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242화 (242/916)

242화. 능염정(凌炎晶)

“능 장군, 요족들이 다시 덤벼들지도 모르니 우리 둘이 앞뒤에서 주위의 동향을 살피며 이동하죠.”

종수가 능서에게 말한 뒤 행렬의 가장 후미로 날아갔다.

능서는 살짝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청익비차를 타고 행렬의 가장 앞으로 날아가서 정신력을 주위로 발산했다.

행렬이 삼십 리 정도 더 이동했을 때 하늘에 태양이 떠올랐다. 그러자 주위의 안개가 천천히 흩어지고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석목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긴장했던 몸을 천천히 이완시켰다.

“목 오라버니, 많이 긴장했나보네요.”

영월동이 석목을 보며 말했다.

“요수와 전투를 벌일 생각을 하면 당연히 긴장이 되지요.”

석목이 말했다.

“정말 그래서인 거예요?”

영월동이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말했다.

“당연하죠. 그것 말고 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석목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전 당신의 그런 점이 좋아요.”

영월동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석목은 살짝 어이없어 하며 고개를 돌렸다.

* * *

금색 노을에 하늘이 물든 저녁 무렵.

일강성을 떠난 지 보름이 지나 행렬은 이미 수천 리를 이동했다.

계획대로라면 창욱성까지는 아직 한 달의 여정이 남아 있었다.

이동을 하는 동안 요수의 무리가 수시로 화물을 노렸지만, 대부분 선천등급의 요수에 불과했다. 지계 이상의 요수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능서와 종수는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능서가 요수에게서 나온 모든 재료는 요수를 처치한 이가 가져도 좋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모두 앞 다투어 요수와 싸웠다.

딱 한 번 어느 산골짜기를 통과하는 중에 그들을 습격한 천산갑 요수의 무리 가운데 지계의 요수가 있었지만, 종수와 능서가 힘을 합치자 황급히 달아났다.

하지만 그 전투에서 세 명의 선천 토템용사가 천산갑의 공격에 몸이 뚫려 목숨을 잃었다.

그 사건 이후로 모두가 느슨해졌던 정신을 다시 바짝 잡았다.

종수는 적과 싸울 때를 제외하고는 행렬을 엄호하기 위해 가장 뒤쪽 부운차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능서는 청익비차를 타고 행렬의 가장 앞에서 이동했다.

능서는 종수가 부운차에 머물면서 자신과 교류를 하지 않자 점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처음 종수를 보자마자 그녀의 아름다움에 깜짝 놀랐고, 그녀와 여정을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에 매우 설레었다.

하지만 능서가 말을 걸 때마다 종수의 반응은 언제나 차가웠다.

그 덕분에 최근의 무사평온한 여정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능서가 탄 청익비차가 종수가 타고 있는 부운차 옆으로 천천히 날아갔다.

행렬의 모두는 능서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았다. 그러나 그의 신분과 실력 때문에 누구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웃고 있었다.

오직 뒤에서 두 번째 부운차에 타고 있는 석목만이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목 오라버니, 능 장군이 또 종 장로에게 구애를 하려나 봅니다. 하하!”

영월동이 뒤쪽의 청익비차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석목이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종 소저, 이곳은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으로 매우 유명한 명소입니다. 석양에 비친 광경은 그야말로 절경이라고 할 수 있죠. 며칠간 바쁘게 달려오느라 종 소저도 제대로 쉬지 못했으니,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능서가 말했다.

“능 장군님의 호의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는데 다음 성까지 거리가 많이 남았습니다. 길을 재촉하지 않으면 또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종수가 쌀쌀하게 말했다.

“잠시 쉬어갈 시간 정도는 있습니다. 칼을 가는 것이 장작 패는 일을 지체시키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조금 쉬어간다면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겁니다.”

능서가 다시 권했다.

종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참, 종 소저, 지도를 보니 상은성(翔殷城)을 지난 뒤 요수들의 근거지가 몇 군데 있더군요. 안전을 위해 여러 의견을 종 소저와 나누고 싶은데, 제 비차로 넘어오지 않겠습니까?”

능서가 살짝 무안해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앞쪽의 상황은 이미 출발 전 조사를 해서 알고 있어요. 그 요수들은 우리 천오상회와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지나는데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냥 정해진 길을 따라 이동하도록 하죠.”

종수가 고개조차 들지 않고 말했다.

능서는 자신이 저자세로 다가갔음에도 종수가 전혀 여지를 주지 않자 매우 불쾌했다. 그러나 그는 성미를 누르고 웃으며 말했다.

“그…… 작고 낡은 부운차를 타느라 오랫동안 고생을 했으니 저의 비차에 와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어떤가요? 제 비차는…….”

“필요 없습니다. 능 장군은 행렬의 앞쪽을 경계해야 하니 돌아가시지요.”

능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수가 딱 잘라 거절했다.

이마에 푸른 핏줄이 솟아오른 능서는 주먹을 꽉 쥐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능 장군님, 아실 지 모르겠지만 우리 인족의 풍습은 야만족과는 다릅니다. 그런 식으로 종 장로를 계속 비차로 오라고 요청하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종수의 옆에서 녹색 옷을 입은 반반한 여인이 말했다.

“소미의 말이 맞습니다.”

파란 옷을 입은 앳된 얼굴의 소녀가 동조했다.

두 사람은 상회에서 종수를 돕기 위해 붙여준 시녀들이었다.

두 여인에게 면박을 당한 능서는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월계술사인 종수의 실력과 천오상회에서의 지위를 생각해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남몰래 종수를 흠모하고 있는 이들은 능서가 다시 한 번 곤욕을 치루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고소해했다.

종수가 능서에게서 벗어난 것을 본 석목도 살짝 안도했다. 그 모습을 본 영월동이 질투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종 장로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어째서 다가가지 않는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죠?”

석목이 반문했다.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잘 알겠죠. 소문은 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석목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부운차의 한쪽 구석으로 가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만약 자신이 아니었다면 종수는 선인이 될 기회를 포기하면서 동주대륙 육산왕조에서 서하고국까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요수와 야만족이 판을 치는 서하대륙에서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곳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만큼, 석목은 가진 모든 힘을 다해 그녀를 보호하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분명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것이고 적은 자신을 모르고 있으니, 정체를 숨기고 있는 편이 그녀를 돕기에 더욱 좋을 것이다.

“앞쪽에서 또 적을 발견한 건가요?”

영월동은 석목이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자 그의 시선을 쫓아 앞을 보며 물었다.

“바로 앞쪽에 상은성이 있는데 적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설마 풀까지도 적으로 보일만큼 겁을 먹은 겁니까?”

석목이 말했다.

“없으면 다행이고요! 그나저나 목 오라버니는 도대체 무슨 심법을 수련했는데 시력이 그렇게 뛰어난 거예요?”

영월동이 석목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제가 수련한 것들은 전부 수준이 떨어지는 보잘 것 없는 것뿐이에요.”

석목이 말했다.

“너무 겸손하네요. 그런 것이 보잘 것 없는 재주라면 다른 능력은 얼마나 뛰어난 거예요? 그나저나 오라버니, 그 앵무새는 어디 갔죠? 오랫동안 보이지 않네요.”

영월동이 석목을 이리저리 보며 물었다.

“날개가 달려 있으니 어디론가 갔겠죠.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말을 마친 석목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영월동은 무안해하며 입술을 삐죽이더니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일행은 이후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낮에는 이동하고 밤에는 수면을 취하기를 반복했고, 작은 성 몇 개를 지나갔다. 그동안에는 어떤 특별한 일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열흘 뒤의 어느 날 밤, 깊은 숲 속.

그곳은 오소리 일족이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오소리 요수는 야생성이라 일행은 불필요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는 이동하지 않았고, 한 시진마다 열 명씩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그때 석목은 영월동이 부운차를 떠나 몰래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던 석목은 즉시 채아에게 그녀를 쫓으라고 지시했다.

영월동은 숲 속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작은 동굴로 들어가더니 하얀 수정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무언가 중얼거리자 수정에서 하얀 빛의 결정들이 뿜어져 나왔고, 그녀의 앞에 모여들어서 한 남자의 모습을 형성했다. 그 모든 광경은 채아의 시야를 통해 석목의 머릿속에 비치고 있었다.

영월동을 본 남자가 즉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외쳤다.

“일곱 번째 아가씨를 뵙습니다!”

“일어나라. 급하게 나를 보고자 한 이유가 무엇이냐?”

영월동이 평소와는 다른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께서 도망가서 크게 화가 난 교주님이 저에게 정해진 기한 안에 아가씨를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께서 직접 능염정을 찾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하는 일에 언제부터 네가 참견을 할 수 있었지? 찾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어서 꺼져!”

말을 마친 영월동은 손을 흔들어 빛을 흩어버린 뒤, 다시 부운차를 향해 몰래 이동했다.

“교주? 능염정?”

석목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 * *

시간이 흘러 순식간에 보름이 또 지났다.

그 사이에 행렬은 단 한 번도 커다란 위험을 마주치지 않았다. 비행요수의 근거지인 동윤구역에 도착한 뒤로도 아직까지 대규모 습격은 없었다,

현재 행렬은 동윤구역의 외곽지대에 있었다. 목적지인 창욱성까지 며칠 남지 않았기 때문에 행렬의 분위기는 점차 들뜨고 있었다.

같은 날 정오, 행렬은 어느 거대한 산맥 주위에 도착했다.

그 산맥의 산봉우리는 대부분이 우뚝 솟은 죽순처럼 험준했고 나무가 무성했다.

바람이 불자 산맥에서 날카롭고 청아한 백학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수는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이곳에 온 것이 처음인 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백학을 찾았다.

“전방 일대가 그 유명한 학명산맥(鹤鸣山脉)이에요. 하지만 이 소리는 진짜 학의 울음소리가 아니고, 이곳에서 자라는 특수한 식물인 학명초(鹤鸣草)가 내는 소리예요.”

영월동이 앞쪽의 산맥을 보며 말했다.

“학명산맥이라…….”

석목이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석목은 여정 중에 임무의 경로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했고, 그래서 학명산맥이 흉만 익학부족의 세력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레가 만 리가 넘는 학명산맥은 삼대 구역과 연결되는 교통 요충지로, 지형이 험준한 탓에 통행이 어려워서 산맥의 중앙에 깔린 도로로 통행을 하거나 우회해야 했다.

하지만 거대한 학명산맥을 우회하려면 몇 배나 긴 시간이 소요됐기 때문에, 많은 이가 익학부족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도 어쩔 수 없이 그 도로를 이용했다.

“모두 잘 들어라!”

푸른빛이 번쩍이며 허공에 나타난 능서가 외쳤다. 아래 있는 이들이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학명산맥의 상황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알 것이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도록! 이 산맥만 지나면 창욱성이 바로 눈앞이다!”

능서가 외쳤다.

“예!”

모두가 일제히 대답했다.

능서는 고개를 끄덕인 뒤 가장 앞으로 날아가서 행렬을 이끌고 계속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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