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허공에 난 구멍
시간이 가고 계절이 바뀌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삼 년 여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흑염산 19호 용암지에서 하늘을 찌르는 듯한 붉은빛이 뿜어져 나 왔다.
영화진 속에 앉아 있는 석목의 몸은 붉은빛으로 뒤덮여 있었고, 붉은빛 속에는 금빛도 섞여 있어서 마치 거대한 붉은 누에고치에서 금빛 박동이 이는 듯 보였다.
붉은 빛이 터지면서 무서운 기운이 동굴 전체를 순식간에 휩쓸었다. 그 기운이 닿는 곳마다 썩은 나무가 꺾여나가듯 떨어졌다.
쾅!
석목의 안색이 푸른빛과 붉은빛으로 번갈아 바뀌면서 온몸의 근육이 부풀어올랐다. 단전에서 진기가 한바탕 소용돌이치며 급격히 상승하더니, 속도가 빨라지면서 끈적끈적하고 촘촘하게 변했다.
진기의 소용돌이는 서서히 작아졌지만 밀도는 더욱 높아졌다. 결국 그것은 천천히 도는 맑은 액체로 변했다.
동시에 붉게 물들었던 석목의 몸도 점차 거무스름한 피부색을 되찾았고, 표면에는 검은 재가 덮여졌다. 또한 주변에서는 붉은빛이 불안정하게 감돌았다.
그때 갑자기 붉은빛이 그의 뒤로 밀려오더니 세차게 빛을 발했다. 그 빛은 마침내 한 척 크기의 붉은 원숭이로 변했다.
휙!
원숭이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길이가 족히 이삼십 척이나 되는 붉은 불의 날개를 펼쳤다.
붉은 원숭이의 모습이 점점 또렷이 드러나면서, 입속에서 끊임없이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 붉은빛이 발사되자 붉은 원숭이는 가슴팍을 치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땅과 산이 흔들리고 암벽이 갈라져서 암석이 줄줄이 떨어졌다.
눈을 번쩍 뜬 석목의 눈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최근 삼 년 동안 그는 구전현공 첫 단계를 성공적으로 수련했을 뿐더러, 경매에서 얻은 대력마원(大力魔猿)을 7단계까지 연마해 힘과 육신의 강도를 한 단계 높였다.
그는 오늘에서야 드디어 적원화경의 새로운 경지를 돌파한 것이다.
이제 석목은 단전의 기부를 액체로 만들어서 무도법상(武道法相)을 응집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그의 경지가 한 단계 올라갔다는 걸 의미하는 동시에, 진정한 지계 무인이 됐다는 뜻이었다.
석목은 온몸에서 힘이 불끈불끈 솟는 것 같았다. 비록 전에도 토템을 이용해서 일시적으로 지계의 경지에 올라설 수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확고하고 통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게다가 반서(反噬)의 우려가 있는 토템과는 비교할 바가 안 되었다.
석목이 수인을 맺자 머리 위의 적원법상이 갑자기 입을 쩍 벌렸다. 입속에서 순도 높은 한 줄기 화염이 뿜어져 나와서 순식간에 그의 앞에 불의 구름을 형성했다. 공기는 뜨거운 화염에 의해 일그러지며 변형됐고, 숨이 막힐 듯한 열기가 주변을 향해 휘몰아쳤다.
석목의 얼굴에는 기쁜 내색이 역력했다.
‘혼원진화(混元真火)!’
이것이 바로 적원화경(赤猿火經) 십 단계에 이르렀을 때 습득하게 되는 법기 혼원진화였다. 책 속에는 혼원진화가 천지 혼돈의 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물과 영물(靈物)을 상대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석목이 의식을 움직이자 머리 위에 있는 적원법상이 소리를 내며 거대한 붉은빛이 되어 몸속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곧바로 중급 영석을 꺼내 손에 쥐고 진기를 회복했다.
적원법상과 혼원진화를 사용하면 진기의 소모가 매우 컸다. 지금 막 지계 초기 단계에 오른 석목의 진기로는 적원법상을 불러내서 혼원진화를 한 번 내뿜을 수 있을 정도였다.
여러 개의 중급 영석을 연거푸 흡수한 후에야 석목은 비로소 몸속의 진기를 회복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다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불의 날개 한 쌍이 빠른 속도로 양옆을 향해 쭉 뻗었다.
석목은 두 날개가 펼쳐지자 공중으로 떠올라서 용암지 안을 날아보았다. 그가 나는 속도는 매우 빨랐고, 움직임도 아주 민첩했다.
잠시 후 석목이 손을 휘두르자 등 뒤의 두 날개가 붉은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이어 그는 몸을 허공에서 한 바퀴 돌리며 안정적으로 내려섰다.
법상으로 불의 날개를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적원법상을 곧바로 불러오는 쪽이 체력소모가 훨씬 덜했다. 불의 날개가 있으면 적들과 마주했을 때 독수리처럼 날아올라 방어하거나 공격할 수 있었다. 이는 청익비차보다 몇 배나 더 효율적일 게 분명했다.
석목은 일어나서 손을 휘둘러 영화진의 작동을 멈췄다.
그는 까맣게 탄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하면서 만족감을 드러냈다.
구전현공 첫 단계를 성공적으로 돌파하자 왼손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게다가 지계에 진입한 것에 탈태결(脫胎決)의 7단계까지 더해지면서, 왼손을 통제하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비록 아직 변이하기 전의 수준까지는 회복되지 않았지만, 사용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석목은 왼손에서 시선을 거두고 주먹을 쥐었다. 그가 체내의 진기를 가동하자 주먹 주위의 공기가 부글부글 끓더니, 거센 열기가 갑자기 그의 왼손 주먹으로 모여들었다.
석목의 왼손 온도가 갑자기 높아졌고, 마치 뜨거운 용암 속에 손을 담근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동시에 몸속의 정혈이 마구 끓어오르며 거대한 힘이 몸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놀란 석목은 온 몸의 힘을 왼손에 몰아서 허공으로 주먹을 힘껏 내뻗었다.
쾅!
엄청난 위력이 기다렸다는 듯 왼손에서 뿜어져 나와서 허공에 거대한 구멍을 냈다. 구멍 주위에 생긴 아주 작고 새까만 균열들은 오랫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뜨거운 파문이 주먹을 타고 겹겹이 주위의 암벽으로 날아가더니, 삽시간에 양쪽의 암벽이 녹으면서 용암이 흘러내렸다. 암벽 전체가 마치 밝은 광막을 한 층 덮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석목 자신도 그 광경을 보고 놀랐다.
허공을 깨뜨리는 강한 신통력은 천위의 경지에 이른 자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그것을 구전현공 첫 단계에서 한 방에 해내다니, 앞으로 나머지 것들을 수련하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지 석목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석목은 단전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한 느낌이 들었지만, 왼손의 위력만큼은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천위의 강자를 만나더라도 겨뤄볼 만할 것이었다.
“석두, 출관했어? 뭔데 그렇게 요란스럽게…….”
갑자기 채아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이 몸을 돌려보니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아가 날아오고 있었다. 방금 전의 수련에 용암지가 흔들리면서 먼지바람을 맞은 듯했다.
“깼어?”
석목이 반가운 투로 말했다.
채아는 석목이 폐관하기 전부터 깊은 잠에 빠진 지 벌써 삼 년이 넘었다.
“이렇게 요란스럽게 구는데 잠을 잘 수 있겠어? 안 그래도 어떻게 되어가나 보려던 참인데, 갑자기 큰 바위가 떨어져 하마터면 깔릴 뻔했잖아.”
채아가 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채아의 머리 위에 깃털 세 개가 나 있었다. 흰색 깃털 옆에 반짝반짝 빛나는 금빛 깃털이 또 한 개 자라난 것이다.
“채아, 금빛 깃털은 언제 자란 거야?”
석목이 오른손을 뻗어 채아의 머리를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이봐, 살살 만져. 어때? 예쁘지?”
채아가 자랑하듯이 말했다.
석목이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채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굳게 닫힌 출구를 바라보았고, 이어 그의 두 눈에서 금색이 섞인 하얀빛이 감돌았다.
“여의가 왔어.”
채아가 말했다.
석목은 잠시 멈칫했다. 이 용암지는 지하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서 동굴 입구로 사람이 들어오는 걸 알아차리다니? 이건 이번 깊은 잠을 계기로 채아의 눈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채아의 눈은 이미 땅을 투시할 정도였다.
잠시 후, 여의가 동굴로 들어왔다.
“석 형, 최근 삼 개월 동안 얻은 영석이 오만육천 개가 넘습니다. 분부에 따라서 이중 팔 할은 이미 불 속성 영석으로 바꿨습니다.”
여의가 곧바로 물건들을 꺼내며 말했다.
여의는 파란 두건을 걸치고 공손하게 동굴 입구에 서 있었다. 겉모습에서는 삼 년 전의 그 빈곤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보아하니 요 몇 년간 나쁘지 않게 살아온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여 형.”
석목이 물건을 받아들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석 형에게 입은 은혜가 적지 않은데, 이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의가 웃으며 말했다.
최근 삼 년간 용암지와 영화진을 유지하기 위해 불 속성 영석의 소모량이 상당했다. 그만큼 지속적으로 영석을 수급해야 했고, 거기에 더해 단약도 보충해야 했다.
석목은 이 일을 여의에게 부탁하면서 영석의 일부를 그에게 보수로 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몇 번 일을 마치고 나자 여의는 석목의 수하가 되기를 자처했다.
석목은 처음에는 그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의는 후새뢰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신혼 일부를 금신주에 봉인해서 석목에게 건네며 말했다.
“저는 적염성에서 치욕을 받을 만큼 받았습니다. 석 형과 같이 있으면 멀리 있는 명월교의 보살핌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석목이 자신이 화영지를 계속 유지하려면 영석의 지속적인 공급이 필요했다. 그러나 자신이 밖으로 나간다면 수련에 차질이 생긴다. 게다가 여의는 영특하고 일처리도 확실했으며, 무엇보다도 눈치가 빠른 데다 사람과 물건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결국 석목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여의를 수하로 받아들였다.
여의는 역시나 일처리를 야무지게 해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성 안의 소식을 석목에게 알려주었다.
“석 형, 혹시 경지가 오르신 겁니까?”
여의가 석목을 멍한 표정으로 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석목은 숨기지 않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석 형!”
여의가 놀라서 말했다.
“그간 여 형이 도움을 많이 주신 덕분입니다. 참, 그리고 저번에 말한 변신 요족들은 최근에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습니까?”
여의는 석목의 말에 품에서 하얀 옥간을 꺼내 건넸다.
석목은 옥간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잠시 후 여의에게 저장반지를 꺼내주며 분부했다.
“알겠습니다. 이걸 가져가세요. 그리고 그 요족들을 계속 주시하도록 하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여의는 반지를 받아 든 뒤,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나갔다.
* * *
며칠 후 선화거.
이곳은 늘 성황을 이루는 것이, 겉보기에는 삼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석목은 문 앞에 서서 고개를 들어 현판을 한 번 본 뒤, 안으로 들어갔다. 푸른 옷을 입은 점원이 그를 맞았다.
“석 도우, 반가운 손님이군요!”
붉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점원을 손짓으로 물리고, 석목을 직접 맞이하러 나왔다. 그는 바로 삼 년 전에 만난 만 집사였다. 다만 그는 지금은 상점 주인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석목이 만 집사에게 인사했다.
“만 집사님.”
“석 도우가 온 걸 보니 매우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하시죠.”
붉은 옷의 중년 남자는 석목을 한번 훑어보며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 층의 조용한 방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요 삼 년간 폐관수련을 한 뒤에 이렇게 큰 성공을 이루었군요. 정말 축하합니다.”
붉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말했다.
“조그마한 성취를 거두었을 뿐입니다. 오늘 이렇게 온 것은 공서 선생님에게 용무가 있어서 뵈러 온 것인데, 혹시 선생님은 가게에 계십니까?”
석목은 자세를 바로하며 물었다.
“계십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죠.”
붉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