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둘러싸인 성
석목은 살짝 웃음을 보였다. 명월서교가 명월동교의 제자들을 각 분단으로 보낸 것은 명월동교가 힘을 키우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 같았다.
하지만 서하대륙에서 재기해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유안은 그들의 울타리 아래에서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니, 조만간 상당한 파동이 일 것 같았다.
“석두, 왜 웃는 거야? 혼자 재미있어 하지 말고 나한테도 좀 얘기해줘.”
채아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 아니야. 명월교에 관한 일 때문이야.”
석목은 방금 들은 이야기와 자신의 생각을 간단하게 말했다.
“석두, 유안 그 음험한 자는 반드시 조심해야 돼!”
유안의 이름을 들은 채아가 무서운 것이라도 본 것 마냥 몸서리를 쳤다.
“하하, 나도 다시는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석목이 말했다.
“일강성에도 명월동교의 사람이 있다니. 그들이 너를 알아보면 상당히 성가실 텐데, 어떻게 할 계획이야?”
채아가 물었다.
“난 명월동교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알아본다고 해도 어떻게 하겠어?”
석목이 술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맑고 찬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가자 정신이 확 들었다.
“그건 그렇지. 명월동교의 전주들 중에 유안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너를 붙잡아둘 능력이 없을 거야.”
채아가 말했다.
“좋아, 배가 불렀으니 이제 가자.”
석목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채아가 다급히 따라갔다.
주루를 나선 석목은 곧장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디로 갈지 결정했어?”
채아가 물었다.
“응, 서쪽으로 갈 거야.”
석목은 이후 자신의 실력을 기르며 능천봉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르릉!
성 밖에서 갑작스럽게 폭발음이 들려오더니 바닥과 거리 양쪽에 있는 건물이 흔들렸다.
길을 걷던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뭐야!”
“무슨 일이지?”
놀란 석목은 채아를 현장으로 날려 보낸 뒤 성문을 향해 내달렸다.
잠시 후, 석목의 머릿속에 채아의 눈에 비친 광경이 떠올랐다.
성을 중심으로 사방의 지평선에서 천지를 뒤덮을 정도로 수많은 요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일강성 성벽 사면의 초소에 주둔하는 야만족 병사들은 공격에 대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동문과 서문은 벌써 천천히 닫히는 중이었다.
요수는 요랑(妖狼), 요호(妖狐) 등 수만 마리였는데, 그중 뱀 계열의 요수가 월등히 많았다.
수많은 소형 요수의 앞에는 거대한 요수가 몇 마리 있었는데, 지면을 뒤흔드는 소리는 바로 이 요수들이 뛰어오는 소리였다.
사방에서 요수가 덮쳐오자 야만족 병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요수가 몰려온 거지?”
“어서 성주(城主)님께 알려!”
잠시 후, 석목은 성벽 부근의 한 높은 건물 위에 도착했다. 성 밖의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석목의 표정도 굳었다.
바로 그때, 힘찬 호각소리가 울리더니 성 안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성벽 위로 뛰어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뒤집어진 그릇 같은 반구형 빛의 장막이 형성됐다. 빛의 장막은 곧 성을 완전히 감쌌다.
보호막이 생겨나자 혼란에 빠졌던 사람들은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그때, 성 안에서 날아오른 두 사람이 허공에 나란히 서서 사나운 위압감을 뿜어냈다.
두 사람 중 왼쪽에 있는 사람은 노란 옷을 입고 금색 허리띠를 찬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덩치가 매우 크고 머리에 금관(金冠)을 쓰고 있었는데, 구레나룻이 조금 하얗게 세어 있었지만 두 손은 옥처럼 고왔다.
다른 한 사람은 회색 옷을 입은 묘령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몸매가 아름다웠으며,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석목은 그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금관을 쓴 중년의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회색 옷을 입은 여인은 분명 명월동교의 전주 방옥이었다.
석목은 그녀가 이곳에 나타나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차가웠던 그녀가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 듯 낯선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 강한 위압감을 뿜어낸다는 것 때문이었다.
석목은 속으로 여러 가지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설마 그 짧은 시간에 기연이라도 얻은 것인가? 아니면 서하대륙의 충만한 자연의 기 덕분에 막혀 있던 경지를 돌파한 건가?’
금관을 쓴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전 수문병은 성벽을 지키고 모든 수성 기계장치를 가동하라!”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수문병들은 성벽에 올라가 거대한 나무판자들을 들어올렸다. 그 위에는 거대한 쇠뇌와 포차 등이 올라가 있었는데, 토템 부문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술법진을 새긴 법기인 것 같았다.
수문병들이 작업을 마쳤을 즈음, 성 밖의 요수들은 이미 성벽 주위 백 장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러나 요수들은 바로 성을 공격하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수많은 요수가 뿜어내는 위용만으로도 성 안의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기에 충분했다.
성 밖의 요수들을 보고 있는 중년 남자와 방옥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어 중년 남자의 손에서 푸른빛이 날아갔다. 그 빛이 성벽을 감싼 빛의 장막에 닿자 장막 사이에 틈이 살짝 생겼다. 두 사람은 그 틈 사이로 날아서 성 밖으로 나갔다.
“일강성의 성주 유찬과 명월교 일강성 분단의 단주 방옥이다. 갑자기 일강성에 이렇게 몰려온 이유가 무엇인가? 설마 우리 야만족과 전쟁이라도 벌일 셈이냐?”
유찬의 목소리가 세차게 울려 퍼지자, 경지가 낮은 요수들이 두려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바로 그때, 요수들 사이에서 검은 망토를 입은 남자가 날아올라 유찬과 방옥 앞에서 멈췄다.
그 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몸 뒤로 검은 뱀의 꼬리가 길게 자라나 있었고, 피부에도 울퉁불퉁한 검은 비늘이 돋아 있었다. 섬뜩하게 번득이는 얇은 세로 동공은 마치 불처럼 빨간 색이었다.
그의 손가락에는 하얀 보석이 박힌 금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그 보석에는 ‘67’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금색 반지를 본 중년의 남자와 방옥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혹시 소규교수(沼蝰蛟帅)라 불리는 망요족(蟒妖族)의 족장 오규요?”
잠시 침묵하던 유찬이 말했다.
“맞다. 본좌가 바로 오규다!”
오규가 차갑고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수하들을 이끌고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이오?”
유찬이 물었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 왔다!”
오규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유찬은 옆의 방옥과 시선을 교환한 뒤 다시 물었다.
“범인이라니, 무슨 범인 말이오?”
“흥, 내 아우가 얼마 전 사굴소택에서 죽었다. 수혼마저 흡수해갔더군. 조사를 한 결과 그 범인이 이 일강성에 숨어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얻었다.”
오규가 말했다.
성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석목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채아 역시 놀라서 석목을 보며 불안한 듯 몸을 떨었다. 둘은 동시에 사굴소택에서 적환요망을 살해했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석두, 저 자가 말하는게 네가 죽인 그 적환요망은 아니겠지?”
채아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마 맞는 거 같아.”
석목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채아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그…….”
“겁먹을 필요 없어. 현장을 목격한 사람도 없었잖아. 우선 상황을 보자.”
석목이 말했다.
성 밖에서는 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본좌는 오늘 너희를 괴롭히러 온 것이 아니다. 내 아우를 죽인 범인만 내놓는다면 저들을 전부 물리겠지만, 그러지 않겠다면 이 일강성을 전부 폐허로 만들어버리겠다.”
오규가 차갑게 말했다.
그러자 유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얼마 전 사굴소택에서 지계의 적환요망이 길을 지나던 인족과 야만족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그대 아우의 소행이 맞소?”
“맞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흥! 그대의 아우가 죽인 야만족과 인족이 백 명이 넘는데, 그건 어떻게 보상할 것이오?”
유찬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우습구나! 사굴소택은 원래 우리 요족의 근거지다. 그런데도 너희 인족과 야만족이 오랜 시간 멋대로 난입하여 우리 요족을 죽이지 않았느냐? 자업자득이다!”
오규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의 아우가 살해당한 것도 원망을 품을 일이 아니지 않겠소? 그것 역시 자업자득이오!”
유찬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오규가 몸에서 검은빛을 뿜었다. 동시에 무서운 위압감이 주위로 퍼져나갔다.
성 안에 있던 석목은 그걸 보고 깜짝 놀랐다.
오규는 적환요망보다 훨씬 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마도 지계후기의 경지에 오른 것 같았다.
“서두르지 말고 내 말을 들어보시오.”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옆에 서 있던 방옥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꾀꼬리의 울음소리처럼 듣기 좋았다.
오규가 방옥을 보더니 검은빛을 살짝 거두었다.
방옥이 말했다.
“오규, 그대의 아우에 대해서는 나도 들어 알고 있소. 분명 망요족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강했다지. 그 정도 실력이라면 유찬 성주가 직접 나서더라도 싸움에서 승리할 수는 있을지언정 죽이지는 못할 것이오.
성에 있는 소수의 지계 토템용사는 최근 아무도 성을 나가지 않았으니 사굴소택에 진입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오. 믿지 못하겠다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조사해 봐도 되오. 요족은 성 밖에도 많은 염탐꾼이 있으니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그대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자 오규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다시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교활한 너희 인족과 야만족이 숨기겠다고 마음먹으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찾아낸다는 말이냐! 범인을 내놓지 않겠다면 즉시 성을 공격하겠다!”
유찬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오만방자하군. 우리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오?”
“하하, 잘 알고 있구나! 나는 여태껏 너희 야만족과 인족을 안중에도 둔 적이 없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범인을 내놓거나 죽음을 받아들여라!”
오규의 몸에서 다시 검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허튼소리!”
“기다리세요.”
분노한 유찬이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방옥이 그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만약 전쟁을 하게 되면 승패와 관계없이 서로의 손실이 클 것이오. 망요족에 족장의 자리를 노리는 자가 있다고 알고 있소. 정면으로 싸워서 승리를 한다 해도, 전력을 크게 상실한 그대가 족장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겠소? 단언컨대 그건 아마 힘들 것이오.”
방옥의 말에 오규가 미간을 찌푸렸다.
방옥은 말을 이었다.
“내기를 하나 하는 것이 어떻소?”
“내기?”
“나와 유 성주가 그대의 공격을 삼 초 동안 받아내겠소. 만약 우리가 그대의 공격을 전부 받아내지 못하면, 직접 성에 들어가서 범인을 찾는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겠소. 대신 우리가 공격을 전부 받아낸다면 그대가 수하들을 이끌고 물러나는 것이 어떻소?”
방옥이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오규가 생각에 잠겼다.
“왜, 혹시 질까봐 겁이라도 나는 것이오?”
유찬이 코웃음을 치며 조롱하듯 물었다.
“좋다, 네놈들 도발에 넘어가주마!”
유찬의 말을 들은 오규가 분노해 외쳤다.
“그렇다면 바로 시작하시오.”
방옥이 뒤로 몇 장 날아서 물러나며 말했다.
이어 그녀의 근처로 이동한 유찬의 몸에서 푸른빛이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