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돌을 뺏다
석목이 잠시 생각하다가 채아에게 지시했다.
“계획적으로 물건을 빼앗고 배상까지 받으려 하다니. 채아, 열풍애 명월교 분단에서 적봉을 감시해.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
“내게 맡겨!”
채아가 대답한 뒤 날개를 펼쳐 날아갔다.
“수아, 우리가 기다리던 물고기가 낚인 것 같아. 앞으로 며칠간…….”
석목이 살짝 웃으며 종수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 * *
열흘 뒤, 창욱성에서 수십 리 떨어진 산골짜기.
외진 곳에 위치해 평소에도 한적한 이곳은 저녁이 되자 더욱 조용했다.
바로 그때, 누군가의 검은 그림자가 산골짜기에 나타났다.
눈썹이 붉고 마른 체형의, 삽십 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바로 적봉이었다.
적봉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핀 뒤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더니, 골짜기 사이에 숨겨진 동굴로 걸어 들어갔다.
크지 않은 동굴의 내부에는 붉은 옷을 입은 견 씨 성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때 석목은 주위 산골짜기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채아의 시야를 통해 그 광경을 보고 살짝 놀라더니 곧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적봉과 여인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적 사형, 정말 종수가 나타났나요?”
여인이 물었다.
“맞아. 입성한지는 오래된 것 같지만, 활동을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됐어.”
적봉이 말했다.
“혼자 있던가요?”
여인이 물었다.
“혼자야. 이틀에 한 번씩 한연각을 찾고 있고, 본성에도 한 번 간 적이 있어.”
적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본성……. 한연각……. 그녀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알고 있나요?”
여인이 물었다.
“본성에서는 영호관과 의뢰 물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상회의 이름으로 기한 내에 물건을 건넬 것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세 배를 보상하겠다고 보증했어. 한연각에 갈 때마다 왕서곤과 한 시진 가까이 대화를 나누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는 알 수 없어. 견 사매, 그녀가 무슨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돼. 천오상회는 저력이 있어. 우리가 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따진다면 대응하기 어려울 거야.”
적봉이 말했다.
“종수가 이 일에 우리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는 있겠지만, 증거는 전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해요. 그때 전면에 나선 것은 묵운양 그 노인네였어요.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 강시공을 수련하는 야만족이 많으니, 그것이 우리 명월교가 손을 썼다는 증거는 되지 않아요. 또 그 늙은 여우같은 양서곤은 신중하기로 유명하니, 증거도 없이 종수의 말을 믿을 리가 없겠죠. 걱정하지 말고 계획대로 움직이면 됩니다.”
여인이 말했다.
“그래, 며칠 후 물건을 받기로 한 날이 되면 천오상회에 찾아가서 배상을 요구하기로 영호관과 이미 합의를 했어.”
적봉이 말했다.
“예, 남은 일은 각자 상황에 따라 행동하면 될 겁니다.”
여인이 말했다.
“참, 성석은 얼마나 모았지?”
적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직 목표로 한 것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여인이 말했다.
* * *
“과연 그랬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석목은 문득 과거 승선경매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유안은 권모술수에 굉장히 능한 사람이었다. 이번에 성석을 모으는 것 역시 무언가 음모를 꾸미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석목은 유안이 무슨 음모를 꾸미든지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견 씨 성의 여인이 종수에게서 뺏어간 성석만큼은 반드시 되찾아야 했다.
하지만 상대는 둘 모두 월계술사였기에, 혼자 싸워서는 이길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바로 그때, 여인의 손목에 채워진 푸른 팔찌가 갑자기 반짝였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눈을 잠시 감았다가 번쩍 떴다.
“견 사매, 무슨 일이야?”
적봉이 물었다.
여인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옥 상자를 하나 꺼내 적봉에게 건넸다.
“적 사형, 이 안에 성석이 두 개 들어 있어요. 이것을 가지고 총단으로 돌아가서 유 사형에게 건네줘요. 방금 급하게 성석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어요.”
여인이 말했다.
“견 사매는 같이 안 가?”
옥 상자를 받아 들며 적봉이 물었다.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겨서 바로 가봐야 해요. 성석은 매우 중요하니 반드시 직접 가지고 가세요. 의뢰한 물품의 배상에 관한 일은 사람을 보내 처리하면 될 겁니다.”
여인이 말했다.
“알겠네. 간단한 일이니 걱정하지 말게.”
적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웃으며 적봉과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먼저 동굴을 나가서 어디론가 날아갔다.
잠시 후, 동굴에서 나온 적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창욱성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막 산골짜기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검은 옷을 입고 삿갓을 쓴 사람이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냐!”
놀란 적봉이 소리쳤다.
적봉은 월계술사였다. 그러나 그의 정신력으로도 앞에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 직전까지 아무런 기척도 감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상대는 고작 선천후기의 무인이었다.
적봉은 체내의 법력을 슬그머니 끌어올리며, 상대가 언제 이곳에 왔고 어디까지 목격했을까를 생각했다. 만약 상대가 자신이 견 씨 성의 여인과 접촉하는 것을 봤다면 절대 살려두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하하……. 적 전주, 저를 잊으신 겁니까?”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웃으며 삿갓을 벗었다. 그러자 이목구비가 뚜렷한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당신은…… 석목!”
석목의 얼굴을 확인한 적봉이 멍청한 표정으로 엉겁결에 소리쳤다.
“아직까지 저를 기억하고 있다니 영광입니다.”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과거 해상에서 그 앵무새 덕에 수많은 위험을 피할 수 있었는데 어찌 잊을 수 있겠나. 당시 갑자기 실종되는 바람에 우리가 많이 걱정했네. 특히 유안 사제는 아직까지도 포기하지 않고 그대를 찾고 있네.”
적봉이 웃으며 말하자 두 사람 사이의 긴장된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석목은 말없이 희미하게 웃었다.
“참, 서하대륙에 무사히 도착했으니 명월교에 가입하는 것이 어떤가? 유 사제는 명월교의 부교주 자리에 올랐네. 자네가 가입한다면 단주의 자리 정도는 바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네.”
적봉이 그렇게 말하며 석목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 전주님의 깊은 배려에 감사드리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이곳까지 온 것은 물건을 하나 돌려받기 위해서입니다.”
석목이 말했다.
“무슨 물건을 말하는 것이지?”
적봉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성석.”
석목이 말했다.
“성석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지?”
적봉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저는 명월교의 어떤 일에도 개입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명월교가 저를 건드리면 저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지요.”
석목이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적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익학부족과 결탁하여 천오상회의 물건을 강탈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습니다. 관여하고 싶지 않지만, 저의 중요한 사람이 그 일에 휘말렸습니다. 성석은 그녀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한 것이니 돌려주시길 바랍니다.”
석목이 말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니 툭 털어놓고 말하겠네.”
석목의 말을 전부 들은 적봉의 표정이 오히려 평온해졌다. 석목은 그런 적봉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그 성석은 우리가 빼앗은 것이 맞지만, 돌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네. 그것은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물건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석 형의 얼굴을 봐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겠네. 뿐만 아니라 방옥이 의뢰한 물건을 분실한 것에 대해서도 추궁하지 않도록 하지. 이 일은 이렇게 끝내는 것이 어떤가?”
적봉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나 석목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겁니까? 뭐가 됐든 성석은 반드시 받아야겠습니다.”
석목을 잠시 바라보던 적봉이 갑자기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석목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바라볼 뿐,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석목, 호의를 무시하지 말거라. 내가 너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은 유 사제의 얼굴을 봐서 그런 것이다. 고작 선천무인인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조건을 내건다는 말이냐? 설마 유안 사제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내가 너를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적봉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성석은 돌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더는 말해도 소용이 없겠군.”
석목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석목은 활을 떠난 화살처럼 쏘아져 날아갔다. 순식간에 적봉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그가 번개처럼 운철흑도를 휘둘렀다.
적봉은 석목이 감히 선공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실전을 겪어본 월계술사다웠다. 적봉은 당황하지 않고 해골의 두개골이 박혀 있는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그 순간 지팡이의 두개골에서 회색빛이 반짝이더니, 바닥에서 거대한 뼈 방패가 솟아나와 그의 앞을 막았다.
쾅!
운철흑도의 칼날은 뼈 방패를 몇 척 깊이 파고 들어갔으나, 결국 저지당했다. 칼끝과 적봉과의 거리는 겨우 반 척 정도였다. 깜짝 놀란 적봉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가 시전한 구유골순(九幽骨盾)은 오직 월계술사만이 익힐 수 있는 상급 술법으로, 지계강자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을 정도의 견고함을 자랑했다. 그것이 지금 석목의 일격에 거의 두 동강이 날뻔 한 것이다.
적봉은 빠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대여섯 개의 거대한 뼈창이 나타나더니 석목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쐐액!
이미 전신을 푸른색 빛으로 감싼 석목은 뼈창의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해냈다.
그때 적봉의 지팡이가 다시 반짝였다.
그 순간, 석목을 지나친 뼈창들이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그를 쫓아왔다.
놀란 석목이 금색으로 변한 눈으로 보자, 반투명한 정신력의 실이 뼈창과 적봉을 연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석목의 공혼법련과 매우 유사했다.
석목은 다시 한 번 전력을 다해 피했다. 그러나 이대로는 상대에게 계속 끌려 다닐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이를 악문 석목은 운철흑도를 휘둘러 검광을 그물처럼 날렸다.
깡! 깡! 깡!
뼈창들을 멀리 튕겨내는데 성공했지만, 석목 역시 뒤로 밀려났다. 거대한 힘에 의해 팔이 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작 일개 선천무인이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는구나!”
그때 적봉의 머리 뒤에 초승달 모양의 환영이 나타났다. 이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법력의 파동이 급증하면서 지팡이가 빠르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거대한 뼈창이 허공에 나타나 석목을 향해 빗발치듯 날아갔다. 그 공격은 석목의 주위 십여 장의 범위를 완전히 뒤덮어버려서 피하고 싶어도 피할 방도가 없었다.
그 순간, 석목의 가슴에서 검은 빛이 터져 나오더니 전신에 거대한 뱀의 비늘이 자라났고, 그와 동시에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걸 본 적봉의 표정이 굳었다.
“토템술!”
석목은 재빨리 체내의 진기를 운철흑도에 주입했다. 그러자 칠흑같이 검은검광이 솟아나왔다.
석목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날아드는 뼈창에도 불구하고 적봉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팔을 휘두르자 진기가 주입된 운철흑도가 흐릿해졌다. 그러자 그의 몸 앞에 촘촘한 검광의 그물이 형성됐다.
깡! 깡! 깡!
쏟아지는 뼈창이 운철흑도의 검광에 닿자마자 산산이 조각났다.
그 광경을 본 적봉이 크게 놀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목은 빗발치는 뼈창들을 전부 뚫고 적봉의 앞까지 다가갔다. 그러면서 칠흑같이 어두운 검광을 뿜어내는 운철흑도를 휘둘렀다.
적봉의 몸 앞에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전보다 더욱 거대한 뼈 방패가 나타났다.
싹둑!
그러나 골순술(骨盾术)은 이번에는 운철흑도를 막아내지 못했다. 방패는 운철흑도의 기세를 조금도 늦추지 못하고 힘없이 두 동강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