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수련준비 (1)
석목은 궁금한 듯 여의를 바라보았다.
“영기가 그리 대단한가요? 웬만큼 규모가 있는 상점이라면 다 팔고 있습니다. 영석만 있으면 적염성에서는 법보도 살 수 있어요.”
여의가 웃으며 대답했다.
“법보까지요?”
석목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설령 진짜 법보라고 해도, 그걸 사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영석이 필요할 것이었다.
여의의 말을 듣고 석목은 적염성에 대해 큰 흥미가 생겼고, 그의 눈가에는 흥분된 기색이 역력했다.
“내성으로 갑시다.”
여의가 손을 흔들자 한 줄기 황금빛이 나타나 그를 태우고 날아올랐다.
“성내에서 비행해도 되나요? 금지령은 없습니까?”
석목은 놀라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건 없어요. 성이 너무 커서 도보로만 다니기에는 너무 불편해서요.”
여의가 설명했다.
석목은 묵묵히 수인을 맺었고, 두 사람은 두 갈래의 빛이 되어 성 안쪽을 향해 날아갔다.
높이 올라가니 성의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여의의 말대로 중앙에 가깝게 갈수록 더욱 번화한 게 한눈에 들어왔다.
적염성이 워낙 큰 관계로, 두 사람은 족히 이각 정도를 날아간 뒤에야 내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성과 외성은 성벽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성내에 흐르는 강을 경계로 현지인들이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내성에 내려서 주변을 살폈고, 눈앞의 광경을 본 석목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이곳의 대형 상점들은 거의 모두 무기를 팔고 있었는데, 규모와 물건의 종류 모두 외성에서 본 것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었다.
그중 한 상점이 석목의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단목으로 만든 네모난 탁자와 선반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칼과 총, 도끼 등 없는 것이 없었다. 하나같이 은은한 빛을 발하는 것으로 보아 법기인 게 틀림없었다.
그의 시선이 상가의 맨 안쪽에 있는 나무 탁자 위에 펼쳐진 결계로 향했다. 거리가 먼 데다 결계까지 쳐져 있었지만, 석목의 눈은 그 안의 무기들이 뿜어내는 강력한 영력을 느낄 수 있었다.
“영기다!”
석목의 눈이 반짝였다.
“영기를 사시려구요?”
옆에 있던 여의가 석목을 보며 물었다.
“무기 제련으로 유명한 적염성에 온 이상 당연히 사야지요.”
석목이 말했다.
“그럼 이런 상점에서는 사지 마세요. 주인들이 일반 손님한테는 진짜 좋은 물건을 안 내주거든요.”
여의가 말했다.
“덕분에 많이 배우는군요.”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저 제가 이곳에서 오래 살았으니 이 바닥에 대해 조금 더 잘 알뿐이죠. 석 형, 저는 지금 급히 처리할 일이 있는데, 같이 적염전(赤炎殿)에 다녀오시지요. 영기에 대해서는 그 일을 마치고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의의 말에 석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의는 한숨을 내쉬며 어느 골목길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고, 석목이 그 뒤를 따랐다.
거리는 매우 넓었지만 갈수록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그들도 여의처럼 다급한 표정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길을 돌아서 어느 거대한 붉은 궁전 앞에서 멈추었다.
웅대한 궁전에는 ‘적염전(赤炎殿)’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그곳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무척 많았는데, 대부분 일반 수련자로 보였다.
여의가 익숙하다는 듯 안으로 들어가자 석목도 뒤를 따랐다.
궁전의 내부는 큰 대청이었고, 그 안에는 높이가 몇 척이나 되는 흰 비석들이 놓여 있었다.
비석 위에는 깨알 같은 글씨들로 빼곡했는데, 내용을 보니 여러 가지 임무에 대한 것이었다. 재료를 수집하거나 요수를 사냥하는 등의 임무와 함께 보수도 같이 기재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영석으로 보수를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법기나 영기, 단약 등을 받을 수 있는 임무도 있었다.
문득 석목의 뇌리에 흑마문에 있을 때의 문파 임무가 스쳐지나갔다.
“석 형, 이 적염전은 적염성의 성주님이 지었습니다. 우리 같은 일반 수련자들은 보통 이곳에서 일을 받아서 영석을 벌고 있죠.”
여의가 말했다. 석목은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흰색 비석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비석을 올려다보며 작은 소리로 의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명패 같은 것을 꺼내 비석 앞에서 흔들었다. 그러자 그 위에서 한 줄기 빛이 뻗어 나와 명패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의는 석목을 데리고 비석을 돌아서 안쪽의 대청으로 들어갔다.
대청의 깊숙한 곳에는 각각 독립된 별실이 줄지어 있었는데, 방마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여의는 곧장 그중 하나로 향했다. 그 방에는 붉은 옷을 입은 한 중년 남자가 손에 든 서적을 골똘히 보고 있었다.
“만 지배인.”
여의가 얼굴에 웃음을 띠며 인사를 건넸다.
“어, 여의 왔는가? 화염정은 찾았나? 오늘이 약속한 기한의 마지막 날이네만.”
붉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는 여의를 보자 손에 든 서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만 지배인님 덕분에 순조롭게 찾았지요.”
여의가 손을 흔들자 탁자 위에 일고여덟 개의 붉은 돌이 생겨났다. 반투명해서 마치 수정같이 생긴 돌들은 그 중심으로부터 눈부시게 붉은 빛을 뿜어냈다.
붉은 정석(晶石)을 본 중년 남자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 * *
한편 석목은 여의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작은 방의 옆을 보니, 선화거(仙火居)라는 세 글자가 크게 적혀 있는 판자가 걸려 있었다.
주변의 별실들도 마찬가지였다. 방마다 사람이 한 명씩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청부당(青蚨堂), 금곡점(金穀鋪) 등의 글자가 적힌 나무판자가 걸려 있었다.
대청의 비석 위에 적힌 임무들은 대부분 이곳 상점들이 의뢰한 것이었다. 상점들이 전문가를 파견해 현장에서 상주하는 게 특이했다.
여의는 붉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와 잘 아는 사이인 듯했고, 여의는 그와 한참 대화를 나누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석 형,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여의가 그렇게 말하면서 예를 갖추었다.
“괜찮습니다.”
석목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석 형, 적염성에 있는 큰 상회와 상가, 무기 공방들은 모두 이곳에서 임무를 공표하죠. 그 덕분에 저 같은 일반 수련자들도 입에 풀칠을 하는 것이지요. 석 형도 적염성에서 오래 머물 생각이라면 이곳에서 임무를 맡아서 영석을 벌어보세요.”
여의가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전 중앙에 있는 흰색 비석들을 바라보았다.
“석두가 이런 곳에서 일을 받을 필요는 없어. 석두의 실력으로 영석을 버는 건 식은 죽 먹기거든.”
석목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채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제가 깜빡했습니다. 석 형의 실력이면 당연히 그런 걱정은 없겠죠.”
여의가 멈칫하더니 곧 말을 받았다.
“여 형, 채아가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임무를 통해 영석을 얻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군요. 저도 만약에 적염성에 오래 머무르게 된다면 그렇게 해볼까 합니다.”
석목이 채아를 흘겨보며 말했다.
“명월교를 떠나고 보니 서하대륙에서 아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었습니다.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니 달리 수련할 방도도 없었고요. 어쨌든 요수가 횡행하고 야만족이 배척당하는 시국에 적염성만한 곳이 없죠. 적어도 요수 사냥이나 광산을 찾는 일거리가 있어서 최소한 수련할 기회는 얻게 되는 셈이니까요.”
여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묻어났다.
석목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감개무량했다.
여의의 말이 맞았다. 그도 뜻밖의 만남 덕분에 성공적인 부적술사가 되지 않았다면, 이 서하대륙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적염성 같은 곳에서 여의처럼 임무를 맡는 일밖에 없었을 것이다.
“참, 석 형, 방금 영기를 구입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일반 상가에서 사느니 무기 공방에서 주문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적은 영석으로 맞춤 제작까지 할 수 있거든요. 제가 방금 방문했던 선화거도 성내에서 가장 큰 무기 공방 중 하나죠.”
여의가 말했다.
“영기를 주문한다고요? 그럼 수리도 가능한가요?”
석목이 물었다.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만들 수 있으면 수리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동안 임무를 수행하면서 선화거와 많은 거래를 했는데, 이 상가의 주인인 공서 선생은 적염성에서 손꼽히는 제련장인인데다 평판도 아주 좋습니다. 영기를 주문하거나 수리하고 싶으면 제가 소개해드리죠.”
여의가 대답했다.
석목은 그의 말을 듣고 잠깐 생각에 빠졌다.
그의 실력이 향상되면서 그가 사용해온 몇몇 무기의 위력이 상대적으로 처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운철흑도는 그 특성 때문에 그렇다 쳐도, 파천궁 같은 무기가 한 단계 더 올라가서 영기가 된다면 그 위력이 배가될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가 일강성에서 얻은, 정신력을 막아주는 녹색 망토도 흔치 않은 보물이었다. 낡고 구멍이 난 곳만 수선할 수 있다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낼 게 분명했다.
“여 형, 고맙습니다. 생각해보고 필요하면 여 형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석목이 말했다.
“석 형은 제 생명의 은인인데, 부탁이라니 가당치도 않아요.”
여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두 사람이 적염전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석목의 시선이 성 중앙의 거대한 검은 산맥으로 향했다.
산맥 꼭대기에는 거대한 흰색 궁전이 있었는데, 그곳은 희미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석 형, 저곳이 바로 성의 전송대전입니다. 화옥성(火獄城)의 전송진도 저곳에 있어요.”
여의가 눈치 빠르게 설명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길을 거두었다.
“석 형, 성 안에 큰 상점이 많은데 둘러보시겠습니까?”
여의가 물었다.
“아니, 오늘은 날도 저물었으니 나중에 둘러보죠.”
석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제 거처로 가서 좀 쉬시지요.”
석목은 잠깐 고민했지만, 여의의 제안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독립된 가옥들이 모여 있는 지역에 도착했다. 여의가 석목을 안내한 곳은 비교적 조용한 집 앞이었다.
“여기가 바로 제가 사는 곳입니다. 누추한 곳이라 민망하군요.”
여의는 그렇게 말하면서 방문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석목은 웃으며 그를 따라 들어갔다.
뜰 안의 바닥은 자갈로 깔려 있었고, 창문 앞에는 몇 그루의 대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집은 가장 안쪽에 몇 채의 크지 않은 방이 있는 간단한 구조였다.
석목은 집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고급스러운 맛은 없었지만, 한적하여 조용하게 지내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었다.
두 사람은 안채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 역시 간단한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여의는 석목을 자리에 앉히고 영차(靈茶)를 대접했다.
“이건 십만화산에서 나온 특산품인 영차 홍로차(紅露茶)예요. 맛이 아주 좋습니다.”
여의가 석목에게 차를 따라주면서 말했다.
석목은 찻잔을 들어서 입에 살짝 가져다댄 후 고개를 끄덕였다. 강한 맛에 감미로움이 더해진 것이 아주 특이했다.
석목도 먼 길을 오느라 상당히 피곤했는데, 이 영차를 마시니 피로가 사라지면서 상쾌함까지 느껴졌다.
“석 형, 적염성에서 얼마나 머무르실 생각입니까? 제가 사는 이런 집은 저렴하게 빌릴 수 있어서 장기간 지내기에 좋아요. 오래 계실 계획이라면 이런 곳을 하나 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여의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죠. 그것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용암지(熔岩池)에 대해 아십니까? 사실 용암지 하나를 빌리려고 적염성에 온 것이거든요.”
석목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용암지요? 들어보기는 했습니다. 적염성이 지하의 화산 화맥을 끌어다가 무기를 제련할 때 쓰는데, 큰 규모의 무기 공방만 소유하고 있지요. 아마도 개인에게 빌려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여의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