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주집(籌集)
“공서 선생님께서 이렇게 너그러우시니,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석목은 붉은 영패를 받아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요단을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요단을 받아서 진귀한 보물을 얻은 것 마냥 눈앞에 대고 자세히 살펴보더니, 감격을 금치 못했다.
잠시 후, 노인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석목을 보며 공손히 말했다.
“석 도우, 고생이 많으셨을 테니 그만 쉬시오. 노부는 이만 가보겠소. 만 집사, 잘 보살펴드리게. 앞으로 선화거의 귀한 손님으로 모시도록.”
노인은 말이 끝나자마자 잠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잰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붉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는 얼른 대답하고서 몸을 돌려 석목에게 말을 건넸다.
“석 도우, 피곤하실 테니 잠시 쉬시고 용암지는 오후에 둘러보는 건 어떠신지요?”
“만 집사님, 괜찮다면 지금 볼 수 있을까요?”
석목이 말했다.
“물론입니다. 가시죠.”
중년 남자가 먼저 바깥을 향해 걸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선화거를 나와서 성 중앙에 있는 검은 산봉우리를 향해 걸어갔다.
“성 안에 있는 흑염산은 지하 화맥을 통해 근방에 있는 백여 개의 활화산과 연결되어 있지요. 그곳에서 화기를 끌어와서 용암지에 끊임없이 불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중년 남자는 걸으면서 석목에게 설명했다.
“그렇군요.”
석목은 점점 가까워지는 검은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갔고, 잠시 후 일행은 금세 봉우리 근처에 도착했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그 크기를 실감하지 못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높이가 족히 이삼백 장은 높아 보이는 게 매우 웅장했다.
쾅! 쾅!
산봉우리에 가까워질수록 어렴풋이 굉음이 들려왔다. 마치 내부에서 무언가가 암벽을 계속 치고 있는 듯한 소리였다.
중년 남자는 석목을 데리고 발걸음을 쉬지 않으며 산기슭의 대전 입구에 이르렀다.
대전 입구에 서 있던 호위는 중년 남자와 석목을 보더니 막지 않고 들어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두 사람은 대전을 지나 검은색 통로로 들어섰다.
검은 통로는 꽤나 길었고, 한참을 걷자 눈앞에 두 갈래의 길이 나왔다. 앞쪽에서는 붉은 불빛이 새어나왔고, 웅성거리는 사람 소리와 망치를 두드리는 소리도 들렸다.
“흑염산에는 총 백여 개의 용암지가 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성주부(城主府)의 소속이지만, 실은 1할만 남기고 나머지는 경매를 통해 연간 임대로 내줬지요. 적염성에서는 아주 중요한 자원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2할은 선화거 소속이고, 대부분 제련 공방으로 개조됐어요. 저기가 바로 용암지예요. 바로 선화거 1호 공방입니다.”
중년 남자가 말했다.
석목은 공방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지만, 이곳은 무기를 만드는 비밀 장소이기 때문에 외부인의 출입이 허락될 리 없었다.
두 사람은 계속 앞으로 걸었다. 길의 양쪽에서 갈림길이 나타났다 없어지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마침내 통로의 끝부분이 나왔다.
앞에는 수십 장 높이의 검은 석돌이 있었다. 그 위에서 빛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니 결계가 쳐져 있는 게 분명했다. 석문의 중앙에는 ‘19’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석 형, 영패로 결계를 여시지오.”
중년 남자가 말했다.
석목은 빨간 영패를 꺼내서 진기를 불어넣은 뒤 석문에 대고 흔들었다.
영패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한 줄기 노을빛이 날아가서 석문을 때렸다. 그러자 석문이 갑자기 하얀빛을 발하더니 빠르게 돌다가 잠시 후 사라졌다.
이어 석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더니, 좁고 검은 통로가 드러나면서 뜨거운 열기가 밀려왔다.
“용암지는 지하에 있어요.”
중년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 사람은 석문으로 들어서서 검은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나선형으로 된 통로를 따라 내려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십여 장 크기의 지하 공간이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지하 공간은 붉은빛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바닥이며 벽이며 온통 붉은빛을 발해서 눈을 뜨지 못할 정도였다.
벽과 땅에는 줄기줄기 부문이 새겨져서 거대한 진법이 형성되어 있었다.
중앙은 수 장 크기의 못인데 주변이 여덟 개의 흰색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못 안에서 기포를 생성하며 부글부글 들끓고 있는 것은 적색 용암이었다.
가끔은 용암이 용솟음치면서 튀어오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연못 주변의 흰색 기둥들이 하얀빛을 발하면서 솟아오르는 용암을 막아냈다.
지하 공간에는 화속성 농도가 매우 높았고, 공기가 뜨거워서 숨을 쉴 때 목이 따가워질 정도였다.
“석 도우, 여기가 바로 용암지입니다. 어떤가요?”
중년 남자가 물었다.
“좋네요.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지하 공간 전체를 둘러본 석목은 화속성 영기를 느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중년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몸에서 흰색 옥간을 꺼내 석목에게 건넸다.
“이 옥간에는 용암지의 사용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어요. 이곳을 이용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중년 남자가 말했다.
“만 집사님, 감사합니다.”
석목은 옥간을 받으며 말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중년 남자가 말했다.
“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석목이 인사하자 중년 남자도 예를 갖추고는 밖으로 나갔다.
석목은 옥간을 이마에 대고 정신력을 주입했다. 족히 일각이 지나서야 눈을 뜬 그의 표정은 왠지 어두웠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용암지 옆에 있는 기둥으로 다가갔고, 쪼그리고 앉아서 기둥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창문 같은 격자가 열리면서 안에 있는 원형 석조가 보였다.
석조 내에는 원형 법진이 있었는데, 그 위에 일고여덟 개의 중급 영석이 꽂혀서 윙윙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석목은 격자를 닫고 다른 기둥으로 가서 같은 방법으로 열어보았다. 그곳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석목은 여덟 개의 기둥을 다시 한 번 훑어보더니, 안색이 흐려지면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탄식했다.
옥간에 내용에 따르면 용암지의 금제 진법은 팔문취영진(八門聚靈陣)이었다. 방호력과 통제력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화속성의 영기를 모을 수 있는 한편, 용암지가 분출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강한 진법을 유지하려면 소모되는 영석도 매우 많을 게 분명했다. 옥간에 적힌 대로라면 한 달에 팔십여 개의 중급 영석이 필요했다.
그러나 영화진 설치와 구전현공(九轉玄功)을 연마하는 데도 많은 비용이 필요한 상황이라, 그가 아무리 많은 영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석목은 한참을 서 있다가 용암지를 나섰다.
그는 흑염산을 뒤로 한 채 여의가 사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석목은 어깨에 있는 채아를 돌아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십만화산에서 돌아온 후 채아는 늘 맥이 없고 몽롱해 보였다. 길에서도 무슨 일인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채아, 왜 그래? 어디 아파?”
석목이 어깨를 살짝 들며 물었다.
채아는 눈을 반쯤 뜬 채 석목을 한 번 보고 고개를 저었다.
석목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급히 물었다.
“혹시 십만화산에서 장독을 빨아들인 거 아니야?”
“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좀 쉬면 괜찮아.”
채아가 말했다.
석목은 손가락을 채아의 머리 위에 대고 진기를 불어넣어 몸속을 확인했다. 그리고 장독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좀 쉬어.”
석목은 소매를 휘둘러 채아를 안쪽에 넣고 빛을 반짝이며 속도를 높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여의의 집에 도착했다.
“석 형, 오셨군요. 일은 잘 처리했어요?”
석목이 도착하기 무섭게 여의가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
“살짝 위험하긴 했지만 그래도 약속대로 뱀 요수의 요단을 가져왔어요. 그래서 공서 선생이 용암지도 빌려줬죠.”
석목이 말했다.
“정말인가요? 정말 축하드려요.”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여 형, 제가 살 게 좀 있는데, 여 형이 저보다 적염성을 훨씬 더 잘 아니까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좀 알아봐 주세요.”
석목이 웃으면서 옥간 하나를 꺼내 여의에게 건네며 말했다.
옥간에는 구전현공을 수련하는데 필요한 물건의 목록이 들어 있었다. 모두 화속성 단약과 영화법진을 설치하는데 필요한 재료들이었다.
여의는 옥간을 받아 정신력을 주입시켰다. 그는 한참을 보다가 미간을 점점 찌푸리더니, 일각이나 지나서야 옥간을 내렸다.
그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석 형이 사려는 물건들은 다 보기 드문 것이네요. 화속성 단약은 제가 어찌어찌 알아볼 수 있지만, 화강석(火罡石)은 어디서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서하대륙 동부지역에서 나오는 화속성 광석 같은데, 십만화산 근처에서는 이런 광석이 생산되지 않거든요.”
석목은 그 말을 듣자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화강석이 없으면 영화법진을 설치할 수가 없었다.
“석 형,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제 견문이 짧아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으니 큰 상점에 가서 물어볼게요. 혹시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여의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기를 바라야죠.”
석목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단약은 걱정 마세요. 사흘 내에 필요한 만큼 사다 드리겠습니다.”
여의가 자신 있게 가슴을 치며 장담했다.
“이미 많은 걸 도와주셨는데 여 형을 또 번거롭게 할 수는 없어요. 어디서 살 수 있는지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석목이 말했다.
“그다지 큰일도 아니니 염려 마세요. 제가 금방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석목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주머니를 꺼내 여의에게 건넸다.
“이건 영석 삼만 개예요. 단약을 사고 남은 건 제 고마움의 표시라고 생각하고 받으십시오.”
“이……이렇게나 많이요?”
여의는 주머니를 받아들고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그는 적염성에서 요수를 사냥하고 광석을 캐서 영석을 벌었는데, 운이 좋아야 한 달에 수백 개를 손에 쥘 뿐이었다. 그런데 석목은 한 번에 삼만 영석을 내놓은 것이다.
“여 형, 사양하지 마세요. 사양하면 앞으로는 아무 부탁도 안 할 겁니다.”
여의가 뭔가를 말하려고 하자 석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석 형. 그럼 안심하고 기다리세요.”
여의는 머뭇거리며 머리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석목은 여의가 나가는 것을 보고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바로 그때, 천둥소리가 나더니 한 줄기 검은빛이 뜰에 내려왔다. 곧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서 선생님.”
석목은 눈을 반짝이며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하하 석 도우! 그대 덕분에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의 병세가 좋아졌소. 그래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용암지를 무료로 빌려주셨으니 감사는 제가 해야지요.”
석목은 그렇게 말하며 노인을 집 안으로 들었다.
“허허, 별일 아니오. 만 집사에게 듣자니 석 도우는 얼마 전에야 적염성에 왔다는데, 어째서 선화거의 객경 장로로 들어올 생각을 한 것이오? 물론 선화거는 생각하는 것보다는 규모가 더 크다오.”
노인이 말했다.
“사실 적염성에 와서 용암지를 빌린 건 폐관 수련을 하기 위해서이지, 세력에 합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석목이 솔직하게 말했다.
“허허, 괜찮소. 그럼 폐관 수련은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노부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편하게 말하시오.”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는 석목을 포섭하려는 의도가 아주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