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바로 떠날 수는 없다
성 위아래에서는 요족과 인족, 야만족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결에 집중했다.
석목 역시 성 안의 높은 건물 위에서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정도 수준의 교전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다. 분명 앞으로의 수련과 실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석두, 너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넌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처럼 구경을 할 수 있어!”
채아가 석목의 모습을 보고 궁시렁거렸다.
“성주라면 당연히 성을 지킬 의무가 있지! 그나저나 방옥은 이곳에 온지 며칠 안 됐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성주와 사이가 좋을 수 있지?”
석목이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네 생각엔 유찬과 방옥이 삼초를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채아가 물었다.
“방옥이 최근 무슨 기연을 얻었는지 실력이 크게 늘었어. 아마 현월(弦月) 경지의 정점에 달한 것 같아. 그리고 저 유찬 역시 지계중기의 무인이니 둘이 힘을 합치면 아마 별 문제 없을 거야.”
석목이 말했다.
“하지만 만약 저들이 패배했을 때를 대비해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 만약 소규교수가 정말 널 찾아낼 방법을 가지고 있다면, 그때는 위험할 거야.”
채아가 걱정하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에 떠 있는 오규의 몸에서 검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두 다리가 반짝이며 기다란 뱀의 꼬리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폭증했다.
지지직!
그가 한 손을 뻗자 그의 손 앞에 검은 빛이 모여들어 십여 장 길이의 검은 창으로 변했다. 번개가 감도는 그 창은 매우 무시무시해 보였다.
표정이 살짝 굳은 유찬과 방옥의 몸에서 푸른빛과 회색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일 초!”
오규가 소리를 지르며 한 손을 거세게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창이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를 내며 방옥을 향해 날아갔다.
푹!
검은 창이 방옥의 가슴을 뚫고 지나가며 거대한 상처를 남겼다.
방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의 공격에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주위의 이들도 모두 놀랐다. 석목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오규마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일격에 적을 처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웃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그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방옥의 몸이 갑자기 회색 연기로 변해 바람에 흩어진 것이다.
이어 방옥은 십여 장 밖에서 다시 나타났다.
“일 초 받아냈소.”
방옥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오규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유찬은 흐뭇한 표정으로 방옥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의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정말 대단한 환술이군!”
석목이 중얼거렸다.
“별 것도 아닌 걸. 난 진작 간파했어.”
채아가 으쓱대며 말했다.
“정말? 네 눈에 그런 능력도 있어?”
놀란 석목이 채아를 보았다.
“당연하지. 나는 건앵일족에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천재라고.”
채아가 자화자찬했다.
석목은 반신반의하며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이 초!”
오규가 고함을 지르며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손에 검은빛을 뿜어내는 낫이 나타났다.
그가 눈에서 붉은 빛을 뿜어내자, 동시에 그의 손을 떠난 낫이 오규의 몸 주위를 선회하며 잔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주위 허공에 마치 수면의 물결 같은 파동이 일며 무시무시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성 안에 있는 석목마저 그 엄청난 위압감이 뚜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석목이 살짝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만약 자신이 저 공격에 정면으로 맞섰다면 십중팔구 당해내지 못했을 것이었다.
“죽어라!”
오규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순간 검은 낫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수십 배로 커졌다.
그 순간, 순식간에 방옥의 머리 위로 날아간 검은 낫이 아홉 개로 나뉘었다. 그리고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방옥을 향해 찍어 내려갔다.
아홉 개의 낫에 모든 퇴로가 막힌 방옥은 도망갈 곳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방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짧은 순간 수많은 고민을 하는 듯했다. 이어 그녀의 지팡이가 소리를 내며 파괴되었다.
그 순간 방옥의 정면에서 검은 관이 나타나더니 그녀의 몸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칵!
아홉 개의 낫은 관에 닿는 순간 흩어지고 단 하나의 실체가 관을 뚫었지만, 깊게 들어가지는 못했다.
관의 표면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올라 검은 낫을 감쌌다.
그와 동시에 낫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본체마저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놀란 오규는 다급히 낫을 회수해 법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검은 낫은 천천히 원래의 모습을 다시 회복했다.
검은 낫은 오규가 생명처럼 아끼는 영기였다. 대결에서 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관이 반짝이며 사라지자 방옥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그녀의 얼굴은 체내의 모든 생기를 흡수당한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석목은 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찔할 정도로 두려운 기운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기운은 여태껏 나천귀왕에게서 밖에 느껴보지 못했다.
“괜찮아요?”
방옥의 앞에 나타난 유찬이 물었다.
“괜찮아요……. 조심해요!”
방옥이 억지로 웃으며 말하다 말고 갑자기 겁에 질린 표정으로 외쳤다.
유찬이 놀라서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를 향해 동산만큼 거대한 검은 구렁이의 머리가 덮쳐오고 있었다.
오규는 몸길이가 수백 장에 달하는 거대한 검은 구렁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거대한 기의 파동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삼 초!”
거대한 구렁이의 머리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떠한 진기나 법력도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육체의 공격이었지만, 가장 강력한 공격이기도 했다.
유찬이 어두운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의 몸 앞에 몸길이가 수십 장에 달하는 푸른 뱀 법상이 나타나 공격을 막았다.
퍽!
대지가 진동하며 공기가 폭발했다.
오규의 본체와 충돌한 푸른 뱀 법상이 푸른 연기처럼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하지만 오규의 본체도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창백해진 유찬은 입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금색 인형을 소환했다.
그가 입을 벌려 인형에 피를 토해냈다. 피를 뒤집어쓴 인형이 두 눈을 핏빛으로 번득이며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몸에서 태양처럼 밝은 금빛을 뿜어냈다.
금빛 속에서 몸집을 부풀린 인형이 순식간에 백 장 가까운 크기의 거인으로 변해 오규의 앞을 가로막았다.
금색 거인은 금색 갑옷을 입은 목조(木雕) 장군이었다. 성내지 않아도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을 가진 장군은 바로 기운을 뿜어냈지만, 붉은 눈은 다소 괴이하게 보였다.
오규는 검은 번개가 감도는 커다란 머리로 금색 거인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검은 번개가 하늘에서 내려치는 것 같았다.
동시에 허공에 일 장 가까운 크기의 검은 뇌구(雷球)가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유찬과 방옥을 향해 날아갔다.
지지직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는 뇌구는 한눈에 보아도 매우 강력해보였다.
놀란 유찬이 금색 거인을 향해 푸른빛을 발사했다. 그러자 그 빛을 흡수한 거인이 즉시 뱀의 머리를 노리고 태양처럼 빛나는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동시에 유찬은 푸른빛 보호막을 형성해 자신과 방옥 두 사람을 감쌌다.
쾅!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충돌과 함께 터져 나온 금빛과 검은빛이 오규와 거인을 덮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검은빛과 금빛이 섞인 빛의 고리가 엄청난 기세로 확산됐다. 주위의 허공에 육안으로 보이는 파문이 일었으며, 견고한 지면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면서 일강성 전체가 요동쳤다.
빛의 고리가 일강성의 보호막을 거세게 덮쳤고, 마구 반짝이며 격렬하게 진동하던 보호막에 결국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기세는 줄었지만 소멸되지 않은 빛의 고리는 그대로 성벽을 들이받았다.
단단한 성벽이 붕괴하며 돌조각이 사방으로 날렸다.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무너지는 성벽을 피하지 못해 파묻혔고,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 밖의 하급 요수들은 보호막조차 없었기 때문에 훨씬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천여 마리에 달하는 하급 요수가 빛의 여파에 말려들어 다진 고기처럼 으깨졌다.
석목이 있는 건물 역시 격렬하게 흔들렸지만, 그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는지 여전히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성 밖의 상황에 집중했다.
전투를 벌이는 셋은 모두 석목의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지계의 존재와 수차례 싸운 경험이 있었고, 그중 몇은 연나의 도움을 받아서 죽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의 경지는 기본적으로 모두 지계초기였다. 눈앞의 오규는 고사하고 유찬과 비교해도 상당한 실력의 격차가 있었다.
석목은 현재 토템변신을 발동했을 때에 한해서 지계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것은 단시간에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일 뿐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만약 정면으로 싸운다면 오규와 유찬 둘 중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것이었다.
물론 연나의 도움을 받는다면 얘기가 달랐다.
‘서하대륙에는 많은 고수들이 숨어 있구나.’
석목은 속으로 생각했다.
곧 성 밖의 검은빛과 금빛이 서서히 사라지며 안쪽의 상황이 드러났다.
거인은 두 팔과 머리가 사라져 있었으며, 거대한 몸에는 균열이 무수히 생겨나 있었다.
하지만 오규 본체의 공격은 결국 거인에게 막혔으며, 뇌구는 유찬과 방옥의 몸을 뒤덮은 보호막에 막혔다.
푸른빛의 장막은 유찬과 방옥을 감싼 채 뒤로 십여 장 날아갔다.
“삼 초를 전부 받아냈으니 약속을 지켜주길 바라오.”
유찬이 말했다.
거대한 구렁이 모습을 한 오규는 유찬과 방옥 두 사람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에 감도는 번개는 이미 사라져 있었으며, 비늘은 일부 부서져 있었다.
“설마 번복을 할 생각이오?”
유찬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소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사이 안색이 다소 회복된 방옥도 경계하는 표정으로 몸에서 회색빛을 뿜어냈다.
오규는 그런 그들을 잠시 더 지켜보았다. 이어 그의 몸이 검은 빛으로 반짝이더니 빠르게 축소되어 인간의 몸으로 변했다.
“본좌의 삼 초를 전부 받아냈으니 약속은 지키도록 하겠다.”
오규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 몸을 돌려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요수의 무리도 그가 떠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유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흔들자 파괴된 거인이 반짝이더니 작은 인형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하지만 몸의 대부분이 부서져서 약한 빛도 발하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유찬은 작게 탄식하며 인형을 챙겨 넣었고, 방옥과 함께 성 안으로 날아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일강성의 모든 이가 폭발적인 환호성을 내질렀다. 사람들은 일제히 유찬과 방옥의 이름을 연호했다.
“좋아, 이겼어!”
흥분한 채아가 외쳤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석목은 건물 아래로 내려가 인파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석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성을 떠날 거야?”
채아가 물었다.
“오규가 당장은 물러났지만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이곳을 벗어나긴 해야지. 하지만 바로 떠날 수는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채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석목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우선 머물 곳을 찾아 본 뒤 사흘 후에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