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요족명록(妖族名录)
작은 산골짜기는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해 각종 술법과 검광이 난무했다.
토템 변신을 해서 몸에 비늘이 돋아난 석목은 흑도를 휘두르며 혈규존자와 맞붙었다.
석목은 토템 변신을 일 각 이상 유지할 수 있었고, 이 만근에 달하는 힘은 혈규존자에게 크게 밀리지 않았다.
혈규존자는 석목과 싸우면 싸울수록 놀라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야만족은 변신한 뒤에도 지계의 초기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지만, 힘이나 움직임, 반응속도 모두 자신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게다가 석목의 몸에 돋아난 검은 비늘은 무척이나 단단해서, 혈규존자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고도 실질적인 타격은 거의 입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흑도 역시 굉장히 특별했다. 그것은 크지는 않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무겁고 날카로웠다.
비술을 사용해 강화된 혈규존자의 두 팔은 영기와 비견될 정도로 단단했으나, 흑도에 조금의 흠집도 남기지 못했다.
게다가 혈규존자의 두 수하는 금전검에 발목을 잡혀 한 걸음도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하, 지계의 요족은 고작 이 정도인가!”
석목이 가소롭다는 투로 말했다.
“네가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혈규존자가 분노해 포효했다. 그의 몸에서 핏빛이 터져 나오더니 삼 장 가까운 크기의 거대한 핏빛 나무 법상이 나타났다.
핏빛 나무의 법상에는 두꺼운 덩굴 같은 나뭇가지가 두 개 자라 있었으며, 그 위에는 녹색 가시가 잔뜩 나 있었다.
법상이 나뭇가지를 흔들자 빼곡한 녹색 가시가 석목을 향해 쏘아져 날아갔다.
석목은 나무 법상이 나타나기 바로 전에 풍영술과 금강술 부적을 사용했고, 전신이 푸른빛과 금빛에 감싸여 있었다.
석목이 흑도를 휘둘러 혈규존자의 공격을 막았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움직여서 녹색 가시를 피했다.
하지만 지계중기의 실력을 가진 상대가 법상까지 소환해 공격을 해오니 부담이 커졌고, 점점 버티기 어려워졌다.
몇 번 합을 나누자 석목의 몸을 감싸고 있던 금빛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검은 비늘은 녹색 가시에 상처를 입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대력마원탈태결을 6단계까지 수련한 석목의 육신이 보통 무인보다 단단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비늘이 몸을 보호해준다 해도 진즉에 뼈가 부러졌을 것이었다.
석목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부적과 운철흑도를 사용해 가까스로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면서 전장에서 떨어진 곳으로 조금씩 물러났다.
혈규존자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석목을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두꺼운 덩굴을 흑도로 막아낸 석목이 비틀거렸다. 그러자 혈규존자가 괴상하게 웃으며 발로 지면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그 순간, 지하에서 엄청난 속도로 핏빛 덩굴이 솟아나와 석목의 두 발을 묶었다.
“건방진 놈, 죽어라!”
혈규존자가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법상의 나뭇가지의 가시가 녹색 빛을 강하게 뿜어냈다. 당장이라도 쏘아져 나가서 꼼짝 못하고 있는 석목을 그대로 죽여 버릴 기세였다.
바로 그때, 석목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혈규존자의 뒤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그 사이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 자는 전신이 하얀 빛에 감싸여 모습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가늘고 긴 몸의 윤곽은 어렴풋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그 자는 혈규존자의 등을 향해 검은 곤봉처럼 보이는 물체를 가볍게 휘둘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혈규존자의 반응은 매우 빨랐다. 혈규존자는 즉시 법상의 공격을 멈춰 세웠고, 두꺼운 나뭇가지 두 개를 엮어서 몸 앞에 핏빛 덩굴 방패를 만들었다.
그 자가 뿜어내는 기운은 혈규존자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정도였다.
가볍게 휘두른 듯한 검은 곤봉은 핏빛 덩굴 방패에 닿자, 순식간에 방패의 영력(灵力)을 절반 가까이 빼앗아갔다. 그와 동시에 녹색 가시가 사라지고 방패의 색이 어두워지더니, 결국엔 나무법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곤봉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혈규존자의 몸을 강타했다.
쾅!
곤봉에 담긴 거대한 힘이 그대로 혈규존자의 몸에 쏟아졌다.
혈규존자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어서 그의 몸이 뚝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났다.
그 순간, 갑옷에 덮인 손이 번개처럼 다가와서 혈규존자의 머리를 잡았다.
퍽!
혈규존자의 머리가 마치 수박이 터지듯 부서졌고, 하얗고 붉은 것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어서 터진 머리 사이에서 혈규존자의 녹색 수혼이 날아올랐다.
그것은 나타나자마자 도망치려 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검은 연기에 휩싸여 끌려왔다.
하얀 빛에 둘러싸인 자는 녹색 수혼을 삼킨 뒤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그 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까지는 고작 두세 번 호흡을 할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지계중기의 혈규존자가 살해당하고 혼마저 먹힌 것이다.
나머지 두 나준수요는 혈규존자가 죽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금전검의 공격을 몇 번 막아낸 뒤 즉시 바닥 아래로 줄행랑을 쳤다.
이어 석목의 두 다리를 감고 있던 핏빛 덩굴이 빠르게 시들었다.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석목은 금전검을 회수한 뒤 전황을 살폈다.
명월교 무리는 사령생물을 대량으로 소환해서 거목부족과 싸우고 있었다. 지상에는 이미 열 구가 넘는 시체가 쓰러져 있었는데, 그중 대부분은 명월교의 하급 제자였다. 거목부족의 시체도 두세 구 있었다.
싸움이 한창이라 진 단주와 거목부족장을 제외한 모두가 석목 쪽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혈규존자가 죽었다!”
석목이 지계중기의 실력을 가진 혈규존자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접한 모두는 크게 놀랐다.
“가자!”
진 단주는 겁에 질린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영기인 회색 뼈 지팡이를 날려 거목부족장을 물러나게 한 뒤, 노란색 부적을 꺼내 사용했다.
노란 빛의 장막이 주위 몇 장을 덮더니 곧 명월교 교도와 사령생물들이 모두 사라졌다.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진 단주가 결단력 있게 도주를 선택한 것이다.
순식간에 골짜기에는 석목과 거목부족만 남게 되었다.
부족장은 다른 부족원들과 눈빛을 교환한 뒤, 석목에게 다가와 존경심이 가득한 투로 말했다.
“우리를 곤경에서 구해주어 고맙네. 이전에 우리가 범했던 무례는 용서해주었으면 좋겠군.”
“저들이 모두 도주했으니 약속은 지킨 것이겠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석목은 길게 말하지 않고 즉시 골짜기 밖으로 날아갔다.
녹당은 석목에게 무언가 말하려다가 그가 바로 떠나버리자 낙담했다.
“두 개는 지켰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부족장이 화원수왕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당아야, 지금 바로 팽 장로와 마을로 돌아가 제사장들을 모셔오거라. 이곳의 진법을 다시 설치해야겠구나.”
거목부족장이 말했다.
“대장로, 방금 그 하얀빛에 둘러싸인 자를 봤나?”
거목부족장이 옆에 있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을 향해 물었다.
“워낙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져 저도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수단이 명월교의 혼사들이 사용하는 방법과 상당히 유사했습니다. 지계중기의 요족을 저렇게 쉽게 무찌르다니…. 정말 놀라운 실력이었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맞네. 하지만 그가 사용한 괴수화 변신은 분명 우리 야만족의 비술이었어. 뭐가 어찌됐든 그가 실력을 행사해 모든 도왕을 가져가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군.”
거목부족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 * *
산골짜기를 벗어난 석목은 외지고 조용한 산간의 평지에 착지했다.
그가 땅에 내려서자마자 옆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운철흑곤을 든 연나가 나타났다.
“연나, 덕분에 살았어. 네가 아니었다면 이기지 못했을 거야.”
석목이 말했다.
“마침 곤봉을 돌려주려 했을 뿐이야. 이번에 도운 것은 선금이라고 생각하고 다음번에는 영석을 많이 준비해둬.”
연나는 석목에게 운철흑곤을 던져준 뒤 바로 사령계로 돌아가려 했다.
“기다려.”
운철흑곤을 받아 든 석목이 다급히 연나를 불러 세웠다.
연나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곤봉으로 어떻게 영력을 흡수하는 거야? 여러 번 시도했지만 아주 조금 흡수할 수 있었을 뿐, 소득이 없었어.”
석목이 말했다.
그러자 연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지금 네 실력으로는 불가능해. 지계의 경지에 오르면 그때 다시 말하자.”
석목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연나는 이미 사령계로 사라진 뒤였다.
석목은 곤봉을 들어보았다. 그리고 그것의 무게가 처음 제작했을 때와 같아진 것을 획인하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연나는 이전에 자신에게서 가져간 그 많은 영석을 전부 다 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녹색 꽃을 받고 연나의 도움까지 받았으니,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그렇게 스스로 위안하니 마음이 조금 평온해졌다.
석목은 곤봉을 등 뒤에 메고 진묘계에서 도왕을 꺼냈다.
그의 얼굴에 흥분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제 수련에 적합한 화령지만 찾으면 되었다. 그렇게 되면 도왕과 화원도과로 반년 내에 적원화경 9단계를 돌파, 선천후기의 경지에 오를 자신이 있었다.
석목은 그들에게서 도왕 세 개를 전부 빼앗을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의 행동이 강도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도왕과를 다시 진묘계에 넣은 석목이 품속에서 검은 팔찌를 꺼냈다.
그것은 혈규존자의 저장법기로, 오늘의 두 번째 수확이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석목이 팔찌에 정신력을 주입했다.
팔찌 안의 공간은 매우 넓어서 진묘계의 두 배 정도였다.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팔찌 안의 공간은 넓었지만 물건은 거의 들어 있지 않았다. 영석과 어지럽게 흩어진 재료들을 제외하면 서책 한 권이 전부였다.
물론 영석은 만여 개가 있었으며 재료들도 상당히 귀한 것이었다. 그 정도만 해도 상당한 재산이긴 했지만, 혈규존자가 지계의 강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너무 적었다.
석목은 팔찌의 물건을 전부 진묘계로 옮긴 뒤 서책을 꺼냈다.
“요족명록이라….”
석목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서하대륙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그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책을 읽기에는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석목은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둘러보았다. 산골짜기 방향에서 채아가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석목은 어느 산중턱에 위치한 동굴 앞의 푸른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을 천천히 덮었다.
그 책에는 요족에 관한 것을 포함해 서하대륙에 대한 정보가 대략적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책에 적힌 대로라면 서하대륙은 동주대륙보다 훨씬 넓고 자원이 풍부했지만, 사람은 동주대륙보다 적었다.
동주대륙은 인족이 가장 많았지만 이곳은 요족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그 다음이 야만족이었고, 인족은 수가 가장 적었다.
요족은 크고 작은 세력이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대륙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요족은 총 일흔두 가지의 종으로 나뉘었는데, 대부분은 짐승형 요수였다. 식물형 요수도 일부 있었는데, 나준수요는 식물형 요수 중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요족의 실력이 인족의 선천등급 정도에 도달하면 신체를 부분적으로 인간화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을 장(将)이라고 불렀다. 지계등급 정도에 도달하면 대부분의 몸을 인간의 형태로 바꿀 수 있었는데, 이는 수(帅)라고 했다. 천위의 실력을 가진 요족은 요왕(妖王)이라고 해서 완전히 인간의 형태로 변할 수 있었다.
다만 기록을 보니 서하대륙에서 지금까지 요왕이 된 요족의 수는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석목은 책을 진묘계에 넣은 뒤 옥간을 하나 꺼냈다. 그것은 녹당에게서 받은 지도였다.
옥간에 정신력을 주입하자 거대한 지도가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도에는 야만족 세력의 성과 마을이 표시되어 있었으며, 해당 세력이 평만에 속하는지 흉만에 속하는지 등의 설명이 달려 있었다.
이전에 거목부족장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보아 평만과 흉만의 사이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가 흉만의 신분으로 평만의 구역에 들어간다면 아마도 좋은 대우는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지도의 가장 북쪽에는 아주 큰 세력을 가진 부족이 하나 있었는데, 설명을 보니 그곳은 열사부족의 세력권이었다.
그리고 현재 석목이 있는 구역은 평만의 세력 범위 내였다.
평만이 그를 환영하지 않으니, 석목은 흉만이 관할하는 구역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때 부리에 보라색 과일을 문 채아가 날아와 석목의 어깨에 앉았다. 채아는 과일을 몇 번에 나누어 삼킨 뒤 기분 좋은 표정으로 석목에게 물었다.
“석두, 벌써 반나절 째야. 아직도 어디로 갈지 못 정했어?”
“시끄러워. 이제 출발할 거야.”
석목이 채아의 머리에 딱밤을 날린 뒤 옥간을 챙겨 넣고 북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