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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284화 (284/916)

284화. 위험에 처하다

석목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옥간을 받아 이마에 대고 정신력을 주입했다. 그것은 십만화산의 지도였는데, 한 곳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석목은 십만화산에 관한 정보를 며칠간 연구해왔기에, 지금 보고 있는 지도가 낯설지 않았다. 표시되어 있는 곳은 적염성과 수천 리나 떨어진 곳으로, 십만화산의 깊숙한 곳이었다. 공서 대사가 이곳까지 찾았다니 그 노력이 실로 대단했다.

“위치를 알았으니 바로 가보겠습니다. 이레 뒤 반드시 화관요사의 요단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석목이 옥간을 거두며 말했다.

“석 도우가 정말 요단을 가져온다면 노부도 약조한 대로 하겠습니다. 선화거 소유의 용암지를 오 년 동안 절반 가격으로 빌려드리리다.”

노인은 희망이 담긴 눈빛으로 숙연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습니다.”

석목이 반색하며 말했다.

그는 바로 인사를 한 뒤 여의와 함께 선화거를 나섰다.

“여 형, 저는 곧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동안 애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선화거를 나서며 석목이 여의에게 말했다.

“석 형……. 아니, 석 선배, 괜찮습니다. 저는 그저 중개만 했을 뿐이지 딱히 한 것도 없는데요.”

여의는 예를 갖추며 공손하게 말했다.

“여 형, 우리끼리 격식 차릴 필요 없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동주대륙이든 서하대륙이든 서열은 실력으로 정해지는 거니까요. 석 형은 지계의 존재인 만큼 제가 선배라고 부르는 게 마땅합니다.”

여의는 정색하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선배 같은 호칭은 듣기 어색하니 부르던 대로 불러주십시오.”

석목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여의는 조금 놀라며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석목이 팔을 휘두르자 청익비차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석 형,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제가 비록 실력이 부족하지만, 경지가 낮은 요수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요.”

여의가 급히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공서 선생의 말대로 화장계곡은 위험한 곳이니 여 형은 성에 남아 있도록 하십시오.”

석목은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비차에 올라탔다.

그때 붉은 빛이 어디선가 날아오더니 석목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어딘가에 숨어 있던 채아가 나타난 것이었다.

석목은 여의에게 아무 말 없이 손을 흔들며 떠났다. 푸른빛을 뿜어내는 청익비차는 푸른색 빛줄기를 남기며 적염성 대문을 향해 날아갔다.

여의는 멀리 사라지는 한 줄기 빛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발길을 돌렸다.

* * *

일각 후 석목은 적염성을 빠져나왔다. 청익비차는 강한 빛을 뿜어내며 빠른 속도로 십만화산을 향해 날아갔다.

공기가 점점 뜨거워지더니 마치 난로 속에 있는 것처럼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 게다가 화산 특유의 연기 냄새가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은 이 뜨거운 열기를 견딜 수 있었지만, 옆에 있는 채아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그는 몸에서 붉은빛을 뿜어내며 주변에 보호막을 만들었다.

“괜찮아. 나도 이 정도쯤은 견딜 수 있어.”

채아가 석목을 보고 말했다.

“하긴. 화속성 영석을 많이 삼켰으니 이 정도 열기는 거뜬하겠지.”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보호막을 거두지는 않았다.

석목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번에 여의를 만났던 곳은 십만화산의 외곽이었다. 화산 깊숙이 들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쾅!

멀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굉음이 울렸다.

산봉우리에서 굉음과 함께 시뻘건 용암이 분출됐다. 용암은 하늘로 솟구쳐 오르더니 이내 공중에서 사방으로 퍼졌고, 주위에 용암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석목은 놀라서 급히 몸을 피했다. 그리고 한 바퀴를 돌아서 용암비가 내리는 범위를 벗어났다.

“석두, 왼쪽을 조심해!”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채아가 소리를 질렀다.

채아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회색 안개에서 붉은빛이 반짝이더니, 무언가가 번개 같은 속도로 날아와 석목의 발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것은 등에 붉은 날개가 달린, 크기가 이 척 남짓한 붉은 표범이었다.

석목은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튕겼다.

휙!

곧 검영이 번쩍이더니 두 동강이 난 표범의 시체가 아래로 떨어졌다.

“적환표(赤環豹)…….”

석목은 눈빛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이런 요수는 십만화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속성 요수였다.

“사방에 위험한 게 도사리고 있으니 주변의 움직임을 잘 살펴봐.”

석목은 푸른빛을 더욱 강렬하게 내뿜으며 속도를 냈다.

화산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위험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고, 각종 독충 요수가 속출했다. 그러나 독충 요수 따위는 석목의 실력으로 손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

반나절쯤 지나자 석목은 십만화산의 아주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그곳은 화산 분출도 잦을 뿐더러 온도도 굉장히 높았다.

그러자 독충 요수들은 오히려 보이지 않았고, 선천의 경지에 있는 요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석목이 화산 옆을 지나갈 때쯤, 몇 십 척 길이의 붉은 요금(妖禽)이 갑자기 동굴에서 날아오더니 그를 덮쳤다.

“째액!”

새 요수의 두 눈은 새빨간 색이었고, 머리에는 붉은 육관(肉冠)이 있었다. 날카로운 두 발톱은 족히 몇 척 길이에 달했는데, 마치 칼날처럼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새 요수는 두 눈에서 시뻘건 빛을 뿜으며 포악하게 울부짖더니, 날개를 펼치며 날카로운 발톱을 앞세워 석목을 향해 힘껏 공격해왔다.

석목은 코웃음을 치며 운철흑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몇 십 척이나 되는 한 줄기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고, 칼날이 번쩍이면서 새 요수의 붉은 몸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요수의 몸이 두 동강이 나면서 삽시에 하늘에서 피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새 요수의 토막난 몸뚱이가 아래로 떨어졌다.

석목은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장 앞으로 향했다.

* * *

반 시진 후, 석목이 탄 청익비차는 마침내 지도에 표시된 골짜기 위에 도착했다.

석목은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밑도 끝도 없이 깊은 골짜기 위로 붉은 안개가 자욱했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열기에는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석목은 금빛으로 변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붉은 안개 때문인지 방출된 정신력은 골짜기 안으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했다. 마치 수렁에 빠진 듯 계곡 아래의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채아, 뭔가 발견한 거 있어?”

석목이 물었다.

“안개가 너무 짙어. 나도 잘 안 보여.”

채아는 눈에서 두 줄기의 흰 빛을 뿜어내며 계곡 안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수십 척을 내려가도 붉은 안개뿐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넌 여기 있어. 내려가서 보고 올게.”

석목이 그렇게 말하며 청색 부적 한 장을 꺼내 몸에 붙이자, 푸른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한 줄기 푸른빛으로 변한 석목은 쏜살같이 아래로 내려갔다.

붉은 안개 근처까지 내려온 석목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세숫대야만 한 크기의 화염구 일고여덟 개가 아래쪽으로 날아갔다.

우르릉! 쾅!

계곡 아래에서 한바탕 굉음이 울려 퍼졌다. 화염구들이 붉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서 폭발한 것이다.

그러자 강한 충격으로 인근의 안개가 걷히면서 수십 장 크기의 공간이 드러났다.

주변의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다시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아가기 전, 석목은 청익비차를 움직여서 쏜살같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화염구가 터준 길을 따라 이삼백 장 아래로 내려가자 그제야 비로소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은 단단한 암반이 아닌 검은 모래밭이었다.

석목은 지면과 칠팔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선 채 위를 올려다봤다. 주변의 붉은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화염구가 뚫어놓은 공간을 어느새 메우고 있었다.

석목은 다시 고개를 내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계곡 안의 안개는 위쪽보다는 훨씬 옅었다. 그러나 석목의 눈으로 봐도 겨우 반경 오십 장 이내에 있는 사물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주변에는 크고 작은 검붉은 돌만 있을 뿐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 순간, 석목의 코가 몇 차례 실룩거렸다. 그는 갑자기 청익비차를 조종해서 쏜살같이 위쪽으로 날아올랐다.

석목이 날아오른 순간 아래쪽의 모래밭이 갑자기 갈라졌고, 그 안에서 길이가 수십 장이나 되는 거대한 뱀이 새빨건 입를 쩍 벌린 채 위로 솟구쳐 올랐다. 뱀의 입은 간발의 차이로 석목이 날아오른 허공을 물었다.

“큰일 날 뻔했다.”

신속하게 허공으로 떠오른 석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래에 있는 뱀을 살펴보았다. 뱀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던 석목은 가슴이 덜컹했다.

뱀의 머리에는 등롱(燈籠)만 한 크기의 샛노란 눈이 달려 있었고, 몸 전체에는 맷돌 크기만 한 붉은 비늘이 돋아 있었다. 턱 양쪽에는 길고 검은 두 갈래의 수염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건 정수리 부위에 솟아 있는, 핏덩이처럼 검붉은 색의 사관(蛇冠)이었다. 멀리서 보니 마치 불로 된 연꽃 한 송이를 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계 중기의 존재잖아! 지계 초기의 요수만 있다고 하지 않았나?”

석목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공서 선생이 제공한 정보가 틀린 게 아니라면, 석목이 운이 지지리도 나쁜 게 분명했다.

눈앞에 있는 화관요사는 최소한 지계 중기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유리한 화속성 환경에 있는 만큼,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 실력은 지계 후기에 가까울 것이었다.

그러나 석목은 오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기운을 느낀 것이다. 그는 재빨리 비차를 조종해서 쏜살같이 한쪽으로 날아갔다.

휘익!

항아리처럼 굵은 붉은색의 뱀 꼬리가 안개 속에서 불쑥 나타났고, 그것은 석목이 있던 자리를 후려치고는 다시 붉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석목은 몸을 바로 세울 틈도 없이 입을 크게 벌려서 한 줄기의 금색 검영을 내뿜었다. 검영은 문짝만 하게 커지더니 곧바로 뱀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석목은 대여섯 개의 부적을 날려 보냈다.

화관요사는 두 눈에서 노란빛을 내뿜더니 몸을 기이하게 흔들었다. 그 순간 요사의 몸이 주변의 붉은 안개에 녹아든 것처럼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바람에 금색 검영은 허공을 내리찍었다.

그때 석목의 동공이 금색으로 변했고, 그가 손을 휘두르자 대여섯 개의 부적이 방향을 틀었다. 동시에 부적들은 번뜩이는 빛을 내더니 무수한 얼음송곳과 번개로 변했다.

굉음이 크게 울려 퍼지며 여러 개의 빛이 공중에서 끊임없이 교차했다.

이어서 금빛이 번쩍이면서 몇 장 길이의 금색 검영이 뒤따라가서 화관요사를 내리쳤다.

펑!

붉은 안개가 솟구치면서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던 거대한 뱀의 머리가 서서히 드러났다.

석목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금전검에 고급 부적까지 동원했는데도 화관요사의 비늘에 고작 흰 자국과 약간의 패인 상처만을 남겼을 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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