 곳에 서하대륙의 해안선이 보였다.

석목은 기뻐하며 그곳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뒤쪽에서 그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두, 기다려!”

석목이 멈추자 뒤에서 채아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석두, 드디어 깨어났구나! 무려 사흘만이야.”

석목의 어깨에 앉은 채아가 숨을 살짝 몰아쉬며 말했다.

“그 말은 줄곧 여기서 날 기다렸다는 거야?”

석목이 물었다.

“네가 바다 속에 있는 것이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밖에서 기다렸어.”

채아가 말했다.

자신이 기절한 뒤 홀로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렸다는 말에 석목은 조금 감동을 받았다.

“석두, 그날은 어떻게 고릴라로 변신한 거야? 야만족의 토템비술을 수련해서 가능했던 거야?”

채아가 물었다.

“토템비술 때문은 아니야. 이유는 나도 잘 알지 못하지만, 아주 오래 전에도 원숭이로 변신한 적이 한 번 있었어.”

석목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전에 원숭이로 변신했던 경험, 그리고 하얀 원숭이의 꿈에 대해 채아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채아는 평범한 앵무새처럼 보였지만 사실 석목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뿐만 아니라 국 사숙에게 소환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소환된 적도 있다고 했다. 이런 사실들은 석목도 최근에야 알게 된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