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기발한 승리
상처를 입고 격노한 화관요사는 붉은 화관에서 강한 빛을 발사하더니, 마치 고래가 물을 빨아들이듯 주변의 붉은 안개를 흡수했다. 그러자 자욱했던 안개가 조금 옅어졌다.
그때 석목은 이미 운철흑도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상황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고 청익비차를 급히 움직여 벗어나려 했다.
그 순간,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면서 거대한 뱀 꼬리가 소리 없이 다가와 석목을 후려쳤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석목은 나지막한 소리를 내는 동시에 손에 든 흑도를 힘껏 휘둘렀고, 몇 장 길이의 붉은 도광(刀光)이 기세등등하게 뻗어나갔다.
땅!
붉은 도광이 뱀 꼬리의 비늘을 때리면서 사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그럼에도 뱀 꼬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꼬리를 거두는 속도가 다소 느려졌을 뿐이었다.
석목은 그 순간을 틈타 청익비차를 조종해서 뒤쪽으로 날아갔다.
바로 그때, 화관요사의 머리 위에 있는 붉은색 화관이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면서, 번개 같은 속도로 십여 장 길이의 붉은빛 광선을 내뿜었다.
그러나 석목은 위험에 처했음에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법결을 외웠다. 그러자 그의 가슴에서 검은빛이 번지더니 피부에서 검은 비늘이 생겨났고, 청익비차는 계속해서 앞으로 날아갔다.
쾅!
붉은 광선과 청익비차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폭발했다. 붉은 불의 구름이 겹겹이 피어올라서 석목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 순간 석목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진기가 흩어지며 그의 피부에 생겨났던 비늘은 뜨거운 구름 속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온몸이 피범벅이 된 석목은 정신을 잃은 듯, 두 눈을 감은 채 허공에서 그대로 떨어졌다.
휙!
화관요사의 굵은 뱀 꼬리가 아래에서 솟구쳐 오르더니 석목의 몸을 단단히 휘감아 시뻘겋게 벌어진 입으로 가져갔다.
뱀 요수는 포악한 눈빛으로 자홍색 혀를 날름거리며 석목을 삼키려 했다. 그리고 꼬리를 주둥이에 가까이 대는 순간 힘이 살짝 풀렸다.
뱀 요수의 입속으로 떨어지려는 찰나, 석목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신속하게 오른팔을 내밀어서 날름거리고 있는 뱀의 혀를 움켜잡고 그대로 입속으로 들어갔다.
뱀 요수의 입속은 캄캄하고 코를 찌르는 비린내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오른팔로 뱀의 혀를 잡지 않았더라면 벌써 먹잇감이 되어 목구멍으로 넘어갔을 터였다.
석목의 두 눈이 금색으로 변하자 주변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시커먼 왼손을 내밀었고, 다섯 손가락을 모아서 장도(長刀)를 만들어 뱀 요수의 혀를 찔렀다.
푸욱!
석목의 왼손이 거침없이 파고들자 비린내 나는 선혈이 뿜어져 나오며 그의 얼굴에 가득 튀었다.
순간 주위가 갑자기 환해졌다. 통증을 느낀 뱀 요수가 석목을 떨어뜨리려 입을 벌리고 혀를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석목은 모처럼 잡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의 왼손이 끊임없이 혀를 내리 찔렀고, 뱀 요수의 혀는 금세 피범벅이 됐다.
뱀 요수는 몸뚱어리를 미친 듯이 흔들며 두 눈을 사납게 치켜뜨더니, 혀를 독니가 있는 방향으로 휘갈기며 동시에 위아래 턱을 다물었다. 한 척이나 되는 독니로 석목의 몸을 그대로 뚫어버릴 심산이었다.
바로 그때, 석목은 혀를 찌르던 왼손을 멈추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독니를 힘껏 내리쳤다.
펑!
굉음이 울렸고, 족히 한 척이나 되는 독니가 석목의 맷돌 같은 주먹 한 방에 산산조각이 났다.
석목은 위를 한번 훑어보았다. 그리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뱀 혀를 잡고 있던 오른손을 놓으며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발아래에서 하얀 기운이 생겨나면서 그를 뱀 요수의 위턱으로 쏜살같이 밀어올렸다.
이 모든 과정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 * *
뱀 요수는 괴롭다는 듯 무려 십여 장이나 되는 몸을 골짜기 바닥에서 위아래로 뒤틀었다. 그리고 거대한 꼬리를 마구 흔들어서 주위의 암벽을 내리쳤다. 그러자 거대한 바위들이 부서져서 작은 돌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채아는 초조한 기색으로 골짜기 위쪽의 허공에서 빙빙 돌면서 하얀 눈빛을 쏘아보며 어렴풋이 보이는 아래의 상황을 살피는 중이었다.
채아는 몇 차례나 아래로 내려가서 석목을 도우려고 시도했으나, 붉은 안개에 닿는 순간 뜨거운 열기에 밀려나기를 되풀이했다.
그때 갑자기 뱀 요수의 머리 꼭대기에서 커다란 소리가 나더니, 피가 튀며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이어 부서진 비늘과 살갗 사이로 피범벅이 된 그림자가 뚫고 나왔다.
바로 석목이었다.
그는 왼손을 불끈 쥔 채 높이 치켜들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뱀 요수의 거대한 몸집이 허공에서 잠시 멈추더니 빠른 속도로 추락했고, 한쪽으로 쓰러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불이 꺼지듯 눈빛이 어두워졌다.
석목은 허공에서 한 바퀴 구르며 그 옆에 내려섰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뱀 요수의 몸에 난 비늘들은 몹시 견고했고, 화속성 환경에서의 힘은 석목이 전날 죽인 호랑이 요수보다도 훨씬 강했다. 급박한 상황에서 지혜와 왼손의 힘을 쥐어짰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요수의 먹잇감이 될 뻔했다.
석목은 화속성 영석을 꺼내 몸속에 영력을 주입했다. 그제야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를 숙여 자신의 옷을 보았다. 옷에는 끈적끈적하고 비린내가 풍기는 뱀의 피와 체액이 잔뜩 묻어 있었는데, 뱀의 피에 부식되어 온통 구멍이 나 있었다. 그는 옷을 벗어던지고 새 옷을 꺼내 입었다.
“석두, 괜찮아?”
채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괜찮아. 뱀 요수는 내가 죽였어. 위에서 조금만 더 기다려.”
석목은 채아를 안심시키고 뱀 요수의 시체 옆으로 갔다. 그리고 정신력을 발산해서 시체를 훑어보았다.
잠시 후 눈썹을 치켜 올린 그의 눈가에 기쁜 기색이 돌았다.
석목은 한 손으로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금빛이 날아오더니 작은 금색 단도로 변해 그의 손아귀로 들어왔다. 바로 금전검이었다.
그가 다시 손을 흔들자 금전검이 뱀 요수의 아랫배를 찔렀고, 석목은 조심스럽게 배를 갈라서 그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빼낸 그의 손에는 주먹만 한 홍백색의 요단이 쥐어져 있었다.
요단은 윤택하고 반짝반짝 빛이 났으며, 표면에서 은은한 빛을 발사하며 놀라운 영적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석목은 손에 든 요단을 보고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용암지와 맞바꿀 지계 화관요사의 요단을 조심스럽게 챙겨 넣었다.
석목은 요단을 거둔 후 다시 뱀 요수의 시체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뱀의 껍질과 뱀 힘줄을 떼어내서 진묘계에 넣었다.
작업을 마친 석목은 한숨을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뱀 요수의 소굴인 만큼 다른 보물도 많을 터였다.
뱀 요수가 죽자 골짜기에 자욱했던 안개가 점차 옅어졌다. 시야도 전처럼 흐릿하지 않아서 그 안이 꽤 넓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본 석목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산 절벽에 안개가 덮여 있는 너머로 사람의 키만 한 동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급히 다가가 동굴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커멓고 깊은 동굴 안쪽에서 비린내가 풍겨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뱀 요수의 소굴인 게 틀림없었다.
석목은 눈가에 흥분한 기색을 띠며 진기로 온몸을 감싸고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아래쪽을 향해 뻗어 있었지만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아서, 그는 금세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동굴의 안쪽에는 수집 장 크기의 공간이 있었는데, 중앙에는 검은색의 돌들이 쌓여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석목은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표정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순간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동굴 중앙에 있는 검은 돌 앞으로 걸어갔다.
‘이것은 설마…….’
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수 척 길이의 금빛 검기가 뿜어져 나와서 검은 돌을 베었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은 돌이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
검기에 베인 돌덩이가 부서지자 그 안에 있는 붉은 부분이 드러나더니 희미한 붉은 빛을 뿜어냈다.
‘역시!’
석목은 크게 기뻐하며 손을 연신 움직여서 두 개의 금빛 검기를 연이어 내뿜었다.
돌 표면의 검은색 부분이 완전히 깨져 벗겨지면서 붉은색 결정이 드러났다. 영롱한 붉은빛을 뿜어내는 정석(晶石) 내부에는 또 하나의 붉은 무늬가 있었는데, 상당히 신비롭게 보였다.
석목은 자세히 보려고 정석을 주우려 했다. 그 순간 그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정석의 표면은 아주 뜨거웠고 무게 또한 상당히 무거웠다. 크기는 사발만 한 정도였지만 백 근은 족히 넘는 것 같았다.
그것을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던 석목의 얼굴에 다시 희색이 돌기 시작했다.
정석은 경이로운 영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떤 물건인지는 몰라도, 뱀 요수가 특별히 이곳에 보관해놓을 정도라면 아주 진귀한 물건인 게 틀림없었다.
석목은 나머지 돌들도 깨뜨려서 그 안에 있는 정석을 모두 챙겼다.
그는 일을 마치고 동굴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둘러본 뒤, 별다른 것이 없자 몸을 돌려서 밖으로 나갔다.
일각 후, 석목은 계곡에서 날아서 위로 올라왔다.
“석두, 난 네가 뱀 요수한테 잡아먹힌 줄 알고 놀랐잖아.”
석목이 나오자 채아가 다급히 다가와서 말했다.
“별 일 없었어.”
석목이 말했다.
“일은 잘 끝냈어?”
채아가 묻자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 이제 가자.”
채아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쪽 계곡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청익비차를 타고 적염성 쪽으로 향했다.
떠난 지 하루 만에 적염성으로 돌아온 석목은 바로 선화거로 향했다.
석목은 선화거의 편청(偏廳)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앉아 있었고, 채아는 옆에서 간식을 먹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더니 공서 선생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는 들뜬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곧 붉은 옷을 입은 지배인이 그의 뒤를 따라서 들어왔다.
“석 도우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어떻게 됐습니까?”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석목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은 노인을 힐끗 쳐다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공서 선생님, 선생님께서 주신 단서에 문제가 있던데요?”
“무슨 말씀이신지?”
노인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당신들, 하마터면 석두를 죽일 뻔했어! 지계 초기의 요수만 있다고 해서 갔는데 지계 중기가 있잖아!”
석목이 입을 열기도 전에 채아가 쌕쌕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노인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옆에 서 있는 지배인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게…… 그래서 그런 것이었군. 어쩐지 한 달 전부터 뱀 요수가 보이지를 않더군요. 그 뒤로 여러 명을 보냈는데 돌아오는 이가 없었소. 그럼 석 도우는 어떻게…….”
“운 좋게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석목은 두말없이 화관요사의 요단을 꺼내보였다.
주먹만 한 크기의 요단은 붉은색과 흰색의 두 가지 빛을 발산하며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안목이 좋은 사람은 이 요단이 결코 지계 초기 요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것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당연히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석목의 손에 있는 요단을 보고 두 눈을 반짝이며 숨을 몰아쉬더니, 참지 못하고 앞으로 한 발 다가와서 손을 뻗어 요단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석목이 재빨리 눈썹을 치켜 올리자 요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공서 선생님, 제가 약속대로 요단은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제공한 정보가 틀리는 바람에 위기에 빠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막심한 피해를 본 건 분명하니, 이를 어떻게 보상하실 건가요?”
석목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멈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석 도우를 위험에 빠뜨린 건 내 불찰이오. 그래도 석 도우가 비범한 실력으로 요단을 가져왔으니 감사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습니다. 이전에 용암지를 오 년간 반값으로 내드린다고 했는데, 그 반값의 절반만 받겠소.”
그러나 석목은 노인의 말을 듣고도 요단을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영차를 한 모금 마시며 천천히 말했다.
“약으로 쓰기에는 지계 초기 요수의 요단보다 중기의 요단이 약효가 훨씬 뛰어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노인은 주판을 굴리더니 이를 악물며 말을 내뱉었다.
“석 도우, 용암지를 그대에게 오 년간 공짜로 빌려주리다!”
노인은 옆에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를 힐끔 보았다. 중년 남자는 알겠다는 듯 손바닥만 한 붉은색 영패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영패의 한 면에는 기이한 부적 몇 개를, 다른 한 면에는 ‘19’라는 숫자를 새겼다.
“19호 용암지의 출입 영패입니다. 받으시지요.”
붉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석목에게 영패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