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봉인
일각 정도가 지난 후에 방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공서 선생이 들어왔다.
“석 도우, 수년 만에 보는데 경계가 크게 올랐군요. 정말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공서 선생은 자리에 앉으며 석목을 보고 눈을 빛냈다.
“공서 선생님, 칭찬이 과하십니다.”
석목이 겸손하게 말했다.
“용무가 없이 찾아오시지는 않았을 것이고, 노부를 찾아온 연유가 무엇입니까?”
공서 선생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대사님께 불 속성 영석을 봉쇄할 수 있는 장갑의 제작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봉인 장갑?”
공서 선생이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제가 수련하는 공법이 조금은 특수하다보니 가끔 왼손에 영력이 엉키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력을 봉인할 수 있는 장갑이 필요합니다.”
석목은 그렇게 말하면서 갈색 장갑으로 감싼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 석목은 구전현공이 소성에 달하면서 위력이 커지자 기뻐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골치 아픈 일이 발생했다. 손의 영력이 불안정해서 통제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만 정신을 놓으면 놀랄 만한 파괴력을 뿜어내면서 체내의 진기를 대량으로 소모해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왼손을 잠시 봉인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렇군요.”
공서 선생은 석목의 왼손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공서 선생께서는 이미 방법을 생각해내신 모양입니다.”
“이런 종류의 봉인장갑은 노부가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 노부가 보기에는 석 도우가 연공하는 공법이 비범해 보이는데, 인면 불도마뱀 가죽으로 만든 장갑이 제일 효과가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인면 불도마뱀이 성 안에서는 멸종되어버려서 말입니다.”
“어디 가면 인면 불도마뱀을 찾을 수 있습니까?”
“이 짐승은 화산의 깊은 땅속에만 출몰합니다. 그 행적을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비록 강하지는 않지만 잡기가 상당히 힘들지요.”
“그럼 제가 십만화산에 다녀와야겠군요. 운에 맡기고 말입니다.”
석목은 인면 불도마뱀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 대해 자세히 묻고, 작별 인사를 한 뒤 그대로 성 밖으로 나갔다.
“채아, 이번 목표물은 찾아내기가 힘드니까, 너한테 의지를 좀 해도 될까?”
석목은 청익비차 위에서 채아에게 말했다.
“간단하지. 나한테 맡겨!”
채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른손으로 법결을 했다. 그러자 청익비차는 청색 빛줄기로 변해서 화산의 깊은 곳을 향해 날아갔다.
* * *
반 시진 후, 석목은 번쩍이는 푸른 빛과 함께 작은 화산들이 모여 있는 지역에 내려섰다. 불도마뱀이 자주 출몰한다는 지역 중 하나였다.
“석두, 조심해! 이 부근은 용암이 심하게 들끓어서 언제든 터져 나올 수 있어.”
채아는 전방의 땅을 보며 말했다.
석목의 이마가 살짝 꿈틀거렸다. 전방의 지면에는 적지 않은 검은 고체들이 있는 게 보였다. 아직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걸 보니, 아마도 방금 화산 용암에서 터져 나온 것인 듯했다.
우르릉! 콰쾅!
채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밑에서 번개가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화산 입구에서 솟구친 용암이 사방을 뒤덮으며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석목 일행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용암이 그곳까지 튀지는 않았다.
용암이 뿜어져 나온 시간은 아주 짧아서 몇 호흡 만에 멎었다. 그러나 비처럼 내린 용암이 미처 바닥에 다 떨어지기도 전에, 또 다른 화산의 입구에서 용암이 뿜어져 나왔다. 용암은 낮은 화산의 한가운데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이런 광경이 장장 반 시진이 넘게 이어진 끝에, 용암은 그제야 조금씩 잠잠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한두 줄기의 용암이 종종 치솟곤 했다.
“석두, 여기는 정말 위험하네. 그 공서라는 영감탱이가 괜히 인면 불도마뱀을 잡기 어렵다고 말한 게 아니었어!”
채아가 깜짝 놀랐다는 듯이 석목을 보았다.
“우리가 조심하면 괜찮아.”
석목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휘저어 청익비차를 회수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두 개의 거대한 불꽃 날개가 나타났다. 곧 날개가 펄럭이며 석목의 몸이 앞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석두, 기다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채아가 놀라 소리치면서 석목의 옷을 단단히 붙잡았다.
석목은 채아의 비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날개를 움직였다. 그는 민첩하게 화산을 하나둘 헤쳐 나가는 한편, 신식을 넓게 퍼트려서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석두, 왼쪽의 화산 입구를 조심해. 또 오른쪽에도…….”
석목의 어깨에 앉은 채아가 말했다.
화산 용암은 마치 지하에서 내지르는 날카로운 검 같았다. 다만 석목은 채아의 도움과 불꽃 날개의 민첩한 움직임 덕분에 불시에 솟아오르는 용암을 가볍게 피해냈다. 석목은 빠른 속도로 날아서 화산이 모여 있는 군락의 중심부로 향했다.
처음에는 공포에 질린 듯했던 채아도 점점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제 채아는 용암의 분출을 예측하는 한편으로, 불도마뱀의 흔적까지 찾고 있었다.
“석두! 왼쪽 지면 칠팔 장 아래 깊이에 목표물이 있어!”
채아가 돌연 외쳤다.
석목은 얼굴이 환해지며 허공에서 몸을 멈췄다. 그리고 채아와 시야를 공유해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투명하게 보이는 지면 아래에서 머리 크기가 이삼 장은 되는 도마뱀이 네 다리를 움직이며 빠르게 지하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도마뱀의 몸은 붉은 색이었고, 머리 위에 검은 문양들이 있었다. 이를 얼핏 보면 마치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석목이 손을 뒤집자 그의 손 안에서 붉은 빛이 번쩍였다. 이어서 사람 몸의 반 만 한 적홍색 장궁이 나타났다. 화살의 줄도 붉은 색이였는데, 사람의 약지만한 두께였다. 궁신 전체에는 문자가 새겨져서 그로부터 강대한 영력의 파동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진계에 돌입한 영기급의 파천궁이었다. 그것이 발산하는 파동은 하급 영기의 수준을 넘어서 이미 중급 영기에 달했다.
석목은 화살을 따로 꺼내지 않고, 한 손은 궁신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현을 당겼다. 그러자 활이 반달처럼 구부러진 형태가 되었다.
이어 한 줄기의 붉은 빛이 파천궁에 어리더니 팔뚝만한 붉은색 불꽃의 화살이 장전되었다. 석목은 그것으로 인면 불도마뱀을 겨누었다.
그러자 땅 아래의 인면 불도마뱀은 뭔가를 느끼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지하 깊은 곳으로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석목은 차갑게 웃으며 시위를 놓았다, 불꽃의 화살이 번쩍이더니 지하로 날아갔다. 화살이 뚫고 지나가자 땅에는 검은 굴 한 개가 생겼다.
잠시 뒤, 땅 아래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 * *
십여 일 후, 화선거에 있는 정자.
석목은 조용히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채아도 조용히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 채아는 보송보송한 머리를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정자 앞의 문이 열리면서 검은 옷을 입은 공서 선생이 들어왔다.
석목이 감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두 눈에는 기쁜 기색이 가득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석 도우.”
공서 선생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목함 하나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석목은 손을 뻗어 목함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붉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갑 하나를 꺼냈다, 촉감은 부드러웠고, 표면에 미세하게 각인된 도안이 있었다. 그것은 손 끝 부분부터 바닥까지 다섯 개의 금색 줄로 연결되어 금색 부문을 형성했다.
석목은 바로 장갑을 왼손에 끼어보았다. 장갑 위의 금색 부문이 빛의 막을 만들면서, 알 수 없는 힘이 왼손에 씌워졌다. 그러자 터질 듯한 왼손의 영력이 금세 평온해졌다. 마치 겉에 한 겹의 봉인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석목은 크게 기뻐하며 왼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움직이는 데도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인면 불도마뱀의 가죽은 봉인의 힘을 지닌 말고도 매우 견고하지요. 게다가 제가 특수한 수법으로 강화시켜서 강도가 훨씬 높아졌습니다. 앞으로 마음 편히 쓰십시오.”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공서 선생님.”
석목은 기뻐하며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일각 후 석목은 선화거를 떠나 흑염산의 용암지로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영화진을 발동시켜서 수련을 이어갔다.
* * *
한 달 후, 용암지.
석목은 전신에 붉은 빛의 막을 두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번데기 같은 모습이었다.
붉은 번데기가 순간 번쩍이더니 그 빛이 전부 안으로 흡수되어 석목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석목은 눈을 번쩍 뜨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 한 달간 고행을 이어왔지만, 어찌된 일인지 구전현공의 수련에 전혀 진전이 없었다. 정체가 찾아온 것이다.
“왜 이러지?”
석목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지난 삼 년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설마 이곳의 화염기가 짙지 않아서 그런 건가? 아니야. 그런 이유가 아니야.”
석목은 무언가를 떠올렸지만, 곧바로 그 추측을 부정했다.
화염정으로 개량된 영화진은 이곳의 화염성 영기의 농밀도를 한층 더 높여놓았다. 이는 구전현공의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는 건 원인은 자신의 몸에 있다는 뜻이었다.
석목은 눈은 감고 구전현공을 일 단계부터 다시 한 번 암기해봤다.
이어 그는 눈을 뜨며 한 가지의 결론에 도달했다.
‘아마도 내 체내의 천수정혈이 부족한 것 같은데.’
구전현공의 수련 부분을 보면, 체내에서 천수정혈이 융화되어야 한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당초에 조개소녀 향주에게서 핏빛 안개를 흡수했다.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첫 수련을 원만하게 하는 데는 부족한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쓰게 웃었다.
이 흰 원숭이는 꿈속에서 능천봉에 나타났고, 다른 요괴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보아하니 서하대륙 요족들 사이에서 소문으로 도는 그 백원왕이 맞는 것 같았다.
일전까지는 구전현공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는데, 지금 수련이 소성(小成)에 이르자 허공을 파쇄하는 위력을 내는데 그 꿈속의 흰 원숭이는 천수로서 그런 수련을 했는데 그 위력은 자신과 비교가 안 되리라. 그렇다면 요족을 이끌고 서하대륙을 휘저으며 야만족을 대륙 동부구역으로 몰아넣은 게 이해가 되었다.
요 몇 년간 그가 능천봉으로 가려 했던 이유는, 꿈을 통해 탄월식이나 흡일식 같은 신통력을 얻고 실력을 키우려는 것이었다.
지금은 구전현공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는 만큼, 더 많은 원숭이 정혈을 얻어서 구전현공의 첫 단계를 수련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다만 어디로 가야 원숭이 정혈을 찾을 수 있을지는 석목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흰 원숭이가 한 마리의 천수라는 것 외에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맞다!”
석목은 돌연 무엇이 생각났는지 소리쳤다. 그리고 서하 대륙지도를 꺼내 펼쳤다. 지도의 한 곳에 뾰쪽하게 솟아 있는 지대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능천봉이었다.
흰 원숭이가 능천봉에 출몰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운이 따른다면 그곳에 가서 무언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