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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276화 (276/916)

276화. 왼손의 이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흰 원숭이는 경전을 덮고 만족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금색 경전을 한쪽으로 치운 뒤 그 자리에서 재주를 몇 번 넘었다. 그리고 입에서 ‘와’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는데, 몹시 흥분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어 원숭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어디론가 깡충깡충 뛰어갔고, 곧이어 바람을 일으키더니 흰 그림자가 되었다.

그 섬은 크지 않았기에, 흰 원숭이는 쉬지 않고 일각을 달린 끝에 가장 높아 보이는 산봉우리 앞에 도달했고, 원숭이는 말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산은 길을 따라 바위들이 울퉁불퉁 솟아 있어서 매우 험준했다. 그러나 원숭이는 손과 발을 이용해 마치 평지를 걷듯 산을 올랐고, 순식간에 정상에 닿았다.

백여 장의 산봉우리는 높낮이가 고르지 않았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는데 짙푸른 하늘에서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이 눈부시게 이글거렸고, 이로 인해 정상은 산 아래보다 더욱 뜨거웠다.

흰 원숭이는 뜨거운 날씨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흥분해서 머리를 들고 하늘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적당한 자리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흰 원숭이는 마침내 맷돌만 한 크기의 평평한 자리를 찾아서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한번 숨을 내쉰 다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흡일식의 자세를 취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전의 흡일식과는 조금 다른 자세였는데, 머리를 높이 들고 입은 약간 벌렸으며, 오른팔은 땅에 대고 왼팔을 높이 들어 하늘을 향한 모습이었다.

그의 두 눈에서 금빛이 돌더니 갑자기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금빛 불꽃이 떠올랐다. 이어 그 불꽃은 하늘의 태양과 마주하여 서로를 비추었고, 하늘에서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은 금빛이 되어 원숭이가 치켜든 왼손 안으로 모여들었다.

그 짧은 시간에 흰 원숭이의 왼손이 불이 붙은 듯 활활 타오르는 소리를 냈고, 흰 원숭이는 고통스러워하며 이를 악물었지만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얼마 후 금빛이 상당히 모이면서 흰 원숭이의 왼손에 있는 불꽃은 더욱 타올랐고, 그것은 곧 세숫대야 크기의 금색 불덩어리로 변했다.

흰 원숭이의 왼손은 점차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왼손은 더욱 심해진 고통으로 인해 떨렸으며, 모공에서는 땀에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온 몸은 물에서 건져진 것처럼 흠뻑 젖었지만 원숭이는 여전히 그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다.

땅에 엎드려서 새까맣게 그을린 손을 들어 올린 흰 원숭이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마치 이글거리는 거대한 불덩어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았다.

* * *

같은 시간, 창욱성의 남쪽에 위치한 창고 안.

수그러들 줄 모르는 금빛 불꽃 속에서 까맣게 탄 석목의 몸이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왼손에서 은빛이 반짝였다.

쾅!

석목을 감싸고 있던 금색 불꽃은 마치 부름을 받은 듯 소용돌이치더니 그의 왼손으로 모여 들었고, 그것은 곧 연한 금색의 불덩이가 되었다.

그 불덩이 사이로 영성 같은 한줄기 금빛이 석목의 손바닥으로 들어갔고, 금색의 불덩이는 빠르게 작아졌다.

그리고 몇 호흡이 지나는 사이에 금색의 불꽃은 모두 사라졌다.

새까맣게 타버렸던 석목의 몸이 천천히 회복되어 갔다.

몸에 난 상처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검은 살갗이 벗겨지면서 부드러운 새 살이 돋아났다.

잠시 후, 석목의 몸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는 몸을 움직이더니 갑자기 눈을 뜨며 일어나 앉았다. 그는 의아해하며 자신의 몸을 살피고는 곧 주위를 둘러보았다.

창고 안은 난잡하게 어지럽혀져 있었고, 바닥은 새까맣게 타버렸으며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그의 몸을 중심으로 주변이 다 타버리면서 바닥에는 큰 구덩이가 생겨 있었다.

창고 주위에는 금제(禁制) 법진이 펼쳐져 있었고, 종수의 몸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석목은 안색이 변해서 급하게 채아를 불렀다.

그의 옷은 다 타서 잿더미가 되어버렸고, 손가락의 저장반지와 등 뒤의 운철흑도만 남아 있었다.

석목이 진묘계(塵緲戒)에서 옷을 꺼내 입고 손을 흔들자 억제되었던 주위의 빛이 반짝이더니 사라졌다.

휙!

그때 채아가 창고의 창문으로 날아 들어와서는 상황을 보고 크게 놀랐다.

하지만 채아는 이내 석목의 얼굴을 보며 박장대소를 했다.

“하하, 석두……. 머리카락이랑 눈썹은? 지금 네 모습, 네 이름처럼 진짜로 반들반들한 돌이 된 것 같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그는 머리카락과 눈썹이 다 타버려서 정말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었다.

“채아, 너 지금까지 계속 밖에 있었을 텐데, 수아가 나가는 거 못 봤어?”

석목이 물었다.

채아는 석목이 표정이 이상한 것을 눈치 채고 웃음기를 거두고는 말했다.

“아니, 지금까지 누가 나가는 건 전혀 보지 못했어. 아, 종수 누님이 떠난 거야?”

“여기서 방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 났어……. 네가 밖에서 볼때 뭔가 이상한 점 없었어?”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채아에게 말해주었다.

“네가 여기에 금제 법진을 작동시켜두어서 창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는 없었어. 다만 조금 전에는 갑자기 뭔가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확실히 느꼈어.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사라지더라고.”

채아는 잠시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기절하기 전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써보았다. 그러나 종수가 뿜어낸 불꽃의 화독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서 단편적인 기억만 남아 있었다.

정신이 몽롱했을 때 아주 듣기 좋은 여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가 ‘천봉’, ‘반서’ 등의 단어를 입에 담았던 것만 기억이 났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 여인이 종수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생각에 빠져 있던 석목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그는 그때 밀알 크기만 한 금색 입자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탄월식과 흡일식이 만들어내는 입자와 비슷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이건 뭐야?”

석목은 약간 주저하더니 정신력을 발하여 금색 입자를 만져 보았다.

쾅!

그러자 금색 입자가 터지면서 금색의 서적으로 변했다. 책 위에는 작은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공법에 대한 경전으로 보였다.

잠시 멍해 있던 석목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눈이 금빛으로 변하면서 금색 서적의 책장을 자세히 살폈다. 그렇게 몇 번을 보던 석목이 갑자기 무척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 경전에 실린 내용은 구전현공 첫 단계의 구체적인 수련 공법인 것 같았다.

석목은 일찍이 구전현공을 얻긴 했지만, 그 구체적인 수련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그 공법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꿈속에서 흰 원숭이가 구전현공에 대해 보인 반응으로 미루어볼 때, 이 공법은 확실히 범상치 않은 것 같았다.

석목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흥분되는 마음을 억눌렀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의 몸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왼손이 마치 만 근에 달하는 물건을 들고 있는 것처럼 무거웠던 것이다. 그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넘어질 뻔했다.

왼손을 내려다본 석목의 눈에 정말 믿을 수가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왼손 손바닥이 까맣게 타 있었다.

처음에는 석목은 몸을 치유하는 신비로운 기운이 부족한 탓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왼손은 비록 까맣게 되어 있었으나 전혀 아프지는 않았다. 주먹을 쥐었다 펴는 등 움직이는 것에도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이상하게 손이 너무 무거웠는데, 마치 운철보다 만 배는 무거운 물건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현재 석목이 지닌 힘은 만 근을 넘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손은 어마어마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석목은 금색 눈으로 왼손을 살펴보았으나 특별한 점을 찾지는 못했다.

그 순간 석목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꿈속에서 흰 원숭이가 산 정상에서 수련한 것은 분명 구전현공이었다. 그 왼손이 태양의 기운을 흡수한 뒤에 손이 이렇게 까맣게 타버린 것 같았다.

석목은 왼손이 검게 변한 것이 구전현공을 수련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구전현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종수가 실종된 지금은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석목은 오른손으로 땅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한숨을 깊게 내쉰 뒤 창고 안 곳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 * *

동주 대륙의 어느 밀실.

나이가 삼사십 대로 보이는 살굿빛 승포를 입은 뚱뚱한 승려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는 묘공이었다.

눈을 살짝 감고 있는 그의 주위에는 금빛 광채가 흐르고 있었는데, 마치 금빛 속에서 목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 손은 가슴 앞에 두고 시무외인(施無畏印, 불보살이 취하는 수인의 하나)을 취한 채, 입술을 살싹 움직이며 주문을 외는 중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의 몸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고, 마치 허공에 걸터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금빛이 더욱 강렬해지면서 주위로 뻗어 나갔고, 이 빛은 그의 몸 뒤로 천천히 모이더니 둥근 빛이 되었다.

갑자기 묘공이 무언가에 감응하듯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의 왼손은 앞에서 수인을 취한 채였고, 무언가를 읊조리는 입 꼬리가 올라가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는 다시 눈을 감고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 * *

창욱성에 있는 창고 안.

석목은 창고 안에서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거나,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그의 왼손은 너무 무거워서 걸을 때의 자세가 어색했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무척 힘들어보였다.

석목은 지금 몸의 균형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고, 까닭 없이 무거워진 왼손때문에 단시간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왼쪽보다 오른쪽에 좀 더 중심을 실어서 걸었다. 왼발에 힘을 줄 때는 조심하지 않으면 손의 무게 때문에 몸이 휘청거렸다.

불에 타서 벗겨진 그의 머리에서는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고, 몸에서는 백색 안개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런 것들에 온전히 신경을 쏟을 수가 없었다. 종수의 실종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답답했고, 마치 강력한 일격을 맞은 듯했다.

“석두, 이번 일은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아. 만약 어떤 사람이 종수 누님을 납치해갔다면 분명 내가 볼 수 있었을 거야. 한나절 내내 나는 쉬지도 않고 주위를 살폈는데 사람 그림자도 못 봤어. 분명 외부 사람이 그를 데려간 것은 아닐 거야. 아마도…….”

허공에서 채아가 석목을 내려다보며 우물쭈물 말했다.

석목도 채아가 말하는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석목은 두 가지 이유로 채아의 추측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첫째, 예기치 않은 화염은 본래 종수의 몸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석목은 쓰러지기 전에 종수가 불길 속에서 고통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몸에는 어떤 상처도 입지 않은 것을 직접 목격했다.

둘째, 불길이 아무리 거세다 한들 살아 있는 사람을 재 한 줌 없이 깨끗하게 태워버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또한 현재 창고 안에 있는 재들은 한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대부분은 옷이 타버리고 남은 잔재였다.

물론 종수가 사라져버린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그는 창고를 외부와 단절시키는 금제 법진을 작동시켰었다. 그것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큰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목은 자신이 기절한 후 높이 치솟은 불길에 종수가 잘못되지는 않았을지 걱정되었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석목은 더 이상 채아와 말할 정신이 없었고, 그는 낙담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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