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화장(火瘴)
챙! 챙! 챙!
금속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세 차례 들려왔다. 호리호리한 야만족의 몸은 어느새 남색의 갑각으로 뒤덮여 있었고, 칼날은 그 표면에 옅은 하얀색 흔적만 남기는데 그쳤다.
문신을 한 인족 남자는 잠시 멈칫했으나, 그는 그 순간 몸을 뒤로 빼면서 그 거대한 갑각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그는 몸의 균형을 잃었고, 이어 몸 옆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애꾸눈 야만족이 다시 두 개의 도끼를 날렸다.
날아오는 두 도끼의 각도가 매우 절묘해서, 문신을 한 남자는 그중 하나밖에 피하지 못했고, 나머지 도끼 하나가 그의 등 뒤를 세차게 가격했다.
그러자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황토색 빛이 쩍 갈라졌고, 남자는 거대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반쯤 완성되었던 법력도 곧 흔들리며 사라졌다.
“죽으려고 작정했군!”
우두머리인 대머리 야만족이 미친 듯이 날뛰며 공격해왔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사람 크기만 한 청동 망치가 들려 있었다. 그는 푸른빛을 발하는 망치를 휘두르며 문신한 인족 남자의 숨을 끊으려 했다.
막 땅에 내려선 문신을 한 인족 남자가 품속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더니 두 말없이 그것을 던졌다. 그러자 부적은 순식간에 한 마리의 긴 불뱀이 되어 대머리 야만족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대머리 야만족은 이를 피하지도 않으며 청동 망치를 들고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순간 청색 망치 그림자가 커지더니 불뱀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콰쾅!
불뱀이 폭발하면서 거대한 불의 구름이 솟구쳤다. 하지만 곧 불의 구름이 갈라지면서 푸른빛이 나오더니 대머리 야만족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는 흉악한 얼굴로 문신을 한 남자를 향해 돌진했다.
문신을 한 남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두 눈을 질끈 감았고, 그는 이제 죽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대머리 야만족이 그의 앞으로 돌진할 때, 갑자기 문신을 한 남자의 눈앞에 금빛이 반짝이면서 굉음이 들려왔다.
그가 눈을 떠보니 그의 앞에는 격분한 대머리 야만족이 서 있었다. 그러나 야만족의 손에 들려 있던 청동 망치는 자신의 바로 앞에서 뻣뻣하게 멈춰 있었다. 그리고 야만족의 머리는 몸뚱이와 분리되어 그의 옆에 굴러 떨어져 있었는데, 그 얼굴에는 공포에 질린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는 왼손에 갈색 장갑을, 머리에 삿갓을 쓰고 회색 도포를 입은 청년이 금색 검광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석목이었다.
우두머리가 쓰러지자 호리호리한 야만족과 애꾸눈 야만족은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느꼈는지, 후다닥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석목이 오른손을 들어 법결을 날리자, 그의 몸 앞에서 금색의 검광이 번개처럼 날아올랐다. 이어 두 사람의 비명이 동시에 들려왔다. 어느새 도망치던 두 야만족 역시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당신은……. 석 형이 아닌가요?”
문신을 한 인족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확신이 없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여(餘) 형, 오랜만입니다.”
석목이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고는 말했다.
석목은 문신을 한 그 남자와 구면이었다. 그는 이전에 동주대륙에서 함께 선발대회에 참가했던 여의(餘意)였다.
물론 두 사람은 친분이 있긴 했으나 아주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 모두 동주대륙에서 왔고, 우연히 만나게 되어 약간의 친밀감이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석목은 그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재빠르게 구해준 것이다.
여의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말했다.
“역시 석 형이군요! 석 형 덕분에 제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생명을 구해준 은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정도는 별 것 아닙니다. 그런데 여 형은 명월서교에 남지 않았나요? 왜 여기에 계시죠?”
석목은 여의가 걸치고 있는 짧은 회색 옷을 보고 물었다.
여의는 석목의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설명하자면 좀 깁니다…….”
석목이 이미 알고 있는 대로, 여의가 명월서교에 입문한 뒤 유안이 부교주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데려온 전주(殿主)와 형제들은 서교 교주에 의해 서하대륙의 각 분단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유안은 이에 대해 어떤 반대 의견도 내비치지 않았다.
동교의 형제들은 동주대륙에서는 영웅이 아닌 자가 없었고, 모두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분단의 명월서교 형제들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고 가지고 있던 것들을 빼앗겼다.
여의는 동교와 서교 사이의 분쟁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서 일 년 전쯤에 속해 있던 분단을 나왔다. 그 뒤에 우연한 기회에 적염성으로 오게 되었고, 요수 사냥과 광석 채굴을 하며 수련 자원을 얻었다고 했다.
여의는 똑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석목이 왜 이곳에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석목도 적염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자신이 이 일대를 잘 아니 길을 안내하겠다고 자청했다.
석목과 여의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석목은 청익비차(靑翼飛車)를 꺼내서 여의를 데리고 적염성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지?”
석목과 여의는 어리둥절했다.
“석두, 빨리 저기를 좀 봐!”
석목의 어깨 위에서 채아가 갑자기 말했다.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산맥을 바라보았다. 인근의 화산에서 적홍색의 안개가 뿜어져 나와서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그 붉은 안개의 속도는 보기에는 느렸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빨라서, 순식간에 두 사람이 있는 부근까지 뒤덮어버렸다.
석목은 그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랐다.
“석 형, 빨리 내려가요!”
그때 여의가 심각한 얼굴로 석목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석목은 여의의 표정을 보고 청익비차를 움직여서 재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땅에 내리자 여의는 재빠르게 적홍색 부적을 두 장 꺼냈고, 하나는 자신의 몸에 붙이고 다른 하나는 석목에게 주었다.
이어 그는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우며 두 부적을 발동시켰다.
두 부적은 붉은빛을 발했고, 그 빛은 보호막이 되어 곧 두 사람을 휘감았다.
석목은 손에 있는 부적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기괴한 부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가 알고 있는 부적에 대한 지식으로는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그 부문은 그가 지금까지 봐왔던 것들과는 크게 달랐다.
석목이 부적을 보느라 잠시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 붉은 안개가 두 사람을 휘감았다.
그 안개는 두 사람을 향해 몰려왔지만 부적이 만들어낸 붉은 빛에 의해 차단됐다.
여의는 이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 형, 이 안개는 뭐죠? 보아하니 이 안개를 상당히 두려워하는 것 같군요.”
석목이 물었다.
“석 형은 모르겠지만 이 안개는 보통 안개가 아닙니다. 강력한 화독(火毒)을 품고 있는 화장(火瘴)으로, 만약 접촉할 경우 곧바로 피부와 살이 썩어 들어가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죠.”
여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이런 것이 있다는 사실은 십만화산과 관련된 서적에서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자세히 기록한다 해도 늘 빠뜨리는 부분은 있기 마련이었다.
“이 부적은 매우 특별해 보이는데, 화장을 막을 수 있는 건가요?”
석목은 곧바로 물었다.
“이건 피염부(避炎符)라는 건데 적염성에서는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부적이에요. 십만화산을 다니다보면 때때로 화장을 만나기 때문에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죠.”
여의가 설명해주었다.
석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십만화산을 바라보았다. 이 안에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오랜 시간 머물러야 할 것을 생각하니,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석목은 적염성에 도착하면 십만화산의 위험에 대해 세세하게 파악한 뒤 많은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붉은 안개는 산맥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계속해서 퍼져나갔다. 이미 반 시진이 지났음에도 안개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더욱 자욱해지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붉은 빛이 점점 약해졌다. 부적의 영력이 거의 소진된 것이다.
그걸 보며 여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 형, 부적의 영력이 이미 다 된 것 같은데, 피염부가 더 있나요?”
석목이 물었다.
“피염부는 꽤 값이 나가는 부적이라 제가 가진 건 두 장이 전부예요. 십만화산의 화장은 그리 자주 마주치는 것은 아니라, 보통은 만일에 대비에서 한두 장만 소지하면 충분하죠.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화장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여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다른 방어 수단이 있나요?”
석목은 다시 물었다.
“화장은 독기가 매우 강해서 뚫지 못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보통의 방어 수단으로는 막을 수가 없어요. 일단 화장을 만나면 피염부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여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석목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동안 주위의 빛은 더 연해졌다. 이어서 연하고 붉은 안개가 빛을 뚫고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석목은 진기를 작동해서 몸을 둘러싸는 보호막을 만들었다. 그러나 보호막은 열기 때문에 얼마 버티지 못했고, 결국 안개가 진기의 보호막을 뚫고 들어왔다.
옆에 있는 여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몸 주위로 황토색의 보호막을 쳤지만 석목보다 상황이 더 나빠 보였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걸 본 석목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재빠르게 진기를 끌어올려 몸에서 화독을 몰아내려 했다.
그 순간 그의 왼손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석목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난 듯 끼고 있던 갈색 장갑을 벗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듯한 왼손이 보이지 않는 흡입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것은 체내에 침투했던 화독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빨아들였다.
멍하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석목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옆에 있던 여의를 감싸고 있던 붉은 빛이 점점 약해졌다. 그는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점차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몸을 흐느적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꺼내서 불꽃색의 단약을 복용하려고 했다.
그때 검은색 손이 갑자기 옆에서 뻗어 나오더니, 어두워지는 빛의 막을 통과해서 여의의 몸에 닿았다.
여의가 놀라며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 순간 석목이 그의 옆에 와 있었다. 피염부가 만들어낸 빛이 이미 사라져버리면서 여의는 그대로 붉은 안개 속에 노출되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여의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석목의 왼손이 흡입력을 발산했다.
여의의 몸으로 침투했던 화독은 적수를 만난 듯 석목의 왼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몇 호흡 만에 여의의 체내에 있던 화독은 물론, 얼굴의 붉은 기까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석 형…….”
여의는 일어서서 놀란 얼굴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석목의 검게 타버린 왼손으로 향했다.
“지금 설명할 상황이 아니니 어서 갑시다.”
석목은 손을 휘둘러서 청익비차를 꺼낸 뒤 여의를 데리고 올라탔다.
청익비차는 빛을 내며 적염성의 방향으로 날아갔다.
여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청익비차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화장의 독기가 뿜어내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새 화독이 또다시 그의 몸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석목의 왼손이 불시에 흡입력을 발산하며 몸속의 화독을 남김없이 빨아들였다.
여의는 그제야 안심한 듯 감격스러운 눈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