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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238화 (238/916)

석목은 고개를 끄덕인 뒤 천오보헌을 떠났다.238화. 고백을 받다

“석두, 호송에 참여할 생각이야?”

천오보헌을 나온 채아가 물었다.

“우선 가서 공고를 보자.”

잠시 후, 둘은 관저 앞 게시판 근처에 도착했다.

“와, 사람이 정말 많네!”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본 채아가 말했다.

게시판 가운데 공고가 하나 걸려 있었으며, 그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석목은 인파를 향해 가며 시력을 집중했다. 그러자 천오상회가 선천 토템용사와 성계술사를 모집한다는 내용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 달에 보수가 영석 천 개야!”

인파 속에서 흥분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엄청난 보수군……. 역시나 천오보헌의 재력은 대단하구나!”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성주 어르신 휘하의 가장 강한 장수 능서도 동행할 뿐 아니라, 천오상회에서 월계술사도 파견한다고 하던데. 얼마나 중요한 물건을 옮기는 것이지?”

“성 밖에는 아직 요수가 판치고 있다고 하더군. 혼자서는 일강성을 벗어나기 힘들겠지만, 그 두 사람이 함께하는 호송 임무에 참여하면 안전하게 성을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일리가 있는 말이군. 영석도 천 개나 준다고 하니 어서 지원하자고.”

호위 임무에는 선천 혹은 성계 이상이라는 제한이 있다보니, 지원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은 많은 사람의 부러운 눈빛을 받았다.

석목은 인파 사이에서 잠시 서 있다가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성을 나서서 서쪽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던 그는, 사 사장의 말대로 천오상회와 함께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대륙의 서쪽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창욱성은 혼자 이동한다 해도 어차피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석목은 접수처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도착한 순서대로 줄을 서세요! 거기 그쪽 말하는 겁니다! 모두 신청할 수 있으니 순서를 기다려요!”

파란 옷을 입은 남자가 소리쳤다.

“겨우 사십 명 아닙니까?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모두 신청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인파 속에서 누군가 질문했다.

“크흠, 이번 호송 임무는 사십 명만 모집하지만, 지원자가 많은 것을 감안해 공평하게 비무대회를 개최할 것입니다. 승자에게는 호송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질 겁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 떠들썩해졌다.

“시합은 사흘 후에 거행할 것입니다. 장소는 내일 이 자리에서 공표합니다.”

사흘 후, 호송 임무의 선발 시합이 시작되었다. 장소는 일강성 서쪽에 위치한 연무대였다.

비록 작은 규모의 시합이었지만, 참가자들 모두 선천무인 혹은 성계술사 이상인 만큼 성 안의 많은 이가 구경을 하러 몰려들었다.

석목은 연무장의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그는 주위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기운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여느 선천초기의 무인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만약 상대의 정신력이 석목을 훨씬 뛰어넘지 않는 이상, 그의 진정한 실력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무공과 술법을 동시에 수련한 자의 정신력은 기본적으로 평범한 무인보다 강했다. 석목은 정신력을 강화시켜주는 온신술과 통천어령결을 수련한 덕에 정신력이 지계초기의 수준에 달했으며, 일반적인 월계술사보다 조금 낮은 정도였다.

그럼에도 석목이 지닌 숨길 수 없는 특유의 거친 분위기는 많은 이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그의 경지가 높지 않다는 것을 안 사람들 결국 그를 무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합이 열리는 시간이 다가오며 참가자들이 속속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 중에는 선천중기와 후기가 가장 많았고, 성계술사도 몇 명 있었다.

그때 시합의 진행을 맡은 천오보헌의 사 사장이 연무장 중앙에 위치한 단상으로 올라가 외쳤다.

“시간이 다 됐으니…….”

그 순간, 인파 사이에서 한 여인이 연무대 위로 뛰어올라왔다.

그녀는 푸른 산 같은 비취색의 눈썹 아래 티 없이 맑고 커다란 눈, 그리고 뽀얀 피부를 가진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몸매를 부각시키는 귤색 옷을 입고 있었다.

모두 그녀의 외모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여인이 사 사장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영월동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 사장은 그녀를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규칙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번 선발 시합에 지원한 사람은 총 팔십오 명, 실제로 온 사람은 칠십팔 명입니다. 일부터 사십까지의 숫자 중 같은 숫자를 뽑은 사람끼리 대결을 하게 될 것이며, 승리자에게는 호송 임무 참여 자격이 주어질 겁니다. 그중 삼십구 번과 사십 번을 뽑은 사람 두 명은 대결 없이 즉시 합격하게 됩니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사 사장이 팔을 휘두르자 파란 옷을 입은 남자가 걸어와서 중앙의 단상 위에 상자를 옮겨놓았다. 그 상자 안에는 반으로 접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석목이 상자에서 종이를 뽑아 막 펼치려 할 때, 귓가에 갑자기 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두, 나 저 여자 알아!”

채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들갑을 떨었다.

“공공장소니까 조용히 좀 해!”

석목이 말했다.

“진짜야. 저 여자를 빨리 봐! 성에 처음 들어왔을 때 길에서 네게 뜨거운 눈빛을 보내던 그 여자야!”

채아가 날개로 석목의 목을 비비며 말했다.

고개를 든 석목은 채아가 가리키는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연무장에 가장 늦게 도착한 영월동이었다.

석목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언제 그녀를 만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채아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벌써 영월동의 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나 알아보겠어요?”

채아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석목에게 꿀밤을 맞았다.

“석두, 무슨 짓이야?”

채아가 기분이 상한 듯 말했다.

갑작스럽게 말을 거는 채아를 신기한 눈으로 보던 여인은, 갑작스럽게 옆에 나타난 석목을 발견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이군요!”

영월동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때는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봤죠. 이렇게 또 만나다니 이것이 바로 인연인…….”

채아가 옆에서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이 앵무새는 당신 것인가요?”

영월동이 옆에서 떠드는 채아를 재미있다는 듯 보다가 고개를 돌려 석목에게 물었다.

“저 아이는 천성적으로 헛소리를 많이 하니 너그럽게 봐주세요.”

석목이 채아를 밀어내며 말했다.

“석두, 저렇게 예쁜데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거야?”

채아는 석목에게 밀려나면서도 입을 멈추지 않았다.

“시끄러워!”

석목이 다시 채아의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아야, 아파! 좀 살살 때리면 안 돼?”

채아가 투덜거렸다.

주위의 시합 참가자들은 그들의 모습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일강성 내에 영월동 만큼 아름다운 야만족 여인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석목은 모두의 부러움을 살 수 밖에 없었다.

한 선천후기의 강자는 그 모습을 보고 영월동에게 말을 걸었으나 차갑게 무시당했다. 화가 난 그는 고작 선천초기에 불과한 석목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제 막 선천의 경지에 오른 놈이 이 몸의 여자를 탐내다니, 삶에 싫증이 났나보구나.”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크게 소리를 지르자 주위에서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 형, 저 애송이에게 매운 맛을 보여주죠.”

“맞습니다. 저 기고만장한 모습은 꼴도 보기 싫군요.”

“…….”

석목은 그 말들을 듣지 못한 듯, 그들을 바라보지도 않고 파란 옷을 입은 남자에게 걸어가 자신의 번호를 건넸다. 그의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더욱 크게 분노했다.

시합은 규칙에 따라 일 번을 뽑은 사람부터 차례로 진행됐다. 작은 연무장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석목은 채아와 시야를 공유해서 십팔 번을 뽑은 자신의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 상대는 방금 그 고 씨 성의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석목은 속으로 냉소를 하면서도 티내지 않고 연무대 위로 올랐다.

남자는 주위의 몇몇 지지자를 한 번 본 뒤, 웃으며 연무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연무대 아래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 고 씨 성의 남자는 선천후기의 강자로, 일강성 내에는 그의 적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고작 선천초기의 무인인 석목이 당연히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영월동만이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연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상대를 무찌른 그녀는 임무에 참여할 자격을 얻었지만, 크게 기뻐 보이지 않았다.

“애송아, 기회를 주마. 여기서 이 몸에게 세 번 절을 하면 불구는 만들지 않겠다.”

남자가 석목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다시 아래의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웃기 시작했다.

“더 할 말이 있나?”

석목이 주먹을 쥔 자신의 오른손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죽어라!”

남자의 몸이 녹색 빛으로 반짝이더니 덩치가 한층 더 커켰다. 그가 낭아봉을 맹렬하게 휘두르자 선천후기의 위압감이 엄습했다.

쾅!

낭아봉이 석목을 가르고 지나가는 순간 그의 몸이 흩어져 사라졌다. 잔영이었다.

어느새 남자에게 다가간 석목의 본체가 그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퍽!

“악!”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연무대 밖으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남자는 가슴뼈가 함몰되어 피를 토해내고 있었고, 호흡은 숨이 곧 넘어갈 듯 약했다.

장내는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모두가 놀란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이 가만히 서서 사 사장을 바라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 사장이 큰 소리로 목석의 승리를 선포했다.

사 사장은 석목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파란 옷의 남자를 불러 무언가 속삭인 뒤, 계속해서 시합을 진행시켰다.

“석두, 네가 이길 줄 알았어!”

석목이 이기는 것을 본 채아가 기뻐하며 날아왔다.

“내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저 정도 실력으로 석목에게 대들다니,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다니까요.”

채아가 득의양양하게 소리쳤다.

“과연 대단하네요. 진정한 실력자는 쉽게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는다더니, 정말이군요.”

영월동이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

“부끄럽습니다.”

석목이 덤덤하게 말했다.

“우리 석두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채아가 석목을 보더니 영월동에게 꼬시듯 말했다.

“하하, 정말 재미있네. 나는 그가 좋은데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영월동이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아본 것이 처음인 석목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채아를 잡아서 하늘로 던졌다.

“저는 언제나 할 말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요. 좋으면 좋다고요. 그러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영월동이 동그란 눈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순간 말문이 막힌 석목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처음 목 오라버니를 본 순간부터 친근함을 느꼈어요. 목 오라버니도 분명 야만족과 인족의 혼혈이겠죠. 오라버니의 몸에서 저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요.”

영월동이 솔직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이 살짝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인족과 야만족의 혼혈이 굉장히 드문 동주대륙에서는 혼혈이라는 사실이 들통 나면 인족과 야만족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그런데 영월동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석목에게 자신의 비밀을 가르쳐주었다.

“뭐라고요? 인족과 야만족의 혼혈?”

채아가 놀라서 물었다.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놀라니? 인족과 야만족의 결혼은 벌써 백 년 전부터 이루어졌어. 그리고 그들의 자녀 역시 모두 인정받고 있지. 너의 석두 역시 그런 거 아니야?”

영월동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야만족도 아닌데 왜 그렇게 입은 거야?”

“내가 왜 야만족이 아니야? 나는 야만족이면서 인족이야. 그저 야만족의 복장을 더 좋아할 뿐이지. 야만족과 교류하기가 더 쉽잖아?”

영월동이 말했다.

“영 소저가 잘못 짚었습니다. 저는 소저와는 다르게 평범한 야만족이에요.”

석목은 그렇게 말을 하며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영월동은 멀어져가는 석목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재미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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