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223화 (223/916)

223화. 화원도왕(火元桃王)

거대한 숲 속에서 하늘 높이 자란 고목들은 마치 녹색 우산처럼 보였다.

숲에는 하얀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고, 이 안개는 자연의 기가 극한까지 농축된 것이었다. 주위에는 각종 귀한 영초와 영화(灵花)가 자라나 있었다.

고목과 운무, 갖가지 꽃이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에는 그것을 감상할 사람도, 영초와 영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바로 그때, 눈처럼 하얀 원숭이가 나타났다. 원숭이는 몸길이가 일 척 정도로 매우 어려 보였고, 고목에 올라 나무를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원숭이는 금색 눈으로 주위를 끊임없이 둘러보며 과일을 따먹었고, 계속 앞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숭이가 수풀에서 벗어나자 커다란 물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너비가 백 장 가까이 되는 거대한 폭포에서 나는 소리였다. 폭포수가 쏟아지며 물안개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마치 선계의 풍경 같이 아름다웠다.

연한 푸른색을 띠는 폭포수는 평범한 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액체 상태가 된 자연의 기였다.

원숭이는 폭포 아래의 물웅덩이에 뛰어들어 물을 배불리 들이킨 뒤, 물장구를 치며 놀기 시작했다.

곧 물속에 잠긴 원숭이의 몸에서 은은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흥분한 원숭이가 노는 사이, 한 줄기 빛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 그 빛 속에서 하얀 꽃들이 흩날리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순간 빛이 걷히며 궁의를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똑바로 바라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으며, 백옥 같이 하얀 피부와 길고 가느다란 목을 가지고 있었다.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몸 뒤로 늘어뜨린 그녀는 마치 선녀처럼 세속을 초월한 듯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여인은 조금 짜증이 난 듯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조차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인은 거대한 폭포와 주위의 경관을 감상하더니 기분이 조금 좋아진 듯, 찌푸렸던 눈썹을 조금 폈다.

물속의 원숭이는 절세의 미모에 놀란 듯 물가의 여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바람에 날린 폭포수가 원숭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순간 놀란 원숭이가 허둥대며 울음소리를 냈다.

소리를 들은 여인이 고개를 돌려 원숭이를 보았다.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원숭이는 무형의 힘에 의해 물 밖으로 끌어올려졌고, 여인의 앞까지 날아와서 멈췄다.

“우끼끼!”

원숭이는 놀라지도 않고 커다란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눈앞의 원숭이를 보며 귀엽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본래도 아름다운 그녀가 미소를 짓자 마치 눈이 녹고 꽃이 피는 것 같았다. 주위의 모든 것이 더욱 화사해 보였다.

여인은 아름다운 손으로 원숭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붉은 과일을 꺼내 원숭이에게 건넸다.

즉시 손을 뻗어 그것을 받은 원숭이는 과일을 한 입 베어 먹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남은 과일을 전부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과일을 먹고 트림을 하는 원숭이의 익살스러운 모습에 여인이 입을 가리고 피식 웃었다.

원숭이는 여운이 남은 듯 입맛을 쩝쩝 다시며 간절한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원숭이에게 붉은 과일을 하나를 더 건네준 뒤, 손을 흔들어 원숭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쉬며 물웅덩이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붉은 과일을 하나 더 받아먹자 원숭이의 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빛이 조금 더 밝아졌다. 원숭이는 여인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순간 발걸음을 멈춘 여인의 몸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끼잉….”

원숭이가 여인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여인이 원숭이를 보더니 웃으며 팔을 흔들었다.

무형의 힘에 의해 하늘로 떠올라 여인의 품에 안긴 원숭이가 아양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잠시 고민하던 여인은 원숭이에게 이름을 지어 불러주었다. 그러자 원숭이는 마치 보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덩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여인은 허공에서 내려온 하얀빛을 타고 다시 하늘 높이 떠올랐다.

* * *

순간 석목은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머리 뒤에는 성운이 떠올라 있었다. 성운에는 세 개의 별이 밝게 빛나고 있었으며, 네 번째 별도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날은 이미 밝아서 붉은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흡일식을 하기에는 정말 좋은 시간이었지만, 석목은 수련을 할 생각이 없는 듯 거대한 폭포만 멍청히 보고 있었다.

석목은 꿈속의 장면이 아직까지 눈앞에 생생했다.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갑작스럽게 나타났지만 그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여인은 그가 이제껏 만났던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웠다.

서문설, 종수, 금소채도 모두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꿈속의 여인과 비교하면 외모와 분위기 모두 부족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그 여인에게서는 어디선가 만나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익숙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봐도 어디서 봤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만약 정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면 기억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잠시 후 석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채아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아래쪽에서 날아오며 외쳤다.

“석두, 석두!”

“무슨 일인데 이렇게 안절부절못해?”

석목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쪽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어제 그 거목부족의 소주야.”

채아가 아래의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 혼자 명월교도 여럿을 상대하고 있어.”

채아가 덧붙였다.

“가보자”

잠시 망설이던 석목은 산봉우리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발아래에 푸른빛이 나타나 그의 몸을 싣고 날아갔다.

“석두, 기다려….”

채아가 소리를 지르며 그의 뒤를 바짝 쫓아왔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석목은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싸움은 이미 끝나 있었다. 기절한 거목부족의 소주 녹당의 어깨에는 거대한 상처가 나 있었으며, 몸의 절반 가까이가 피에 물들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있는 명월교의 두 제자는 모두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석목은 다급히 녹당에게 다가가 녹색 부적을 한 장 꺼내 상처 위에 부적을 붙이자 녹색 빛이 퍼져 나와 그녀의 몸을 감쌌다.

부적의 효과로 어깨에서 흐르던 피가 빠르게 멎었다. 석목은 그녀에게 상처를 치료하는 단약을 먹인 뒤, 진기를 주입해 흡수를 도왔다.

잠시 후, 정신을 되찾고 석목을 발견한 녹당의 얼굴에 놀람과 기쁨이 교차했다.

“감사합니다….”

녹당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상처가 깊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그때, 녹당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석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어깨의 상처가 다시 벌어져 피가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제가 기절한지 얼마나 됐죠?”

그녀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도 이곳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됐지만, 오래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진즉에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었을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고, 이곳에는 무엇 때문에 온 겁니까?”

석목이 물었다.

“아버지와 장로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명월교 일당이 마을을 습격해서 진목석(镇木石)을 훔쳐갔어요. 이 일을 어서 아버지에게 알려야 해요.”

녹당이 비틀거리며 걸으려 했다.

“이 상태로는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쓰러질 겁니다.”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순간 녹당이 중심을 잃고 기어코 바닥에 쓰러졌다.

빠르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한 석목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버지가 어디 있죠? 제가 데려다줄게요.”

“정말요? 정말 감사해요.”

녹당이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석목이 아무 말 없이 한 손을 흔들자, 두 사람 앞에 푸른 옥북이 나타났다.

“비행영기!”

녹당이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석목이 주문을 외우며 팔을 휘두르자 옥북이 길이 일 장, 너비 이 척으로 커졌다.

“올라가죠.”

석목이 녹당을 부축한 채 옥북에 올라탔다. 그러자 채아가 다급히 날아와 석목의 어깨에 앉았다. 전속력으로 날아가는 옥북의 비행속도는 너무 빨라서 채아가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옥북이 푸른빛으로 반짝이며 허공에 떠올랐다.

“북쪽으로 가야 해요.”

녹당이 말했다.

두 사람을 실은 탓에 옥북이 나는 속도가 평소보다 조금 느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빨랐다.

“북쪽으로 백오십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검은 산봉우리에 흑우족(黑羽族)이라는 다른 평만부족이 있어요. 아버지와 장로님들은 명월교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흑우족의 족장과 연합을 논의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제 우리를 습격한 것도 아버지를 마을 밖으로 유인해 진목석을 강탈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녹당이 원한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진목석이 무엇이죠?”

석목이 물었다.

그 질문을 들은 녹당이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말해주기 어려운 것이라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석목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미 여러 번 도움을 받았으니 숨기지 않겠습니다.”

녹당이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말했다.

“어제 우리가 만난 산골짜기는 거목부족의 성지인 도원산골(桃源山谷)입니다. 그곳에 있는 화원도과는 거목부족 부족원의 실력을 향상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죠. 외곽에 있는 것은 평범한 화원도수(火元桃树)이고, 산골짜기 깊은 곳에 화원수왕(火元树王)이 자라고 있어요.”

석목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운수왕에 맺히는 화원도과는 화원도왕이라 불리는데, 평범한 화원도과보다 효과가 훨씬 뛰어납니다. 화속성 심법이나 수속성 심법을 수련하는 이가 복용하면 경지를 돌파할 가능성이 높아지죠. 누가 훔쳐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토템 진법을 사용해 화원수왕을 보호하고 있지만, 진목석이 없다면 진법은 무용지물입니다.”

녹당이 말했다.

“그렇군요. 그런데 거목부족과 명월교는 동맹 관계가 아니었습니까?”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는 녹당의 설명을 듣고 화원도왕에 상당히 흥미가 있었다.

녹당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과거에는 요족(妖族)에 함께 대항하기 위해 연맹을 맺었지만, 명월교 놈들은 교활해서 전혀 신용할 수 없습니다.”

옥북을 타고 가며 석목은 서하대륙에 관해 궁금했던 것들을 빙빙 돌려가며 녹당에게 물어보았다. 녹당은 석목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듯,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전부 말해주었다.

비록 그녀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지만, 석목은 서하대륙의 상황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옥북의 빠른 속도 덕분에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석목은 흑우부족의 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착륙했다.

“열사부족의 부족원인 저는 함께 들어가지 못할 테니 이곳부터는 혼자 가요.”

석목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여러 번이나 은혜를 입은 몸이니 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찾아와서 말씀해주세요.”

녹당이 말했다.

“그럼 혹시 이곳의 지도를 가지고 있나요?”

석목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지도…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녹당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장반지에서 녹색 옥간을 꺼내 석목에게 건넸다.

석목은 옥간을 받아 든 뒤 정신력을 주입시켜보더니 곧 기쁜 표정을 지었다.

옥간에는 거목부족 주위 수천 리의 상황이 자세하게 그려진 지도가 담겨 있었다. 각 부족과 성의 위치, 그리고 위험지역 등이 표시된 지도였다.

“감사합니다. 바로 이것이 필요했어요. 그럼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봐요.”

옥간을 챙겨 넣은 석목이 녹당에게 인사한 뒤 즉시 몸을 돌려 떠났다.

녹당은 석목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명월교에 관한 일을 떠올리고 황급히 흑우부락을 향해 뛰어갔다.

녹당의 시야에서 벗어난 석목은 거목부족의 도원산골 방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그가 손을 휘두르자 발아래 푸른빛이 나타났다. 옥북은 그를 싣고 도원산골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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