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서하비사
석목은 일강성의 거리를 거닐며, 동주대륙의 성들과 비교해 규모면에서 뒤처지지는 않지만 조금 더 소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내의 일부 거주구역은 동주대륙 야만족의 마을과 대체로 비슷했다.
대부분의 건물은 단층이었으며, 이 층 혹은 그 이상의 건물은 흔하지 않았다.
길가의 상점은 대부분 영재(灵材)와 영약, 요수의 몸에서 채취한 재료를 사고 팔았으며, 완성품을 판매하는 상점은 매우 드물었다.
서하대륙의 야만족이 가공에 있어서 서투르다는 점은 동주대륙의 야만족과 별반 차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서하대륙의 각종 자원이 아직 전부 소진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석목은 끊임없이 재잘대는 채아를 데리고 걷다가 한 가게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직경이 이십여 장에 달하는 검은 바위를 통째로 깎아서 만든 그 건물은 다소 특별해보였다.
그곳은 영재를 판매하는 가게로, 성내에 있는 같은 업종의 가게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
가게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평소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석목은 즉시 가게 안으로 향했다.
안에는 목재로 만든 선반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그 위에 각종 다양한 꽃과 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해풍등(海风藤), 상육미(商陆尾), 금종용(金苁蓉), 구남초(龟岚草)…….”
석목이 몇몇 영초를 알아보고 혼자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석목은 상점에 진열된 물건을 일부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그동안 무찌른 상대들의 소지품에서 얻은 서적 덕분이었다. 그는 수련을 하고 남는 시간에 가끔 서적을 읽곤 했다.
비록 진열된 상품 중에서 일부만 알아봤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석목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들은 고급 부적과 단약을 제작하는 주 재료로 동주대륙에서는 굉장히 귀했으며, 평범한 가게에서는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작고 뚱뚱한 남자 야만인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석목을 반기며 말했다.
“원하는 물건이 있습니까? 제가 한번 추천을 해드릴까요?”
남자는 복장이나 분위기가 여느 종업원들과는 다른 게, 아마도 이 가게의 주인인 것 같았다. 그는 석목의 경지가 높다는 것을 알아봤는지 매우 겸손한 투로 말했다.
“혹시 원숭이 요수의 정혈을 파나요?”
석목이 물었다.
“정말 잘 오셨군요. 마침 최근에 운산요원(云山妖猿)의 정혈이 들어왔습니다. 품질이 상당히 좋은데 직접 보시겠습니까?”
남자가 말했다.
“혹시 선천후기의 경지 이상의 것도 있나요?”
석목이 물었다.
“죄송합니다. 운산요원의 경지는 높아봐야 선천초기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다른 가게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남자는 살짝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째서죠? 상급 원숭이 요수의 수가 많지 않아서 그런가요?”
석목이 물었다.
“고객님이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동혁 구역에는 주로 구렁이 요수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상급 원숭이 요수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원숭이 요수가 모여 있는 곳은 헌화(轩化)구역으로 이곳과 거리가 굉장히 멀고 가는 길이 험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급 원숭이 요수의 재료가 이곳까지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죠. 하지만 운이 좋다면 성에서 개최되는 경매에서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자가 말했다.
석목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원숭이 요수의 정혈을 구하는 것은 한동안 포기해야 될 것 같았다.
가게를 떠나려던 석목은 문득 무언가 생각나서 남자에게 물었다.
“참,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물어봐도 좋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면 성심껏 대답하겠습니다.”
남자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능천봉에 대해서 아나요?”
석목이 물었다.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설마 그곳으로 가려는 겁니까?”
남자가 멍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석목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곳으로는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째서죠?”
석목이 물었다.
“능천봉은 요족의 성지이자 천연 요새입니다. 우리 야만족뿐만 아니라 평범한 요족은 마음대로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곳이지요.”
“성지요?”
“제가 마침 조금 알고 있는 사실이니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그는 남자의 설명을 듣고 서하대륙의 역사와 현재의 정세에 대해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서하대륙은 총 서른여섯 개의 크고 작은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능천봉은 그중 서하대륙의 중간 부분인 나라(那罗) 구역에 위치해 있었다. 봉우리가 구름 위까지 높이 솟아 있는 능천봉은 요족의 성지로, 요족에서 가장 강한 세 부족이 지키고 있었다.
수천 년 전 서하대륙에는 야만족과 요족만 있었다. 총 일흔두 종으로 나뉘는 요족은 수가 많아 대륙 대부분의 핵심 구역을 차지했으며, 십 대 부족을 필두로 하는 야만족은 대륙의 외곽에 흩어져 있었다.
야만족 토템용사가 수련을 하려면 요족의 혼과 몸에서 나오는 재료를 필요로 했다. 그러다보니 야만족이 요족을 살해하고 요족이 그 복수를 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양측의 갈등은 점차 격렬해졌고, 결국 요족과 아만족의 전쟁이 발발했다.
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요족과 야만족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고, 크고 작은 규모의 전투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서하대륙이 피로 물들었다.
야만족은 지능이 요족보다 훨씬 높고 토템비술을 사용해 법기와 영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십 대 부족의 만왕(蛮王)을 주축으로 연맹을 결성해 힘을 모으자,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반면 요족은 이전부터 각 부족 간 갈등의 골이 깊었고 서로 협력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야만족에게 각개 격파를 당했고 결국 넓은 영토를 뺏았겼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요족에서 요왕(妖王)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하얀 원숭이의 모습을 한 요왕은 일흔두 개 요족의 우두머리를 순식간에 전부 굴복시켰죠. 그 뒤 능천봉을 거점으로 삼은 뒤 요족을 이끌고 서하대륙을 휩쓸었어요.
기세가 드높던 야만족은 대패를 했고, 열 개 부족의 만왕 대부분이 죽거나 다치면서 각 부족이 사분오열됐죠. 요왕은 모든 야만족을 서하대륙에서 쫓아내겠다며 대단한 기세로 날뛰었고, 야만족은 매우 위험한 국면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하얀 원숭이! 설마…….’
남자의 말을 들은 석목이 무언가 떠올렸다.
바로 그때, 석목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채아가 물었다.
“요왕은 어디에서 나타난 거야?”
“누군가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고 누군가는 고대의 요수가 천년을 수련한 뒤 나타난 것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요족들은 요왕이 능천봉 위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추측이 난무하지만 이제 와서 확인할 방법은 없죠.”
남자가 채아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됐죠?”
석목이 물었다.
“그 뒤로는 사정이 조금 재미있게 변했습니다. 동주대륙에서 자신들을 명월교의 교도라 부르는 인족의 무리가 서해를 건너 서하대륙에 도착한 겁니다. 만왕들과 무슨 협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야만족과 연맹을 맺고 함께 요족에 대항하기 시작했죠.
명월교의 사령군단이 더해지자 야만족 측의 전력이 대폭 증가했고, 어떻게든 요족과 막상막하로 싸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왕은 너무나도 강해서, 요왕이 직접 나서는 전투에서는 언제나 질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연맹이 요족의 공세를 점점 버티기 힘들어졌을 때쯤, 요왕은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나요?”
놀란 석목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요왕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은 점점 잦아들었습니다. 요족 내에서 다시 내란이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양측 모두 백 년 간 이어진 전쟁에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이죠. 그 이후로 요왕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장소인 능천봉은 요족의 성지가 되었죠. 요족은 요왕이 언젠가 그곳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석목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석목은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눈 뒤 그곳을 떠났다. 떠나기 전 그는 감사의 의미로 고급 부적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구입했다.
“서하대륙의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하네. 능천봉이 요족의 성지라니,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겠어. 석두,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던 채아는 아직까지 그 여운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석목은 그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천천히 생각해봐. 그나저나 배고파서 죽을 지경이야. 아까 약속한대로 우선 음식부터 좀 먹자.”
채아가 말했다.
“하루 종일 먹고 마실 생각만 하네.”
석목이 채아를 보며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
“누가 너더러 주인을 하라고 했냐? 그런 성가신 일은 당연히 주인이 생각해야지!”
채아의 말에 석목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이 길을 따라 좀 더 걸어가니 한 주루가 나타났다.
“여기로 가자.”
석목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 주루는 매우 크고 화려했다.
“혼자 오셨습니까?”
석목이 주루에 들어서자 점원이 바로 다가와 물었다.
“조용한 방 하나와 요리를 부탁해요.”
석목이 말했다.
“맛있는 술도 줘.”
채아가 끼어들어 말했다.
점원이 신기하다는 듯이 채아를 쳐다보았다. 서하대륙에는 각종 요수가 많았지만 말하는 새는 굉장히 드물었다.
“알겠습니다. 위로 올라가시지요.”
점원이 대답한 뒤 석목을 이 층으로 안내했다.
각각 독립된 별실이 있는 이 층은 일 층과는 달리 매우 조용했다.
선천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자연의 기를 흡수하기 때문에 장시간 음식을 먹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석목은 오랜 시간 유랑을 하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배불리 먹고 싶었다.
석목과 채아가 탁자에 앉자 점원이 금세 음식과 술을 가져다 줬다.
채아가 환호하며 달려들어 볼이 터질 듯이 음식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석목은 그런 채아의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석목 역시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며 가벼운 마음으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술이 혀에 닿자 매운 향이 입 안에 퍼졌다. 야만족의 독주 중에서도 고급주가 확실한 것 같았다.
바로 그때, 계단 아래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상당수의 사람이 올라왔다.
호기심이 동한 석목은 자신도 모르게 문틈 사이로 시력을 집중했다.
그들은 회색 옷을 입은 인족으로, 명월교의 사람들이었다. 복장이 다른 명월동교의 사람도 몇 섞여 있었다.
그들은 석목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별실로 들어가더니 병풍을 펼쳐서 방 안을 단단히 가렸다.
“석두, 왜 그래?”
머리를 파묻고 음식을 먹던 채아가 고개를 들었다. 채아는 트림을 하다가 석목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석목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고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토템의 힘을 발동하자, 주위의 소리가 순간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여 형, 내가 술 한잔 올리겠네!”
“파 형, 제가 먼저 한잔 올려야지요.”
“그렇게 남처럼 말하면 서운하네. 우리는 이전에 지내온 곳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종문 아닌가. 인연이 닿아 이렇게 함께 일강성에 파견되었으니, 이제 모두 다 나 파명의 형제네. 앞으로는 서로 챙겨주자고!”
“좋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별 말을 다 하는군. 자, 마시자! 그 뒤에 서해에서 겪은 이야기를 해주게!”
곧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잔을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 들은 석목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보아하니 그 사이에 명월동교가 명월서교와 접촉한 것 같았다.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저들의 대화를 들었을 때 명월동교의 제자들은 이미 명월서교에 녹아들어 여러 성에 있는 분단으로 파견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