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숨겨진 동굴
석목은 지하의 석실로 뛰어 내려갔다. 그러자 뼈까지 시리는 차가운 공기가 사방에서 몰려왔다. 공기 중에는 옅은 피비린내도 조금 섞여 있었다.
석목이 전신을 붉은 빛으로 감싸자 그제야 추위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곳의 기이한 환경은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였다.
석목이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자 갑작스럽게 지면이 갈라지더니 핏빛 덩굴이 솟아나왔다.
덩굴은 미처 피하지 못한 석목의 발목을 휘감아서 강하게 잡아끌었다.
석목은 잠시 몸을 비틀거렸지만, 당황하지 않고 두 발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몸은 더 이상 꼼짝도 하지 않았다.
휙! 휙! 휙!
그 순간 지면이 흔들리더니 여덟 개의 핏빛 덩굴이 더 솟아나와 석목에게 달려들었다.
석목은 여전히 두 발에 힘을 꽉 준 채로 손가락을 튕겼다.
금전검이 석목의 주위를 빠르게 한 바퀴 돌자 그의 두 발을 휘감은 덩굴과 날아들던 핏빛 덩굴이 전부 잘려나갔다. 덩굴의 절단면에서 마치 피 같은 선홍빛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바로 그때, 바닥에서 굉음과 함께 오륙십 개의 덩굴이 솟아나와 석목에게 몰려왔다.
석목이 수인을 맺으며 법결을 외우자 갑자기 금전검이 문짝 만하게 커지더니 금빛 검영을 사방으로 뿌렸다.
푹! 푹!
금빛 검영이 지나간 곳마다 핏빛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덩굴들은 석목에게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죄다 절단되어 바닥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석목이 안심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지하실의 지면이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바닥이 붕괴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석목은 아래로 추락하다가 재빨리 푸른 옥북을 소환했다.
그러나 석목은 이미 깊은 곳에 있는 지하 동굴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곳 주위의 한기는 너무 강력해서, 진기를 몸에 둘렀음에도 찬 기운이 피부로 스며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석목은 동굴의 벽에 거대한 핏빛 등나무 요물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크기가 수십 장에 달하는 핏빛 요물은 전신에 백 개가 넘는 덩굴 촉수가 자라 있었다. 몸의 중심에는 핏빛 꽃송이가 여러 개 피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동그랗게 이빨이 자라 있었다.
요물의 촉수는 이미 금전검에 의해 절반 가까이 끊어져 있었으며, 절단면에서 핏빛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요물이 옅은 푸른색 눈을 떴고, 그것은 허공에 떠 있는 석목을 흉흉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요물이 비명을 지르며 석목에게 핏빛 꽃잎을 화살처럼 쏘았다.
살짝 놀란 석목은 금전검으로 금색 검영을 그물처럼 교차해 몸 앞을 막았다.
핏빛 꽃잎들은 금빛 검망과 닿는 순간 조각나며 허공에 피의 비를 뿌렸다.
석목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영기를 대부분 회복한 금전검의 위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발아래 지면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리더니 몇 장 크기의 핏빛 화관 세 개가 지면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커다란 이빨로 석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화관과 연결된 두꺼운 핏빛 덩굴은 지면 아래의 어딘가와 이어져 있었다.
석목은 덤덤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몸 앞에 맷돌만한 거대 화염구가 세 개 나타나서 화관들을 향해 날아갔다.
화관은 화염구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다급히 피했지만, 화염구는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화관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쾅!
화관과 화염구가 충돌했다. 세 개의 화관은 화염구에 의해 처참하게 타버렸다.
그와 동시에 석목이 손짓을 하자, 금전검이 질풍 같은 속도로 등나무 요물의 본체를 향해 날아갔다.
놀란 요물은 남은 모든 덩굴로 금전검을 막는 한편, 핏빛 안개의 장막을 만들어 몸을 보호했다.
그러나 석목이 코웃음을 치며 두 손을 연달아 휘두르자, 금전검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더니 순식간에 덩굴 속을 파고들어갔다.
뒤이어 금빛이 터져 나오면서 핏빛 액체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토막 난 핏빛 등나무 요물의 촉수와 본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들은 잠시 꿈틀거리다가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석목이 천천히 내려가서 살펴보자, 핏빛 등나무 주위 갈라진 바닥의 틈 사이에 수많은 백골이 있었다. 인간과 요수의 것이 모두 있었지만, 대부분은 인간의 것이었다.
귀신의 집이라는 소문은 아무래도 이 요물이 이곳에서 사람을 사냥하는 바람에 퍼진 것 같았다.
요물은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습격하면 일반적인 선천무인이나 성계술사마저 죽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후천 이하의 보통 무인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석목은 한숨을 쉬며 해골들을 수습해 묻어주었다. 그리고 동굴 깊은 곳을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매우 깊어 보이는 이 동굴은 천연 동굴인 것 같았으며, 벽에서 옅은 녹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석목은 눈빛을 반짝이며 석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이곳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구불구불한 지하 동굴은 앞으로 걸어갈수록 점점 넓어졌으며, 삼십 장 가까이 걸어가자 몇 평 넓이의 막다른 공간이 나타났다.
석목은 그 공간을 둘러본 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곳의 중앙에는 원형 돌탁자 하나와 조잡한 돌의자 몇 개가 있었는데, 해골 한 구가 탁자에 엎드려 있었다.
그 해골은 골격을 보아하니 생전에 덩치가 매우 컸던 것 같았다. 이미 죽긴 했지만, 몸에서는 여전히 우뚝 선 산봉우리처럼 웅장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해골이 입고 있는 녹색 망토도 많이 낡았음에도 여전히 녹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던 석목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해골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고, 석목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해골을 위아래로 관찰했다.
해골이 입고 있는 다른 옷은 전부 썩어 문드러지고 녹색 망토만 남아 있었다.
그 망토에는 커다란 구멍이 몇 개 나 있었는데, 구멍의 위치는 해골의 가슴과 복부의 골절된 부위와 일치했다. 즉, 해골은 생전에 몸을 관통당하는 치명상을 입고 죽은 것이 분명해보였다.
석목은 해골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정신력을 발산했다. 그러나 순간 알 수 없는 부드러운 힘에 의해 정신력이 망토를 비껴갔다.
놀란 석목은 녹색 망토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손에 닿는 느낌이 마치 액체처럼 미끌미끌하고 차가웠다.
석목은 크게 기뻐했다. 정신력을 밀어내는 기능을 가진 망토는 굉장히 귀한 물건임이 분명했다. 망토를 입고 몸을 가리는 것만으로 상대의 정신력 탐지를 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망토에 구멍이 나 있어서 수선을 하기 전에는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수선할 곳을 알아봐야겠군.”
석목은 안타까운 듯 혼잣말을 한 뒤, 망토를 진묘계에 넣고 다시 해골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망토에 가려져 있어서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해골의 손에는 갓난아이의 주먹만 한 크기의 암홍색 수정이 쥐어져 있었다.
석목이 손을 뻗자 수정이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수정은 원뿔형 모양이었으며, 표면에는 괴상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수정의 내부에서 붉은 번개 같은 것들이 연달아 내리치는 것으로 보아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수정의 가장 꼭대기에는 고체(古体)로 ‘삼(三)’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마치 평범한 수정처럼 어떤 기운이나 법력의 파동 같은 건 전혀 뿜어내지 않았다.
석목은 수정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한참을 자세히 관찰하다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는 수정에 법력과 진기를 주입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특별한 점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해골이 죽을 때까지 손에 꽉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물건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석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정을 챙겨 넣었다. 여유가 있을 때 다시 천천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망토와 수정을 제외하면 해골의 주위에는 더 이상 주의 깊게 볼만한 물건은 없었다.
석목은 해골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소지품을 챙겨가는 대가로 해골을 잘 묻어줘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붉은 빛을 날려 해골을 감쌌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 올리려 해도 해골은 살짝 흔들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석목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해골은 외관상으로는 전혀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으나, 무게가 오백 근은 되는 것 같았다.
석목이 힘을 더하자 그제야 해골이 들렸다.
다시 그 해골을 관찰하던 석목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방금 전까지 그의 관심은 녹색 망토와 암홍색 수정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해골을 다시 자세히 보니 뼈에서 금속처럼 매끄럽고 은은한 광택이 흘렀다.
땅! 땅!
석목운 손가락으로 해골을 가볍게 두드려보았다. 마치 철판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석목은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붉은 빛이 날아가 해골의 대퇴골을 가격했다.
깡!
붉은 빛은 해골에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석목은 살짝 놀랐다. 비록 방금 일격은 대충 날린 것이긴 해도 평범한 철 막대기 정도는 자를 수 있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도 해골에는 조금의 흔적도 남지 않은 것이다.
석목은 잠시 고민하다가 해골을 진묘계에 넣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석목은 지하 동굴을 돌아보았다.
지하 깊은 곳에 위치한 이곳은 공간의 크기도 적당해서 화령지로 만들기에 매우 좋은 것 같았다.
“석두, 내려간 지가 언젠데 이제야 나오는 거야? 아래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찾으러 내려가던 참이었어!”
석목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 채아가 날개를 퍼덕이며 다가왔다.
“아래에 있는 귀신이 무서운 거 아니었어?”
석목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건……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귀신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이기지 못하면 날아서 도망가도 되잖아. 너는 날개가 있으니까. 참, 귀신도 날 수가 있나?”
채아가 귀신이라는 말을 듣고 당황한 표정으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석목은 웃으면서 채아에게 아래에서 일어난 일들을 간단히 설명해줬다.
“아래에 화요(花妖)가 숨어 있었구나. 정말 귀신인 줄 알고 놀랐네.”
채아가 심호흡을 하며 한쪽 날개로 가슴을 쓰다듬었다.
“이곳은 외진 곳이니 실력이 있는 사람들은 잘 오지 않았을 거야. 그 덕분에 많은 사람을 잡아먹은 화요가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을 테지. 만약 그대로 놔뒀다면 지계 등급의 요물이 됐을지도 몰라.”
석목이 말했다.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나대다가 결국 죽었구나!”
채아가 말했다.
“지하 동굴을 화령지로 만들면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될 일은 없을 것 같아.”
석목이 말했다.
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를 정했으니 화강석과 화속성 영석을 구하러 가자.”
* * *
이후 석목은 보름 가까이 일강성 곳곳을 다니며 화강석을 사들였다. 또 가지고 있던 영석을 화속성 영석으로 교환했다.
평범한 오행영석(五行灵石) 중의 하나인 화속성 영석은 수수료만 조금 지급하면 필요한 양을 교환할 수 있었다. 화강석도 특별히 희소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석목이 필요로 하는 양은 많고 성이 봉쇄되다시피 해서 많은 돈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석목은 천오보헌과의 거래를 통해 시가보다 삼 할 비싼 가격으로 거래를 해서 필요한 화강석을 전부 모았다. 결국 그가 지금까지 모아온 수만 개의 영석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