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천오보헌(天吴宝轩)
다음 날, 일강성 외진 곳에 위치한 객잔 이 층의 창문이 열리며 석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깊게 호흡을 하며 창가 너머로 길거리를 바라보았다.
전날 요수의 공격 때문인지 거리는 일강성을 떠나려는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석목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은 그에게 매우 유리했다. 안전이 확보된 뒤 무리에 섞여 떠난다면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 채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날아왔다.
“어때?”
석목이 물었다.
“석두, 큰일 났어. 네 예상대로 오늘 많은 사람이 성을 떠났는데 그중 일부가 실종됐대.”
채아가 말했다.
“난데없이 실종이라니…….”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제 그 요수들은 사굴소택에 돌아가지 않고 성 밖 삽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머무르고 있대. 소규교수가 성 밖을 배회하는 걸 목격했다는 사람도 있어.”
채아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분명 어제 내기에서 패하면 물러나겠다고 해놓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다니. 정말 뻔뻔해.”
채아가 말했다.
“그런 것도 아니야. 고작 삼십 리지만 어찌됐든 물러났으니 약속을 지키긴 한 것이지.”
석목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규가 이렇게 나온다면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한편 성주의 거처에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유찬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하룻밤 사이에 안색이 상당히 좋아진 방옥이 앉아 있었다. 그녀 역시 유찬과 마찬가지로 표정은 좋지 않았다.
“오규가 지금 삼십 리 밖에서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약속을 어겼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에요. 제가 조건을 꼼꼼히 내걸지 못한 탓이에요.”
방옥이 자책하듯이 말했다.
“그놈이 교활한 탓이니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실력도 강하니 약속을 어긴다 해도 우리로서는 방법이 없어요.”
유찬이 말했다.
“그럼 이제 어쩌죠? 다시 한 번 오규를 찾아가야 할까요?”
방옥이 물었다.
“오규가 체면도 따지지 않고 억지스러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찾아간다 해도 아마 소용없을 겁니다.”
유찬이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저 최대한 사람들이 성을 떠나지 않도록 권고하는 수밖에 없어요. 오규도 언제까지고 떠나지 않고 그곳에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잠시 고민하던 유찬의 말에 방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 내의 게시판에 공고가 붙었다. 그 주위에는 금세 수많은 야만족과 인족이 몰려들었다.
“요족이 성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지금 밖으로 나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오. 모두 최대한 성을 벗어나지 마시오. 성 밖으로 나간다 해도 막지는 않을 것이나,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책임을 지지는 않을 것이오.”
열사부족의 장로가 게시판 앞에 서서 큰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주위가 떠들썩해졌다.
열사부족의 장로가 말을 이었다.
“요족이 언제까지고 성 주위에 머물지는 못할 테니, 모두 한동안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잠시 참도록 하시오.”
석목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인파의 뒤쪽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채아는 언제나처럼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
“석두, 어쩌지?”
채아가 몸을 돌려 걷는 석목에게 물었다.
“어쩌겠어. 한동안은 이곳에서 머물러야지.”
석목이 말했다.
함부로 밖으로 나갔다가 성 밖을 지키고 있는 오규를 마주친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어차피 요족의 성지인 능천봉으로 가는 것은 자신의 현재 실력으로 무리였기에, 일단은 성에 머물며 최대한 실력을 키우는 편이 좋았다.
* * *
다음날, 석목은 무언가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돌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온신술은 옥간에 적혀 있던 대로 수련법이 어렵지 않았으나, 수련 속도가 굉장히 느렸다.
5 급의 높은 공간 속성 친화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온신술만으로는 앞으로 몇 십 년 동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꿈속의 탄월식에 의존한다 해도 사성술사에 오르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릴 게 분명했다.
석목은 꿈속에 들어가는 방법을 깨달았을 뿐 실제로 그 술법을 익힌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은색 결정이 자라는 속도를 주의 깊게 관찰한 적이 있었는데, 꿈속 원숭이의 속도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꿈속의 원숭이가 탄월식을 대성한 뒤로 달빛을 흡수할 때마다 엄지만한 크기의 결정이 생겨났다. 그것은 석목이 한 달 동안 꿈속에서 수련해야 만들 수 있는 크기였다.
그 말은 탄월식을 진정으로 습득한다면 수련 속도가 지금보다 놀라울 정도로 빨라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꿈을 꾸는 위치를 바꾸거나, 달과의 거리를 좁히거나 반대로 멀리하는 등 여러 방법을 시도해도 탄월식의 법결은 알아낼 수 없었다.
탄월식 뿐만 아니라 흡일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나가 계속해서 녹색 꽃을 제공해준다면 수련 속도가 상당히 빨라질 테지만, 그녀가 자신의 소환에 응하지 않으니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서 남은 방법은 적원화경을 수련하는 것뿐이었다.
흡일식의 도움으로 석목은 현재 적원화경 9단계 돌파를 앞두고 있었다. 화기가 충만한 화령지(火灵地)를 찾아 화원도왕을 복용한다면 그 안에 가득 담긴 화속성의 기운을 이용해 단번에 벽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석목은 서하대륙에 도착한 이후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아직까지 적당한 화령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일강성에 화령지가 있을까?’
석목은 몸을 일으켜 문 밖으로 나가며 생각했다.
* * *
사흘 후, 석목은 채아와 함께 어느 주루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점소이가 다가와서 찻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석목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채아가 먼저 소리쳤다.
“이곳의 간판 요리와 꼬치구이 여덟 개 줘.”
점소이가 채아를 보고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주위의 손님들도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았다.
석목이 채아의 머리를 한 대 세게 때리자, 채아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간판 요리만 하나 가져다줘요.”
석목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점원이 대답을 하고 돌아갔다.
석목은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더 마시며 미간을 찌푸렸다.
요수들이 성을 포위한 뒤로 벌써 닷새가 지났다. 최근 며칠 동안 석목과 채아는 화령지에 대해 수소문하고 다녔다.
그 결과 성 안에는 무기 제작과 단약 제조 등을 위한 화실(火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화실들은 열사부족 혹은 명월교 등 큰 세력의 통제 하에 있기 때문에, 현재 석목의 상황으로서는 그곳을 빌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설령 빌릴 수 있다고 해도, 무기 제작 등을 위해 만들어진 화실의 경우 화속성 기의 농도가 석목이 요구하는 정도에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석두, 너무 고민하지 마. 때가 되면 다 해결된다는 말이 있잖아.”
채아가 말했다.
“화령지를 찾지 못하겠으면 우선 온신술이나 대력마원탈태결을 수련하면 되잖아.”
채아가 말을 이었다.
석목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최근 며칠간 화령지를 찾아다니느라 원숭이 요수의 정혈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전에 찾아갔던 상점의 사장은 동혁구역에서 그것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지만, 석목은 또 다른 가게를 찾아가 알아볼 계획이었다.
바로 그때, 옆자리 야만족 손님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들었어? 천오보헌이 경매를 개최한대.”
“다음 개최까지 아직 반 년 이상이나 남았는데 벌써?”
“성이 요수들에게 포위된 이후, 성내의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성주가 직접 지시했다나봐. 듣기로는 유찬 성주도 좋은 물건들을 내놓을 계획이라고 하니 이번 경매는 볼만할 거야.”
“천오보헌이 개최하는 경매에는 원래부터 좋은 물건이 많이 나왔잖아.”
이야기를 듣던 석목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중얼거렸다.
“천오보헌이라…….”
석목은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 채아를 내버려두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석목이 다가오자 놀란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 중 안색이 창백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일어나 물었다. 그는 후천용사로 구성된 일행 중에서 유일한 선천초기의 토템용사였다.
석목은 기운을 숨기고 있었지만 그의 몸에서는 여전히 선천중기 무인 정도의 기운이 느껴졌기에, 그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저 여러분이 얘기하는 경매에 대해서 좀 묻고 싶었습니다. 여기, 이들의 계산서를 내 앞으로 돌려주게!”
석목이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그들이 표정을 풀었다.
“앉으시지요.”
중년의 남자가 의자를 가리키며 자리에 앉았다.
석목은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 앉았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물론 가명이었다.
“이번 경매에 참여하고 싶은 건가요?”
중년의 남자가 물었다.
“맞습니다. 혹시 이번 경매에 상급 원숭이 요수의 정혈이 나오나요?”
석목이 물었다.
“그건 저 같은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오보헌에 가서 직접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중년의 남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얘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는데, 천오보헌은 규모가 상당히 큰 곳인가 보죠?”
석목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설마 천오보헌 경매점을 모르는 겁니까?”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이전까지 줄곧 작은 동네에서 살다가 처음으로 일강성에 와서 식견이 좁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천만에요.”
그들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일강성에 왔다면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요. 천오상회 소속의 천오보헌은 최근 몇 년 동안 일강성에서 경매를 개최하고 있어요. 이 지역에서 가장 성대한 행사죠.”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천오상회요?”
석목은 놀랐지만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천오상회는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지 성마다 분점이 하나씩은 있더군요.”
다른 마른 야만족 남자가 말했다.
“어디 그것뿐인가. 듣기로 그들은 요족과도 거래를 한다고 하더군.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야.”
“맞네. 나도 그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 * *
석목은 천오보헌의 위치를 물은 뒤, 그들과 대화를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
그는 천오상회의 세력이 서하대륙까지도 퍼져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부른 배를 잡고 쉬고 있던 채아가 석목을 급하게 따라나섰다.
“석두, 뭐가 그렇게 급해? 이제 밥을 다 먹었는데 소화할 시간은 줘야지!”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 앉아 트림을 하고 말했다.
석목은 채아의 말을 무시하며 곧장 천오보헌이 있는 곳을 향해 갔다.
반 시진 후, 석목은 한적한 거리에 위치한 어느 건물 앞에 도착해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그 건물에는 ‘천오보헌’이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다.
석목이 눈빛을 살짝 빛냈다. 그곳은 동주대륙의 천오상회와는 달리 굉장히 검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때 한 중년 남자가 가게 앞에 있는 석목의 옆을 스치고 가게의 안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그의 뒤를 따라 가게 안에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진열대 위에 희귀한 영재와 영약, 법기 등이 있었지만, 동주대륙과 비교해서 상당히 부족해 보였다. 천오보헌에서는 정말 귀한 물건을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는 것 같았다.
계산대를 보니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방금 들어온 중년 남자와 무언가 속삭이고 있었다. 석목이 살짝 귀를 기울이자 그들의 대화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사장님, 어떡합니까. 또 화물을 강탈당했습니다.”
중년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손실은 얼마나 되지?”
주인이 굳어진 표정으로 물었다.
“다행이 화물을 나누어 운송해서 손실이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반 년 사이에 벌써 세 번째입니다.”
“우선 이 일을 위에 보고해. 한동안은 화물의 운송을 중단한 뒤 일이 해결되면 그때 다시 재개하자.”
잠시 후, 중년 남자가 떠나자 그제야 주인이 석목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으며 곧장 석목에게 다가왔다.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석목이 사장을 보고 인사하며 말했다.
“이곳에서 경매를 진행한다고 듣고 왔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이번 경매는 단골 고객만을 대상으로 진행됩니다.”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처음이지만 과거 천오상회와 거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으로는 안 될까요?”
석목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