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275화 (275/916)

275화. 혈맥반서(血脉反噬)

화염 속에서 석목의 옷이 다 타버리면서, 마치 강철로 주조한 듯한 다부진 몸이 드러났다.

까무잡잡한 피부 표면을 담홍색의 진기가 둘러싸고 있었고, 그 진기를 둘러싼 보호막 겉에는 반투명한 백색의 기령벽(氣靈璧)이 있었다.

이는 화염에 휩싸이기 전, 석목이 빠른 속도로 방어 수단을 펼쳐 활활 타오르는 주위의 불길을 막으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기령벽은 맹렬한 불길 속에서 삽시간에 녹아버려 잠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안에 있는 담홍색의 진기 보호막은 뜨거운 불 속에서 아주 얇아져서 거의 반투명 상태가 되어 있었다.

석목은 마치 뜨거운 화로 속에 있는 것처럼 넘실거리는 불길이 사방에서 덮쳐오는 것 같았다. 온 몸의 근육과 피부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과 함께 고통이 느껴졌다.

만약 그가 화속성 공법을 수련해서 이런 고온에 대한 특별한 저항력과 적응력을 갖지 않았더라면, 벌써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한계가 있었다. 석목은 곧 숨쉬기가 힘들어지며 눈빛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왼손은 여전히 종수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수아!”

석목은 뭔가 생각난 듯 흠칫 놀라며 갑자기 혀끝을 깨물었다.

그가 말없이 오른손을 흔들자 갑자기 몇 장의 푸른색 부적이 허공에 던져지면서 폭발했다.

그러자 옅은 푸른색 냉기가 일어나서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순식간에 석목의 주변으로 몰려들더니 맹렬한 불길을 막아주었고, 주변이 시원해지면서 더없이 차갑고 상쾌한 공기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잠시뿐이었다. 주위에서 타오르는 화염은 마치 흉악한 짐승들이 시뻘건 입을 쫙 벌리고 사방에서 공격해오는 것 같았다.

푸른 안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른 속도로 옅어졌고, 석목이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며 터져버렸다.

맹렬한 불길이 다시 석목의 몸 주위를 휘감았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붉은색 진기의 보호막은 곤충의 날개처럼 더욱 얇아져서, 힘겹게 석목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오랜 시간 동안 벌어진 일 같았지만, 사실은 종수의 몸에 이상이 발생한 후 불과 몇 호흡 안 되는 찰나에 일어난 것이었다.

바로 그때, 석목의 등에 있는 운철흑도의 표면에서 심오하고 어두운 빛이 비치더니,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흡입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화염 속에서 한 줄기 작은 불꽃이 나왔고, 그것은 마치 나방이 불에 뛰어들 듯 흑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불길이 석목의 몸을 감싸면서 그의 모든 피부와 근육이 화염처럼 붉어졌다.

화독(火毒)이 진기 보호막을 뚫고 석목의 혈관까지 파고들자 온 몸을 칼로 베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석목은 이를 악물었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솟아나왔지만 그마저도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석목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결국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그의 왼손은 여전히 종수의 오른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고, 여기서 손을 놓치기라도 하면 그녀를 영영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같았다.

창고 안의 불길은 계속해서 사정없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고, 석목의 온 몸도 더욱 붉어졌다.

다만 운철흑도가 화염의 일부를 흡수했고, 마지막에 화령(火灵)의 진기가 그를 보호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전신이 타버리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볼 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종수도 똑같이 불길의 화염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본래부터 새하얀 피부가 새빨갛게 변하니 더 아름다웠다. 다만 그 표정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고, 가냘픈 몸이 떨리는 모습이 엄청난 아픔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종수의 몸 어디에선가 검은빛이 날아올라 허공에 떴다.

검은빛 속에는 엄지손가락 크기만 한 검은 구슬이 있었는데 그 표면에는 동그랗고 옅은 금문(金紋)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이전에 종수가 동주대륙 서하의 변경에서 신비로운 묘공(妙空) 스님을 만나서 받은 구슬이었다. 구슬이 진동하더니 표면에 있는 금문이 밝은 빛을 내며 빠르게 빙빙 돌기 시작했고, 갑자기 동그랗고 옅은 금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갑자기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주위에서 활활 타오르던 사나운 불길이 마치 금색 빛을 두려워하는 듯 움츠러들었고, 그 빛에 의해 곧 작은 공간이 생겨났다.

이어 검은 구슬에서 검은빛이 뻗어 나왔고, 심오하기 그지없는 이 부문은 옅은 금색 빛 사이에서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검은색 부문이 나타나면서 구슬은 눈앞에서 빠르게 작아졌고, 곧 자취를 감추었다.

검은색 부문은 마치 부름을 받은 것처럼 빛을 반짝이더니 빠르게 종수의 몸 구석구석으로 흡수되었다.

잠시 후 종수의 얼굴에서 고통의 기색이 조금씩 사라졌고, 피부의 붉은 무늬도 옅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던 거대한 불길도 조금씩 잦아들면서, 종수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모든 검은색 부문이 종수의 체내로 들어가자 주위를 가득 비추던 옅은 금빛도 사라졌다.

어느덧 창고를 휩쓸던 거대한 화염은 대부분 잦아들었고, 그것은 종수의 주변으로 모이더니 허공에서 불꽃의 새가 되어 힘차게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불꽃의 새는 푸드덕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불꽃 날개옷처럼 바뀌어 종수의 몸을 에워쌌다.

한편 종수의 옆에 쓰러져 있는 석목은 여전히 남은 불꽃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피부는 여전히 빨간 색이었으며, 인사불성이 되어 눈을 감고 있었다.

바로 그때, 창고 위에 있는 허공에서 파동이 일어났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고풍스러운 청동 거울이 갑자기 허공에 떠올랐다.

그 거울은 영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주위를 한번 훑더니 종수가 있는 쪽을 비추었고, 그 순간 거울에서 금빛이 돌면서 광채가 뻗어 나왔다.

빛 속에서 수많은 오색 부문이 떠오르면서 희미한 인영(人影)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 인영은 점점 선명해지더니, 봉황 모양으로 장식된 관을 쓰고 오색 날개옷을 걸친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여인의 두 눈은 황금색이었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전신에서 옅은 금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인은 형언할 수 없는 신성함으로 가득 찬 존재로 보여 범접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여인은 화염의 불길에 휩싸여 있는 종수를 바라보더니 기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외진 성역에서 천봉의 혈맥을 활성화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정말 반가운 소식이군. 그런데 누가 이를 미리 알고 혈맥반서의 힘을 억누른 걸까? 아마도 내가 많은 은혜를 입은 것 같군.”

여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감미로운 것이 마치 자연의 소리 같았다.

여인은 종수의 옆에서 손을 꼭 잡고 입는 석목에게 눈을 돌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여인의 얼굴에 잠시 홍조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눈을 돌려서 냉소를 띠며 말했다.

“흥! 비천한 인간 주제에 감히 봉 가의 혈맥을 더럽히다니,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이곳에서 살아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인은 무언가를 하려는 듯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녀는 종수를 보더니 법결을 바꾸었다. 그러자 소맷자락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빛이 뿜어져 나와 종수를 감쌌고, 그녀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면서 석목의 손에서 떨어졌다.

종수를 둘러싼 불길이 그 부드러운 빛 속에서 진동하더니,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그녀의 몸에 있는 붉은 무늬 안으로 들어갔고, 석목은 여전히 땅에 쓰러진 채로 화염 속에 있었다.

이어 종수의 몸에 새겨진 붉은 무늬가 점점 옅어지더니 결국 사라졌다.

종수는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고, 감긴 눈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백옥 같은 피부에는 연한 붉은 빛이 감돌았고, 마치 잠자는 듯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봉황관을 쓴 여인은 종수를 보고 가여운 마음이 들었는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하의(霞衣, 구름과 노을로 지은 옷)가 만들어져서 종수의 몸을 감쌌다.

그 뒤 여인이 갑자기 차가운 얼굴로 손을 휘두르자 금빛 불꽃이 날아오르더니 석목의 몸에서 타오르는 붉은 화염속으로 들어갔다.

휘이익!

활활 타오르던 붉은 불길이 잦아들면서 순식간에 옅은 금색으로 변했다.

석목을 둘러싸고 있던 얇은 화령 진기 보호막이 옅은 금색의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석목은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의 수염과 머리카락은 재로 변했고, 피부도 까맣게 그을렸으며 마치 고기가 타는 듯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그 여인은 금색의 불꽃을 내뿜은 후 석목을 쳐다보지도 않고 공중에 떠 있는 청동 거울을 손으로 가리켰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어 거울 표면에서 광채가 나면서 노을 같은 연한 금빛이 비쳤다. 그 빛은 공중에 떠 있는 종수를 에워쌌고, 그녀와 함께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거울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허공에서 흔들리더니 곧 자취를 감추었다.

창고 안은 다시 평화로운 분위기를 되찾았다.

연한 금빛 불꽃은 계속해서 타올랐지만, 자세히 보면 석목의 등 뒤에 있는 운철흑도가 그 불꽃을 흡수하고 있었다.

석목은 격렬한 고통 때문에 의식을 조금 회복하는 듯했지만, 정신은 여전히 혼미한 상태였다.

온 몸은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고, 혈관이 펄펄 끓어올라서 곧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수아, 수아…….”

석목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순간 고통이 사라지면서 그는 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그의 그을린 왼손 피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은색 빛이 떠올라 있었다.

* * *

외딴 섬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나무들이 하늘하늘 춤추고, 산과 강이 수려한 풍경을 더하고 있었다.

해변 근처에는 높이가 십여 장이 되는 거대한 파초나무가 있었다. 나무의 굵직한 가지와 부채 같은 넓적한 녹색 잎은 바람에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 나무는 내리쬐는 태양을 가리면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나무 아래에는 타원형의 큰 바위가 있었고, 흰 원숭이 한 마리가 가부좌를 틀고 바위 한쪽에 기대어 있었다. 그는 손에 든 금색 경전을 집중해서 읽고 있었다.

경전의 표지에는 구전현공(九轉玄功)이라는 은색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경전 내부에서 뿜어내는 부드럽고 연한 금빛이 그 원숭이의 온 몸을 휘감자 원숭이의 흰털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시간이 지난 후 이글거리던 태양이 중천에 떠서 구름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늘 없는 섬의 지면은 뜨겁게 타오르며 갈라졌고, 바닷바람이 불어오자 지면의 뜨거운 기운이 더 강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숨이 턱턱 막힐 것 같던 공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무더위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작은 짐승들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해변의 파초나무 아래에 그늘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지만,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흰 원숭이는 그늘진 곳에서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운 채 금색 경전을 흥미진진하게 넘겨보고 있었다.

원숭이는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하면 몹시 기뻐하면서 명상하는 자세를 취했다. 또 어떤 때는 털이 보송보송한 손바닥을 내밀어 이상한 자세를 취하거나 손짓으로 흉내를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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