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돌파
일강성의 사람들은 나날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오규의 지시에 따라 여전히 많은 요수가 성 밖을 끊임없이 배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목은 영화진을 설치하는데 힘을 쏟느라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다.
지하 동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공간의 지면과 벽에는 수많은 화강석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화강석의 표면에는 붉은 무늬가 새겨져서 커다랗고 심오한 하나의 도안을 이루고 있었다.
공간의 중앙에는 화강석의 도안과 이어진 원형 진법이 그려져 있었다. 진법의 곳곳에는 수백 개의 화속성 영석이 박혀 있었다.
석목은 진법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중급 화속성 영석을 바닥에 꽂았다.
웅-.
진법의 중앙에서부터 눈부신 붉은 빛이 퍼졌다. 빛은 도안을 따라 한 바퀴 돌더니 사라졌다.
영화진의 설치를 성공적으로 마친 석목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너처럼 잔챙이 진법사도 스스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진법이네. 다만 진법의 설계 자체가 조잡해서 불필요하게 많은 영석이 들어.”
채아가 커다란 돌 옆에 서서 말했다.
“채아, 영석을 아낄 수 있도록 진법을 손봐주는 게 어때? 그러면 아낀 영석을 전부 줄 테니까.”
“그런 거 할 줄 몰라.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어.”
채아가 말했다.
석목은 채아를 한 번 노려본 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수인을 맺었다.
웅-.
진동음과 함께 영화진이 가동됐다. 이어 지면의 화속성 영석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와 모든 공간을 붉은 빛으로 뒤덮었다.
순간 공기 중에 화속성 기운이 가득해졌고, 지하 공간이 통째로 뜨거운 화산 속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이전의 화령산맥보다는 조금 부족했으나 그 차이가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 꽂힌 화속성 영석이 닳는 속도로 봐서는 진법은 나흘이나 닷새 정도밖에 유지되지 않을 것 같았다.
석목이 씁쓸하게 웃으며 진묘계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준비한 화속성 영석으로는 진법을 네다섯 번밖에 가동할 수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 마신 석목이 눈을 감고 적원화경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짙은 화속성 원기가 그의 체내로 밀려들어와 경맥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석목이 화원도과를 하나 꺼내서 먹자 그의 주위로 붉은 빛이 모여들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열흘이 지났다.
석목은 동굴의 진법 중앙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의 몸속에서는 진기가 거의 정점에 달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석목은 화원도왕을 꺼내 먹어치웠다.
도왕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단전에서 뜨거운 열기가 넘실거리더니, 석목의 몸에서 적자(赤紫)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진기가 경맥을 따라 흐르기 시작하더니 그 흐름이 점점 거세져서 마치 성난 파도처럼 변했다.
그러자 칼에 난도질을 당하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이 체내의 경맥에서 느껴졌다.
석목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가까스로 체내의 기혈을 안정시켰고, 적원화경의 9단계 법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단전의 진기가 빠르게 증가했다. 이어 단전에서 넘쳐흐른 진기가 전신 곳곳으로 급류처럼 밀려들어갔다.
시간이 흐르자 영화진의 붉은 빛이 불안정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땀을 비오듯 흘리는 석목의 피부는 이제 적자색으로 변해 있었다. 전신의 경맥과 단전의 충만한 진기는 임계점에 달한 듯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석목이 눈을 번쩍 뜨자, 그의 몸에서 강하게 터져나온 적자색 빛이 그의 몸을 완전히 덮었다.
한참 후 석목의 시원한 고함소리가 지하 깊은 곳에서 메아리쳤다.
주위의 진법이 마치 그 영향을 받은 것처럼 더욱 밝아졌다. 붉은 빛은 바다에 합쳐지는 거센 강물처럼 석목의 체내로 밀려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점차 강해졌다.
주위에 있던 채아는 강력한 기류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며 멀리 날아갔다.
* * *
석목의 상태는 무려 사흘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사흘이 지난 뒤 붉은 빛이 점차 어두워지며, 그 안에서 석목의 모습이 드러났다.
석목의 몸은 마치 막 물에서 건져진 것처럼 완전히 젖어 있었고, 얼굴에는 흥분이 가득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결국 적원화경 8단계를 돌파하고 9단계에 오른 것이다.
석목의 기부에 가득 차 있는 진기는 거의 액체처럼 농밀해졌고, 이전과 비교해 거의 두 배 가까운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는 석목이 정식으로 선천후기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을 의미했다.
석목은 동굴 밖에 있는 저택의 마당으로 나왔다.
그의 시선이 마당 한쪽 구석에 있는 검은 석조건물에 고정됐다.
석목은 건물에 다가가서 돌연 체내의 진기를 끌어올리며 주먹을 내뻗었다. 붉은 화염이 감도는 권영이 생겨나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앞으로 날아갔다.
쾅!
권영과 충돌한 건물의 벽면과 그 맞은편에 몇 장 크기의 거대한 구멍이 생겼고, 검은 돌조각이 사방으로 날렸다.
석목은 선천후기의 경지에 오르며 비약적으로 강해진 힘을 느끼고 기뻐했다. 진기를 살짝 주입해 날린 권영만으로 강철같이 단단한 두꺼운 벽을 뚫은 것이다.
그때 석목은 무언가를 느끼는 듯 갑자기 눈을 감았다. 그는 잠시 후 다시 눈을 뜨며 무언가를 읊조렸다.
뒤이어 앞쪽 허공에 붉은 빛이 반짝이더니, 세숫대야만한 크기의 화염구 여섯 개가 나타나 건물을 향해 유성처럼 날아갔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화염이 솟아올랐다.
건물이 격렬하게 진동했고, 화염에 휩싸인 돌조각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만신창이가 된 건물은 잠시 버티다가 결국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광경을 본 석목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법력은 늘지 않았지만 화염구의 위력은 이전보다 강해졌다. 적원화경이 9단계에 오르며 화속성 원소에 대한 친화력이 상당히 증가한 덕분이었다. 현재 거의 6급에 도달한 화속성 친화력은 이미 공간 친화력을 뛰어넘었다.
석목은 이제 눈만 감아도 공기 중에 내포된 화속성 원소가 뚜렷하게 느껴졌다. 또 그것을 진기 혹은 법력에 자유자재로 담아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석목이 이렇게 성공적으로 벽을 무너뜨리고 경지를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은 화원도왕 덕분이었다. 과연 지계의 강자들이 필사적으로 달려들 만큼 효과가 탁월했다.
“석두, 상당히 강해졌네!”
바로 그때, 채아가 멀리서 날아오며 말했다.
채아는 석목이 지하에서 수련을 하는 동안 너무 심심한 나머지, 자진해서 성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상황이 어때?”
석목이 물었다.
“오규는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의 수하들은 여전히 성 주위를 배회하고 있대.”
채아가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려 지하 동굴로 내려갔다.
잠시 후, 석목은 영화진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수련을 하는 동안 이미 영화진의 영석을 여러 차례 갈아 끼웠다. 지금 진법에 꽂혀 있는 것들이 그에게 남은 마지막 영석인데, 그마저도 대부분의 영력이 소모되어 상당히 어두운 색으로 변해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성에서 머물며 수련하기 위해서는 화속성 영석을 더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석목은 진묘계 안의 물건들을 들여다보았다. 영석과 교환할만한 물건은 이전에 얻은 영기, 영초, 영약, 광석 등이 있었다.
이중에서 영기 몇 개를 제외하면, 팔아치운다 해도 많은 영석을 확보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영기들은 그의 실력을 높여줄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석목은 지금 그것을 팔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석목은 진묘계에서 요수의 가죽을 한 뭉치 발견했다.
지금으로서는 이전에 썼던 방법을 되풀이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부적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곳은 동주대륙이 아니니 그는 우선 시장의 상황을 파악한 뒤 결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석두, 나가려고?”
채아가 물었다.
“응, 할 일이 있어.”
저택을 나선 석목은 금세 상점 거리에 도착해 가게들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저녁이 되어서야 거리를 벗어났고, 다시 성의 북쪽에 위치한 저택으로 향했다.
이제 그의 진묘계에는 가죽 부적지와 상급 부적 제작을 위한 재료가 채워져 있었다.
그 동안 석목은 가게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고, 부적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서하대륙에서는 요족과 야만족의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때문에 전투에서 생존 확률을 높여주는 부적은 야만족 사이에서 언제나 인기가 많았다.
그에 반해 부적술에 재능을 가진 야만인은 적었고, 그래서 부적은 언제나 부족했으며 매우 비싼 값에 거래됐다.
하지만 명월서교의 출현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제자 대부분이 혼사인 명월서교에는 부적술에 재능을 가진 이가 야만족보다 훨씬 많았다. 따라서 현재 서하대륙의 야만족들이 구매하는 부적은 대부분 명월교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또 대륙 전반에 공급되는 부적의 수량과 가격도 명월교에 의해 결정됐다.
시장에서 유통되는 부적은 보통 중하급 부적이었는데, 가격은 동주대륙의 열 배에 달했다. 상급 부적은 매우 귀해서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었으며, 일단 시장에 나타나면 대규모의 야만족 부족에서 서로 앞 다투어 구매했다.
지금은 특히 요수에게 성이 포위된 뒤로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부적에 대한 수요도 계속 늘고 있었기 때문에, 중고급 부적을 제작해 판매한다면 앞으로 한동안 영화진을 가동하기에 충분한 영석을 벌 수 있을 것이었다.
석목은 거리를 걷다가 앞쪽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갔다. 그곳은 관저 앞 게시판이 설치된 장소였는데,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새로운 공고가 붙은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인파를 뚫고 게시판에 다가간 석목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게시판에는 적환요망을 죽인 자에게 현상금을 건다는 내용의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석두…….”
채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석목은 마치 공고를 보지 못한 것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서서, 주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현상금이 걸린 이유인즉 다음과 같았다. 소규교수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성 주위를 포위하는 바람에 일강성 운영에 커다란 차질이 빚어졌다. 그래서 성주 유찬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원흉을 잡아 사건을 일단락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공고문을 잠시 지켜보던 석목은 인파 속에서 빠져나와 거처로 향했다.
* * *
닷새 뒤, 석목이 지내고 있는 저택의 방 안.
석목은 살짝 피곤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쌓인 부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의 부적들은 석목이 닷새 밤낮으로 제작한 총 사십여 장의 중급 부적이었다.
비록 금강부나 화모부(火矛符: 화염창을 소환하는 공격 부적)처럼 동주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급 부적이었지만, 서하대륙의 다른 토템부적들과 비교하면 몇 배는 뛰어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석목은 그 부적들을 모두 챙겨 밖으로 나갔다.
반나절 후, 석목이 다시 거처로 돌아왔을 때는 부적을 전부 판매한 뒤였다.
그는 부적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사들인 비용을 제외하고도 삼사천 개의 영석을 벌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한 달만 계속한다면 영석 이만 개는 충분히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석목은 천오보헌에는 부적을 팔지 않았다. 천오상회의 세력은 너무 컸다. 그래서 석목은 무의식중에 그들과 거리를 두고 싶어 했고, 자신의 비밀을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예전에 자신에게 능천봉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 가게에 모든 부적을 팔았다. 그 가게의 점주인 예납목의 인상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목은 먼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유출시키지 않겠다는 약속, 그리고 화속성 영석과 각종 부적 제작을 위한 재료를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앞으로 제작하는 모든 부적을 그곳에 팔기로 했다.
예납목에게 재료를 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고, 신분을 숨기는 것은 오히려 그 자신이 바라던 바였다. 석목이 부적술사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영석을 벌 기회를 다른 가게에 뺏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