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수련준비 (2)
“실례지만 혹시 제련에 능하신가요?”
여의가 물었다.
“아닙니다. 제련 기술은 전혀 모릅니다. 제가 수련하는 공법이 특별해서 화영(火靈) 기운이 충분한 환경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용암지를 빌리려는 겁니다.”
석목이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여의는 잠깐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전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제가 알아보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지요.”
“감사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석목은 내심 기뻐하며 말했다.
“부탁이라니요. 몇 번이나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그런 것에 비하면 이런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죠. 여기서 잠깐만 쉬고 계시면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여의는 말을 내뱉자마자 문밖으로 금세 사라졌다.
“석두, 십만화산에 가서 직접 동굴을 하나 만들어서 수련하면 되지 않아? 뭐 하러 적염성에서 지내려고?”
줄곧 입을 닫고 있던 채아가 둘만 남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나라고 그러고 싶지 않겠어? 하지만 구전현공(九轉玄功)의 첫 단계를 수련할 때는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해. 외부로부터 그 어떤 방해를 받아서도 안 돼. 그런데 십만화산에는 요수도 많고 용암에서 산성비도 자주 내리니, 성 안에서 수련하는 게 더 안정적이야.”
석목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용암지의 환경이 구전현공을 수련하는데 최적의 환경인 건 확실해? 그냥 지하의 화맥을 끌어와서 만든 건데, 화염의 원기가 부족하지는 않을까?”
채아가 다시 물었다.
“용암지와 영화법진(盈火法陣)을 결합하면 문제없을 거야.”
석목은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두, 나가려고?”
일어서는 석목을 보며 채아가 다급히 물었다.
“응, 오는 길에 서적을 파는 상점을 봤어. 적염성에 대해서도 알아볼 겸, 지도나 그밖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좀 사두려고.”
석목은 말했다.
“잘됐다. 나도 마침 구경하고 싶었거든!”
채아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또 군것질하고 싶어서 그러지?”
“쳇, 아니야.”
채아가 투덜거렸다.
석목은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진묘계에는 수십 권의 두꺼운 서적이 들어 있었다.
그가 서적 한 권을 꺼내서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곧 여의가 마당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석목은 손에 든 서적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석 형, 좋은 소식이에요.”
여의가 방으로 들어서며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용암지를 빌릴 수 있는 건가요?”
석목이 다급히 물었다.
“알아보니 성 내에는 남아 있는 용암지가 없답니다. 그래서 적염전 선화거에 있는 지배인에게 물어봤죠. 그의 말에 따르면, 선화거에 속한 수십 개의 용암지 중 하나가 지하의 화맥이 불안정한 관계로, 제련실로 완성되지 못해서 그대로 비어 있다고 해요.”
여의가 대답했다.
“그럼 그 용암지를 빌릴 수 있다고 합니까?”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 그런데 조건이 있다는군요.”
여의가 말했다.
“어떤 조건인가요?”
석목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건이 붙는다는 건 어쨌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화관요사의 요단이 필요하대요.”
여의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화관요사요?”
처음 듣는 요수의 이름에 석목이 어리둥절했다.
“화관요사는 십만화산의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지계의 요수입니다. 그곳은 늘 독 안개가 자욱해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불가능해요. 허나 석 형은 독 안개를 제거할 방법이 있으니 그곳에 들어가는 데 문제없을 겁니다.”
여의가 말했다.
석목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이 있는 한 독 안개는 큰 문제가 안 될 것이었다. 물론 화속성(火屬性)인 요수와 싸우기에는 불리한 환경이었지만, 신중하게 상대한다면 지계 초기인 화관요사에게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선화거는 화관요사의 요단을 왜 필요로 하는 거죠?”
석목은 잠시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들의 의도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사실 다 알려진 이야기인데, 선화거 공서 선생의 아들이 얼마 전에 중병에 걸렸답니다. 그런데 십만화산에 있는 경계가 높은 요수의 요단을 약으로 써야 살 수 있다고 해요. 이미 수개월 전에 요단을 가져오는 자에게 큰 포상을 하겠노라고 현상금까지 걸었어요. 석 형의 실력이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지배인에게 이야기를 꺼내고 오는 참입니다.”
여의는 석목이 걱정하는 것을 눈치 챈 듯, 천천히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의 안색이 약간 밝아졌다.
“그렇군요. 저 때문에 신경 많이 쓰셨습니다.”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여의가 여러 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선화거 사람과 직접 얘기해보고 싶군요. 여 형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니까요.”
석목이 말했다.
“당연하죠. 석 형이 하실 의향이 있다면 당장 그쪽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여의는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일어서더니 기세등등하게 다시 문밖으로 나섰다.
“석두, 저 친구 네 일에 너무 열심인 거 아니야?”
채아가 마당을 나서는 여의의 뒷모습을 보며 비꼬듯 말했다.
“내가 임무를 완수하면 자신도 뭔가 얻는 게 있나보지. 나는 용암지만 빌릴 수 있다면 상관없어.”
석목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서적을 손에 쥐고 읽기 시작했다.
* * *
이튿날 아침, 석목과 여의는 시내의 번화가로 나갔다.
길의 양쪽은 큰 상점들로 빼곡했고, 거리는 행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화려한 오 층짜리 각루(阁楼) 앞에서 멈추었다.
각루는 붉은 기와와 흰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시원스럽게 활짝 열린 널찍한 대문 위에는 흑색 바탕에 금색 글씨로 선화거라는 세 글자가 새겨진 간판이 걸려 있었다.
이런 번화가에서도 선화거는 군계일학의 위풍을 보이고 있었다.
석목과 여의는 입구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곧 안으로 들어갔다.
각루 안쪽의 일 층은 한쪽 길이가 이삼십 장은 족히 되는 넓은 대청이었다. 안에는 백옥 선반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위에는 온갖 빛을 발하는 무기가 수백 개나 진열되어 있었는데, 모두 중급 이상의 법기인 듯했다.
상점 안은 매우 분주했다. 각각의 선반 옆에서 청색 옷을 입은 시종이 서서 각종 법기들의 성능을 설명하고 있었다.
석목은 숨을 들이마시며 선화거의 규모에 속으로 감탄했다.
“두 분, 찾으시는 법기가 있는지요? 말씀해주시면 제가 추천을 해드리겠습니다.”
청색 옷을 입은 시종이 다가와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말했다.
“무기를 사러 온 게 아닙니다.”
여의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붉은색 옥부를 꺼내보였다.
“귀한 손님이시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청색 옷을 입은 시종은 옥부를 보자 더욱 예를 갖추어 말하며, 두 사람을 위층으로 안내했다.
이 층은 비교적 작은 전시장처럼 꾸며져 있었다. 진법으로 결계가 쳐진 몇 개의 목제 선반이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는 이삼십 개나 되는 영기가 놓여 있었다. 네댓 명이 그곳에서 영기를 구경하는 중이었는데, 용모와 행동거지로 보아 그들 모두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석목은 선화거의 저력에 다시 한 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 사람은 이 층을 그대로 지나쳐서 바로 삼 층에 있는 편청(偏廳)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청색 옷을 입은 시종이 두 사람에게 영차를 한 잔씩 대접한 뒤,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석목과 여의는 입을 다물고 말없이 앉아서 기다렸다.
잠시 후, 편청의 한쪽 문이 열리더니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은 예순 살쯤 돼 보였는데, 얼굴에는 주름이 조금 있었지만 몸은 매우 정정하고 탄탄해보였으며 손발도 큼직했다. 늘 난로를 가까이해서 그런지 손바닥은 약간 누렇게 그을려 있었다.
노인의 눈매는 매서웠고, 곧게 세운 몸에서 풍기는 심상치 않은 기백으로 보아 지계의 존재가 틀림없었다.
그의 곁에는 적색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어제 적염전 선화거에서 본 지배인이었다.
“공서 대사님! 만 지배인님!”
여의는 노인을 보자 서둘러 일어나서 공손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석목도 함께 일어나서 검은색 옷을 입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여의를 한 번 보고 눈길을 돌리더니, 석목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자가 자네가 추천한 사람인가? 고작 선천 후기 정도의 경계로 어찌 그 일을 성사시키겠다는 것인가? 자네는 지금 이 늙은이를 놀리는 건가?”
노인은 붉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여 형, 어찌 된 일이오? 어제는 분명히 고수를 찾았다며, 화관요사의 요단을 거둬올 자신이 있다고 나에게 말하지 않았소?”
붉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도 석목을 보면서 화가 난 듯 눈을 부라리며, 여의를 향해 짜증스러운 투로 물었다.
“제가 어찌 감히 거짓을 고했겠습니까? 석 도우(道友)는 제 벗입니다. 수련의 경지는 선천 후기밖에 안 되지만 실력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제 혼자서 호랑이 요수를 때려눕히는 걸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또한 독 안개를 제거할 수 있는 능력까지 겸비했으니,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여의가 다급하게 말했다.
“호랑이 요수를 때려눕혔다고?”
그 말을 듣자 노인과 붉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보시오. 당신은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붉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석목을 향해 물었다. 그의 눈빛은 아까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석목은 아무 말 없이 손을 흔들어서 주먹만 한 붉은색의 무언가를 내보였다. 강렬한 원기의 파동을 내뿜는 그것은 바로 호랑이 요수의 요단이었다.
노인의 얼굴색이 약간 바뀌었다. 그러나 잔뜩 찌푸린 미간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이걸 그대가 잡았다는 걸 어찌 증명할 수 있나?”
노인이 의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물었다.
석목은 가볍게 웃으며 토템의 힘을 발휘해 강력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 기운이 어찌나 강했는지 순식간에 지계의 경지에 이르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지계의 존재셨군요. 노부가 안목이 짧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노인은 못마땅한 태도를 바로 거두고 석목에게 예를 갖추었다.
여의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석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며칠 사이에 석목에게서 놀랄만한 모습을 많이 봤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은 정말이지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평소에 기를 숨기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요. 언짢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석목이 말했다.
“허허, 인지상정이오.”
노인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런데 석 도우의 은익비술(隱匿祕朮)이 참으로 뛰어나군요. 이 노부의 감응력도 약하지 않은 편인데 전혀 눈치를 못 챘습니다.”
노인은 석목을 뜯어보며 말을 건넸다.
“과찬이십니다. 이제 공서 대사님의 조건에 맞는 듯하니, 임무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사냥해야 하는 화관요사에 대해 다른 단서는 있습니까?”
석목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노인은 얼른 대답하며 옆에 서 있는 중년 남자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중년 남자는 부랴부랴 대답하더니 품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석목에게 건넸다.
“그동안 꾸준히 십만화산에 사람을 보내 찾고 있었습니다. 지난달 마침내 화장계곡에서 지계 초기의 경지인 화관요사 한 마리를 발견했지요. 그 뒤로 수많은 고수를 보냈지만 그 요사가 매우 교활하기도 하고, 화장이라는 지역의 특성 때문에 성공한 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몇 명은 목숨마저 잃었지요.”
노인은 탄식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