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초대에 응하다
건물을 나선 청년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석두,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채아가 물었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자.”
건물을 바라보던 석목이 몸을 돌려 이동했다.
일 각 후, 관저를 벗어난 석목은 방향을 확인한 뒤 객잔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석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객잔 앞에 도착했다.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석목은 빈 옥간을 꺼내서 익학부족과 명월교의 음모를 상세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석두, 어쩌려고?”
채아가 물었다.
“그들의 음모를 종수에게 알릴 거야.”
글을 다 적은 석목이 말했다.
“하지만 아직 종수에게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잖아. 그녀를 몰래 지키려던 것 아니었어? 생각이 바뀐 거야?”
채아가 물었다.
“아직 정체를 밝힐 생각은 없어. 이 옥간만 건네줄 거야.”
석목이 객잔의 정원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다음 순번의 불침번들이 부운차를 지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석목을 발견한 그들 중 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은 정원을 천천히 가로지르며 종수에게 몰래 옥간을 건넬 방법을 고민했다.
“목 형, 다음 차례에 불침번을 서야 하니 잠시 쉬어요.”
석목과 같은 부운차를 타고 온 보라색 머리의 청년이 말했다.
“괜찮아요. 별로 피곤하지도 않고 지키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잖아요.”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때, 종수의 방문이 끼익 열리며 예쁜 얼굴의 여인이 걸어 나왔다.
석목이 눈을 반짝였다. 그가 기억하기로, 그녀는 종수의 시녀 중 한 명인 소미였다.
방문을 나선 소미는 곧장 밖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청년과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가 인사를 하고, 정원을 벗어나서 근처의 담에 몸을 기대고 섰다.
잠시 후, 석목은 멀리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소미가 걸어오고 있었다.
“소미 소저, 잠깐만요.”
석목이 소미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무……무슨 일이죠?”
소미가 놀랐는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겁먹지 마세요. 무례한 짓을 할 생각은 없어요. 소미 소저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하고 싶어요.”
석목이 다급히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일이죠?”
소미가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석목을 보며 말했다.
“이것을 종수 소저에게 좀 전해주세요. 이 안에 이번 임무의 성패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어요.”
석목이 옥간을 꺼내 소미에게 건네며 말했다.
소미가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석목을 바라보았다.
“믿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것을 종수 소저에게 전해준다면 그녀가 단번에 이해할 거예요.”
석목은 말을 하면서 중급 영석을 하나 꺼내 소미에게 건네줬다.
“이건 보수로 드릴게요.”
석목이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소미가 중급영석을 보며 살짝 눈을 빛냈다.
“알겠어요. 전해줄게요. 이름이 뭐죠?”
소미가 옥간과 영석을 받아들고 물었다.
“그건 알 필요 없어요. 옥간만 그녀에게 건네주면 됩니다.”
석목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잠시 주저하던 소미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석목은 종수의 방으로 향하는 소미의 모습을 보며 살짝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신중한 종수라면 옥간의 내용을 보고 분명 대비를 할 터였다.
한편 눈을 내리깔고 종수의 방으로 가던 소미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옥간을 슬쩍 보았다.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마냥, 조금 전의 겁에 질린 표정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 녹색 빛이 뿜어져 나와 옥간 안으로 스며들었다.
소미는 곧 놀란 표정을 짓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옥간을 챙겨 넣었다. 그리고 종수의 방으로 가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종수는 안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련을 하고 있었으며, 거실에는 앳되어 보이는 시녀만 있었다.
“소미,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앳된 시녀가 소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미안해. 방금 밖에서 어떤 사람이 길을 막아섰는데 뿌리치고 오는 것이 쉽지가 않았어.”
소미가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감히 너를 막아선 거야? 누구야? 무슨 짓을 했어? 내가 종수 소저에게 혼내주라고 할까?”
앳된 얼굴의 시녀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종수 소저에 대해서 조금 물어본 것뿐이야. 능서의 부하일 테니 굳이 알릴 필요 없어.”
소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 그럼 조심하고,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이 언니에게 말해.”
앳된 얼굴의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미는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안방을 보며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석목은 그림자 속에 숨은 채 멀리서 종수의 방을 바라보았다.
소미가 방에 들어간 지 벌써 일 식경이 지났다. 그러나 석목의 예상과 달리 종수의 방에서는 어떤 특별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석목은 정신력을 발산해서 그 사람이 영월동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영월동은 밖에서 신나게 놀다 왔는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석목은 그녀에게 인사하지 않고 몸을 숨긴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영월동은 석목이 몸을 숨긴 곳 근처를 폴짝폴짝 뛰어 지나가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의심에 찬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석목이 다급히 자신의 기운을 감추었다.
그러자 영월동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다시 돌아서서 자리를 떠나갔다.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본 석목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영월동은 경지가 높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 밤에 본 것처럼 경이로운 능력을 가진 것으로 미루어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석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잡생각을 떨쳐버렸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때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여러 사람이 정원으로 몰려왔다.
가장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석목이 방금 본성에서 몰래 엿본 검은 옷의 노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오는 이들은 전부 익학부족의 야만족이었다.
그런 그들의 옆에는 객잔의 사장이 쩔쩔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석목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석두, 저 녀석이 이곳에는 어떻게 온 거지? 설마 지금 손을 쓸 생각인가?”
채아의 목소리가 석목의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귀빈들이 있는 곳이 여기인가?”
노인이 정원 안쪽을 보며 사장에게 물었다.
“맞습니다, 성주 어르신.”
사장이 재빨리 대답했다.
석목은 노인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의 얼굴은 오래된 시체처럼 바짝 말라 있었지만, 두 눈에는 생기가 넘쳤고 자연스러운 위엄이 서려 있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정원의 문에 다가가 문을 열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다섯 명의 선천무인이 뛰쳐나와 문 앞을 가로막았다.
“그대들은 누구인데 이곳에 난입하려 하는 것이오!”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크게 소리쳤다.
그 순간, 능서와 종수가 그곳에 동시에 나타났다. 종수는 정원 앞에 다가온 이들을 차가운 눈빛으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능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이렇게 대하는 것인가?”
노인이 종수를 잠시 보더니 곧 능서를 향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른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짜내는 모습은 매우 괴상하여 보기 흉했다.
능서가 멍청한 표정으로 노인을 보더니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
“당신은…… 운양?”
“하하, 맞네. 어찌 내 성까지 와서는 나를 찾지 않은 겐가?”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하하, 모습이 눈에 익다 했네. 수십 년 못 본 사이에 이곳의 성주를 맡게 됐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군. 축하하네.”
능서가 웃으며 말했다.
“고맙네. 유찬 성주의 대장군인 자네의 명성이 벌써 이곳까지 퍼졌다네. 이런 작은 성의 성주인 나보다 자네가 훨씬 대단하지.”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종 소저, 이자는 의심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제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우 묵운양입니다. 현재 운익성의 성주이지요.”
능서가 몸을 돌려 종수에게 설명했다.
종수는 능서의 말에도 경계를 풀지 않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종수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능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소저가 누구인지 나에게는 소개시켜 주지 않는 것인가?”
노인이 물었다.
“이쪽은 천오상회의 객경장로 종수 소저라네. 유찬 성주의 물건을 운송하던 중에 이곳에 잠시 들렸네.”
능서가 말했다.
“천오상회의 귀빈이셨군요. 멀리 마중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노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것이죠?”
종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 세월 알고 지낸 능서를 성에 초대해서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천오상회의 귀빈을 만날 줄은 몰랐군요. 이것도 인연인데 소저도 함께 하는 것이 어떤가요?”
노인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지금 임무를 맡은 몸이라 초대에는 응하지 못할 것 같군요.”
종수는 능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바로 거절했다.
능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종수를 한 번 보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하, 일처리가 정말 철저하군요. 감탄했습니다. 현재 제 관할의 성 안에 있으니 안전에 관한 문제는 마음 놓아도 됩니다. 누구도 감히 이 객잔을 습격하지는 못할 거예요. 사실 제가 판매하고자 하는 귀중한 물건이 있는데, 줄곧 의뢰할 만한 적당한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종 소저의 책임감이 이렇게 강하니 의뢰를 맡겨보고 싶은데, 함께 가서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노인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종수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재촉하지 않고 옆의 능서와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그 물건을 이곳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요? 저는 임무 때문에 이 객잔을 떠날 수 없습니다. 만약 함께 만찬을 하고자 한다면 이 객잔에서 해도 될 겁니다.”
종수가 조금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물건의 양이 적지 않습니다. 운익성에서 십 년 넘게 모아온 요수의 재료들이기 때문에 전부 이곳으로 가져오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노인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종수가 눈을 빛냈다. 그녀가 알기로 상회에서는 최근 큰 거래를 위해 각지에서 요수의 재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만약 이 거래를 성사 시킨다면 상회의 계획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천오상회에서 그녀의 위상이 더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반대로 만약 성주가 직접 찾아와서 제안한 거래를 거절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천오상회의 명성에 피해가 갈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오늘밤 바로 이야기를 나누어보지요.”
종수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시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종수가 말을 이었다.
“편한 대로 하시지요.”
노인이 말했다.
종수는 정원을 지키는 이들을 불러모아 책임자를 정하고, 불침번의 수를 두 배로 늘리는 등 차근차근 지시를 내렸다.
“신아, 소미, 만약 무슨 일이 발생하면 이것을 사용해서 알려줘.”
지시를 마친 종수가 두 시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도 남아서 함께 이곳의 안전을 지켜라. 무슨 일이 생기면 너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니 어떠한 사고도 있어서는 안 된다.”
노인이 몸을 돌려 수하들에게 지시했다.
“가시죠.”
노인의 말에 세 사람은 함께 객잔의 대문을 나섰다.
세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석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익학부족의 음모에 대해서 분명히 알려줬건만, 그녀가 어째서 저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종수가 옥간의 내용을 믿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계획이 있나?’
“석두, 그녀가 어째서 저들과 함께 가는 거야!”
채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따라가보자.”
석목은 정원 내부를 한 번 둘러본 뒤 세 사람을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