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헤어짐
석목은 눈앞에 있는 옷이 타고 남은 재를 보면서 멍해졌다. 지금까지 그가 종수가 함께 겪어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소년 시절, 종수의 부친이 그를 부탁한 이후, 그와 종수는 오랜 세월 운명의 굴레처럼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해왔다. 그녀가 석목을 위해 보여준 사심 없는 헌신과 순수한 마음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가슴은 아려왔다.
“아닐 거야……. 수아에게는 아무 일 없을 거야!”
석목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을 가라앉힌 석목은 이번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자세히 돌이켜보다가, 갑자기 두 눈을 반짝였다. 그는 자신이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봉……. 반서…….”
석목은 자신의 정신이 혼미했을 때 들었던 신비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설마…….”
순간 석목의 머릿속에 대담한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무언가 결심한 그는 조수(潮水) 같은 강력한 신의 눈으로 창고 전체를 훑어보았다.
살펴본 결과, 그는 자신과 종수가 쓰러져 있었던 자리의 허공에 보일 듯 말 듯한 공간의 파동이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
그 파동은 매우 미약하고 빠르게 사라졌기 때문에, 석목에게 공간 원소에 대한 감응력이 없었다면 결코 알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발견한 석목은 매우 놀랐다.
천봉, 반서, 신비로운 여인, 공간의 파동, 종수의 실종……. 이 모든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석목의 마음에 의혹이 일었지만, 문제는 아무런 단서도 없다는 것이었다. 석목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석두, 무슨 일이야?”
채아가 물었다.
“채아, 네가 본 것을 한 번 더 자세하게 말해봐. 아주 사소한 것도 놓쳐서는 안 돼!”
석목이 채아에게 빠르게 말했다.
“이미 여러 번 물어본 거잖아. 나는 말하기도 지쳤는데 너는 귀찮지 않아? 그……그래, 좋아. 다시 한 번 말해볼게.”
채아는 귀찮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석목의 눈빛을 보니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채아는 자신이 목격했던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세세하게 말해주었다.
“그래, 그거야. 나는 처음에는 네가 느꼈다던 그 어마어마한 기운이 종수의 몸에서 터져 나온 화염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기운은 틀림없이 그 신비로운 여자가 뿜어낸 거야. 그리고 그 기운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지도 않았어. 만약 그 여자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면 쉽게 허공을 가르고 종수를 데려갈 수 있어. 그래야 말이 되는 거지.”
석목이 말했다.
“석두,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여자가 종수 누님을 데려갔다는 거야?”
채아가 물었다.
“맞아, 그랬던 거야.”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수아, 기다려. 네가 어디 있든지 내가 꼭 찾아낼게!”
석목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다짐했다.
그때 석목의 몸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목은 자신의 몸이 왼쪽으로 쏠려있다고 느끼다가 흠칫 떨리더니 정신이 맑아졌다.
석목은 주위를 살펴본 순간 깜짝 놀랐다.
그는 방금 전에 종수에 대한 생각을 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힘을 주었고, 그러면서 묵직한 왼쪽 주먹으로 바닥을 꾹 눌렀었다.
그런데 그가 왼쪽 주먹을 들어 올리자 땅에 작은 구멍이 패여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의 표면은 마치 칼로 깎은 것처럼 가지런했다. 그렇게 단단한 돌바닥이 자신의 주먹에 마치 솜방망이처럼 잘려나간 것이다.
“석두, 이 손은 왜 그래? 무슨 이상이 있는 거야?”
채아는 주위에 흩어진 돌 부스러기들을 보면서 놀라서 물었다. 그는 검게 타버린 석목의 왼손이 그냥 화상을 입은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석목은 채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왼손을 눈앞으로 들어 올려서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먹을 쥐고 팔을 들어 올려서 다시 한 번 바닥을 내리쳐보았다. 굉음이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예상했던 대로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났다. 많은 힘을 들이지도 않고 그저 가볍게 치기만 했는데, 주먹은 땅을 진동하게 하면서 큰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석목은 자신의 왼손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고, 그가 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채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석두, 네 왼손의 힘이 정말 대단한 걸!”
석목은 고개를 저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왼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서 조용히 창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저장반지에서 삿갓을 하나 꺼내서 머리에 썼다.
채아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면서 물었다.
“석두, 너 어디 가는 거야?”
석목은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섰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종수가 이전에 살던 곳으로 가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채아의 말에 그는 정신이 들었다.
애초에 그가 창욱성의 천오상회에 와서 경매의 모든 과정에 참여한 것은 모두 종수를 위해서였다. 그러니 종수가 실종된 것이 확실한 지금, 그가 이곳에 머무는 것은 더 의미가 없었다.
종수는 천오상회와 오십 년간의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종수가 신진의 요족 특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상황인데, 갑자기 사라져버렸으니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날 게 뻔했다.
석목이 종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종수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천오상회 사람들이 그를 찾아올 것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석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조차 종수의 실종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키는 것은 더 무리였다.
만약 자신이 이를 해명한다 한들, 과연 그들이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하느니 차라리 이곳을 떠나버리는 게 나았다. 그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일에 공공연하게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석목은 서하대륙의 지도를 꺼냈다.
* * *
수일 후, 한연각의 초수유랑(抄手游廊).
왕서곤이 아리따운 여인과 함께 걸으며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유랑 뒤쪽 모퉁이에서 남색 도포를 입은 청년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왕 부회장님, 급한 일로 보고 드립니다.”
그러자 아리따운 여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로 이 소란인가? 종 장로님은 같이 안 오셨는가?”
남색 도포를 입은 청년이 말했다.
“종……종 장로님이…… 실……실종되었습니다.”
“뭐라고?”
왕서곤과 여인은 서로를 마주보며 크게 놀랐다.
“종 장로님은 신진의 요족 특사인데, 어떤 연유로 실종이 되었다는 말이냐?”
여인이 재차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은근히 기뻐하는 듯한 느낌이 묻어 있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말해보거라.”
왕서곤이 말했다.
“소인이 종 장로님의 댁에 갔는데, 그곳에 계시지 않아서 다시 영선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주인께서 이르시길 종 장로님께서는 경매가 끝난 후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그분의 친구이신 석목 어르신도 요 며칠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알아보니 일찍이 떠나신 모양입니다.”
남색 도포를 입은 청년이 소매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석목 그 녀석도 안 보인다는 말이지?”
왕서곤은 순간 멍했다.
“네, 그렇습니다. 아침에 종 장로님께서 사라지신 걸 안 뒤부터 지금까지 창욱성을 다 뒤져보라고 일렀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청년이 말했다.
“설마 종 장로가 그렇게 제멋대로 상회를 떠났다는 말인가요?”
여인이 말했다.
“종 장로는 상회의 요족 특사로 승진했을 때 분명히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그녀는 상회와 오십 년간의 계약을 맺었지만, 상회가 그녀의 자유를 제한한 적도 없었지. 그녀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는데……. 아마도 말 못 할 속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왕서곤이 읊조리듯 말했다.
“사정이야 어떻든 종 장로가 사라진 건 사실이니, 숙부께서 그녀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알아보시면 어때요?”
그 아리따운 여인이 말했다.
왕서곤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뒤집어 백옥진반(白玉陣盤)을 꺼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것을 가리켰다. 곧 백옥진반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표면에 작은 부문들이 떠올라 둥근 백색의 빛이 만들어졌다.
왕서곤은 눈을 감고 신식(神識)으로 백색의 빛을 보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놀랍고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숙부님, 어때요?”
아리따운 여인이 이를 지켜보며 물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상회에 그녀의 영혼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다만 그녀는 지금 서하대륙에는 없는 것 같은데…….”
왕서곤이 천천히 말했다.
“서하대륙에 없다면 설마 동주대륙으로 돌아갔다는 말인가요? 단 며칠 만에 거기까지 갔다니, 그건 말도 안 돼요!”
“우리 상회와 계약을 맺으면 그 사람이 서하대륙에 있든 동주대륙에 있든, 계약할 때 남긴 그 사람의 영혼으로 위치를 대략 파악할 수 있지. 죽은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이상하다는 뜻이다. 마치 종 장로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구나.”
왕서곤이 말했다.
“사라졌다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여인이 말했다.
왕서곤은 더 말을 하지 않고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숙부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녀가 실종된 건 작은 일이지만, 요족 특사를 파견하는 일은 지체할 수 없어요.”
여인이 말했다.
“지금 무슨 일이 발생한 건지 알 수 없으니 우선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라. 그리고 사람을 보내서 종수가 갔던 곳을 조사해보도록 하고. 특사 파견에 대해서는 내가 먼저 회장에게 보고를 드리고 천천히 상의해보겠다.”
왕서곤이 말했다.
* * *
창욱성에서 북서쪽으로 백 여리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고요한 산골짜기.
산골짜기의 삼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작은 시내가 골짜기 사이로 굽이치며 흐르고 있었다. 근처 산 위에서 흘러내려온 시냇물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았고, 냇가에 자라난 가늘고 긴 수초들이 물결을 따라 흔들거렸다.
그때 청색 빛 한 줄기가 하늘에서 산골짜기로 내려오더니, 곧 큰 인영이 되었다. 바로 석목이었다.
“안심해. 여긴 외진 곳이라 천오상회 사람들이 찾을 수는 없을 거야.”
채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석목에게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냇가에 앉아서 삿갓을 벗고 세수를 했다.
그는 맑은 물위에 비친 자신의 반질반질한 머리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이나 멍한 상태로 있었다.
석목은 말이 없었지만 채아는 그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날개를 펼치고 골짜기 이곳저곳을 날아다녔다.
석목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종수의 몸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의 추측이 틀린 게 아니라면, 그 신비로운 여인이 말한 ‘반서’라는 말은 아마도 종수의 혈맥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이전에 황산에서 엽홍약이 종수가 고급 혈맥인 3품 봉음(鳳音) 혈맥이라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봉음, 천봉……. 이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석목은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했다.
만약 지난번 종수의 몸에 나타난 이상 현상이 정말로 혈맥 반서라면, 그때 갑자기 나타난 신비로운 여인은 아마도 종수를 구하러 온 것이었고, 그녀는 종수에게 악의를 가진 게 아닐 것이다.
물론 그 여인에게 다른 속셈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한동안 종수의 생명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석목의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 여인은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신통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야말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 석목은 지금까지 그런 강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 여인은 자신이 일전에 보았던 천위 강자인 무진도인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았다.
그런 여인이 종수를 데려갔으니, 석목이 그녀를 찾으려면 얼마나 애를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