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영화진(盈火阵)
“하하, 천오보헌은 본래 천오상회에 속해 있습니다. 천오상회의 오랜 고객이라면 우리 천오보헌의 단골이나 마찬가지죠. 그것을 증명할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습니까?”
석목의 말을 들은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석목은 말없이 진묘계에서 주황색 옥패를 꺼냈다. 옥패에는 살아 있는 것처럼 정교하게 새겨진 괴물의 문양이 있었다.
머리가 여덟 개 달린 괴물이 새겨져 있는 이 옥패는 과거 석목이 곡양성의 천오상회 분점에 의뢰를 했을 때, 서노자가 잘 보관하라며 그에게 준 증표였다.
주인은 그 옥패를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본회의 귀빈령(贵宾令)이 확실하군요. 이것은 동주대륙에 공급됐던 물건 같은데, 혹시 동주대륙에서 왔습니까?”
“맞습니다. 서하고국 곡양성에 머물 때 서노자 장로에게 의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노자 대사님의 지인이셨군요. 실례를 범했습니다! 저는 사 사장이라 불러주면 됩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지요.”
그 말을 들은 사장이 훨씬 친근한 말투로 이야기하며 옆에 있는 문을 두 손으로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석목을 아늑한 별실로 안내한 사 사장이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혹시 서노자 장로를 아십니까?”
석목이 물었다.
“서 대사님은 본회에서 무기 제련으로 유명한 분입니다. 십여 년 전 서 대사님이 서하대륙에 왔을 때 그에게 가르침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사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 서하고국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다고 하던데, 지금 그곳의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통천선교와 천마종이 합심해 명월동교를 공격한 얘기 말이군요. 그날 이후로 명월동교는 완전히 무너졌으며, 곡양성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죠. 과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릴지도 알 수 없습니다.”
사 사장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럼 곡양성에 있던 천오상회의 분점 역시…….”
석목이 말했다.
“하하, 그건 아닙니다. 우리 천오상회는 이전부터 거래와 관련된 일만 해왔을 뿐, 각 세력의 분쟁에 가담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공격을 받는 경우는 드뭅니다. 현재 상회는 여전히 곡양성에서 장사를 하고 있으며, 서 대사님도 그곳에 계시지요.”
사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사실 오늘 이곳에 온 것은 경매에 대해 묻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전에 부탁한 일이 잘 완수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석목은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천오상회의 배후 세력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선 이곳에서 차 한잔 하시면서 기다리시지요.”
사 사장이 고개를 끄덕인 뒤 석목의 주황색 옥패를 가지고 나갔다.
석목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후, 사 사장이 다시 돌아왔다.
“제가 의뢰한 일은 잘 완수되었나요?”
석목이 물었다.
“이전에 부탁한 일이 종수라는 여인에게 편지를 건네주는 것이었죠?”
사 사장이 물었다.
“맞습니다.”
석목이 대답했다.
“그 편지는 잘 전해졌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사 사장이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종수가 전쟁에 휘말리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현재 상태가 어떤지도 알아봐줄 수 있습니까?”
석목이 말했다.
“그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째서인지 상회에서 그녀의 정보에 대한 접근을 막아놓았습니다.”
사 사장이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저 역시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 사장이 말했다.
석목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장의 태도로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회에서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보통 어떤 상황에서 특정한 사람에 대한 정보를 막나요?”
석목이 잠깐 침묵하다가 물었다.
“이런 상황은 극히 드물어서 저 역시 처음 접해봅니다. 하지만 종수라는 여인의 생명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상회에 관련된 일에 연루가 된 경우에 정보가 봉쇄되곤 합니다.”
사 사장이 말했다.
“그럼 그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영석은 필요한 만큼 지불할 수 있습니다.”
석목이 물었다.
“불가능합니다. 봉쇄된 정보는 아무리 많은 영석을 지불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사 사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겠습니다. 영석이 얼마가 필요하든 상관없으니, 추후에 상황에 변화가 생긴다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석목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참, 상회에서 개최하는 경매는 이틀 후에 열립니다. 흥미가 있다면 참가하셔도 좋아요. 여기 통행증입니다.”
사 사장이 석목에게 금색 종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경매에 상급 원숭이 요수의 정혈이 나오나요?”
종이를 받아 든 석목이 물었다.
“이번 경매물품 명단은 전부 봤지만 그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원하는 물품이 없다면 경매에는 참가할 필요가 없었다. 석목은 몸을 일으켜 떠나려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다시 물었다.
“혹시 한 가지 일을 부탁할 수 있을까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가능한 일이라면 돕도록 하겠습니다.”
사 사장이 말했다.
“일강성에서 화실을 한 곳 빌리고 싶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화실이요? 화실은 열사부족과 명월교가 통제하고 있습니다. 우리 천오상회는 일강성에서 무기 제작이나 연단을 하지 않아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군요.”
사 사장이 미안하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천오상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더니, 어째서 물어보는 것마다 전부 안 된다는 거야?”
석목의 어깨에 조용히 앉아 있던 채아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사 사장이 놀란 표정으로 채아를 보더니 물었다.
“화실을 이용하려는 용도가 무엇이지요?”
“제가 수련하는 심법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화령지가 필요해서, 화실을 하나 빌리려고 했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그런 것이라면 제게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사 사장이 말했다.
“어떤 방법이죠?”
석목이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사 사장은 방을 나갔다가 일 각 뒤에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낡은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이걸 보시죠.”
표지에 ‘기문진도(奇门阵图)’라는 제목이 쓰여 있는 그 책에는 여러 가지 진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대량의 화강석(火罡石)과 화속성 영석을 함께 사용해서 불의 기운이 짙은 환경을 만들 수 있는 영화진이라는 진법도 있었다.
“이 진법은 상회의 한 선배가 화속성 영초를 배양하기 위한 환경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연구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모되는 자원이 너무나 많아서 결국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귀하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사 사장이 말했다.
“이 영화진은 확실히 쓸모가 있겠군요. 이 책은 영석 몇 개로 살 수 있죠?”
“그 책에 기록된 진법들은 인기가 없어서 몇 년 동안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원한다면 영석 오백 개에 드리겠습니다.”
사 사장이 말했다.
석목은 흔쾌히 영석을 지불하고 천오보헌을 떠나 거처로 돌아왔다. 그는 책을 보며 영화진의 사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진법에 필요한 화강석과 화속성 영석의 수량은 확실히 천문학적이었지만, 그만큼 짙은 농도의 불의 기운을 가진 화령지가 만들어졌다.
석목은 화속성 영석을 꽤나 가지고 있긴 했지만, 진법을 만드는데 필요한 양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진법의 안정성을 더해주고 불의 기운이 소실되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화강석은 가격이 비싸지 않았으나, 상당히 많은 영석을 들여야만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엄청난 양의 화속성의 영석이 필요했기에,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화속성 영석을 사용한다 해도 오랜 시간 진법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에 갇혀 있어야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 지금, 적원화경 9단계에 오를 수 있다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진법을 설치하는데 적합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이틀 후, 석목은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외진 곳에 위치한 조용한 저택을 알아보았다.
성의 북쪽에 위치한 이 저택은 면적이 매우 넓었지만, 가격은 꽤 저렴했다.
“이 집은 고객님이 요구하는 조건을 전부 충족한 곳입니다. 외진 곳에 위치해 절대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중개를 하는 회색 옷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석목은 허름한 저택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했기 때문에 외진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으로 하지요.”
석목이 영석을 지불하자, 회색 옷을 입은 남자는 기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떠나갔다.
“석두, 왜 이런 흉가를 산 거야?”
채아가 겁에 질린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싸고 조용하잖아.”
“귀신이 있다고 하잖아, 귀신!”
“귀신이 있으면 잡으면 되지. 네가 있잖아.”
“뭐? 지금 나더러 귀신을 잡으라는 거야? 나는 안 해. 아니, 못해!”
“상관없어. 그럼 귀신이랑 함께 사는 거지 뭐. 나는 별로 신경 안 써.”
“미쳤어!”
석목은 채아를 놀리며 저택을 관찰해보았다.
이 집은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 이유 없이 실종되어서, 귀신이 사는 집이라는 소문이 있는 곳이었다.
석목은 그런 소문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겁이 많은 채아는 두려움에 떨었다.
저택은 남향으로 구조가 정사각형이었다. 조금 허름하지만 겉으로 봤을 때는 전혀 문제가 없이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마당에 들어가는 순간 서늘한 기운이 엄습했다. 석목이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보는 사이 채아가 갑작스럽게 소리쳤다.
“엄마야!”
“무슨 일이야?”
석목이 물었다.
“석두, 저……저기 저 건물이 무언가 이상한 것 같아.”
채아가 마당 동남쪽의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을 본 석목은 살짝 동요했다.
그곳은 다른 건물과 확연히 다른 구조였고, 문이 잠겨 있어서 무언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석목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정신력으로 주위를 감지해보았다. 공기 중의 서늘한 기운은 바로 그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석두, 나……나는 망을 볼게!”
석목이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채아가 다급히 날개를 퍼덕이며 높은 나무 위로 날아갔다.
석목은 문으로 다가가서 가볍게 당겨보았다. 그러자 자물쇠가 떨어지며 문이 열리는 동시에, 이전보다 더욱 차가운 기운이 엄습했다.
누추해 보이는 건물 내부에는 다른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석목은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서 한 바퀴 돌아보다가, 갑자기 입을 벌렸다.
석목의 입에서 조그만 금전검이 나와서 방의 한쪽 바닥을 가격했다.
쾅!
돌바닥이 깨지며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그곳에서 전보다 더 차가운 기운이 솟아올라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석목은 구멍으로 다가가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 아래는 어두웠지만, 그런 것은 석목에게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이 금색으로 변하자 매우 넓은 지하 공간이 뚜렷하게 보였다.
석목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느 곳의 지하를 뚫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숨겨진 공간을 찾아낸 것이다. 만약 조사를 해보고 문제만 없다면 수고를 많이 덜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