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290화 (290/916)

290화. 소식

석목은 그 뾰쪽한 지대를 유심히 보며 정신을 집중해보았다.

그러자 돌연 눈앞의 천지가 뒤집혔다.

눈앞의 풍경이 바뀌면서 석목은 자신이 이름 모를 산등성이에 온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다시금 흰 원숭이의 몸이 되었으며,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꿈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보아하니 시간은 늦은 밤이었고,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가끔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옅은 달빛이 하늘에서 내려앉아 무언가 흐릿한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산등성이에는 무언가 괴기한 형태의 석상이 있었는데, 입을 벌리고 발톱을 휘두르는 사나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어둠의 장막과 달빛 때문에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스산한 소리가 들리더니 네 줄기의 검은 인영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겉모습을 보니 그것들은 원숭이, 곰, 붉은 여우, 들소로 전부 요족인 듯했다.

요족들은 흰 원숭이의 앞에 모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공손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을 보니, 흰 원숭이가 요족들의 수장인 것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흰 원숭이는 두 말 없이 계곡의 입구로 향했다. 네 요족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수풀을 넘어 구름을 뚫고 산봉우리로 향했다.

그 산봉우리는 만 장의 높이에 산세가 험했다. 마치 하늘 끝까지 닿아 있는 빛나는 석주 같았다.

이를 보고 석목은 멈칫했다. 그 산봉우리는 바로 그 이름 높은 능천봉이었다.

네 요족을 이끌고 산을 한 바퀴 돈 흰 원숭이가 어느 절벽 앞에 섰다.

흰 원숭이가 어두운 빛을 띤 붉은 결석을 꺼내서 손에 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자 손의 결석이 빛을 냈다.

그 빛은 쏘아져 나가서 눈앞의 절벽에 닿았다. 그러자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절벽에서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흰 원숭이는 요족을 이끌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축축하고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자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더니, 높이가 족히 수백 장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마도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어서 그런지 공기에서 축축한 냄새가 났다.

그 공간의 중앙에는 열두 개의 거대한 회색 돌기둥이 있었다.

사위(四圍)의 절벽에는 조금의 간격을 두고 청동 화등잔이 놓여 있었는데, 흰 원숭이가 손을 한번 휘젓자 화등잔에 백색의 반딧불이 피어오르며 공간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칠흑 같은 공간이 순식간에 밝아지자, 그들은 그제야 열두 개의 돌기둥에 각각 요수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열두 개의 돌기둥에 있는 각자 다른 종류의 열두 요수가 불빛 아래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사납게 일렁였다.

곰 요족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새의 머리에 사자의 몸을 가진 조두수신(鳥頭獸身) 요수의 조각상을 만지자, 그 조각상이 돌연 낮은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흰 원숭이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더니 곧바로 그 요족을 끌어내고 법결을 외웠다.

이어 돌기둥이 미미하게 반짝이더니 위쪽으로 한층 투명한 장막이 뒤덮였다. 그러자 조두수신의 요수도 점차 조용해지며 정상으로 돌아갔다.

흰 원숭이는 사납게 곰 요족을 노려보면서 무엇인가 말했다. 그러자 요족들은 놀라면서 다시는 그 조각을 섣불리 만질 엄두를 내자 못했다.

흰 원숭이는 네 요족을 데리고 돌기둥을 지나쳐 한쪽에 있는 통로로 들어갔다. 그들은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을 가서 어느 밀실에 도착했다.

밀실의 규모는 이삽십 장 정도로 크지 않았다. 천장의 중앙 부분에는 옥처럼 깨끗한 석문이 있었는데, 무슨 재료를 쓴 건지는 몰라도 그 표면에 광택이 감도는 듯 했다.

흰 원숭이가 영패를 꺼내어 흔들자 석문이 천천히 열렸다.

흰 원숭이가 두말없이 한 손을 휘두르자 금광이 그들 모두를 감쌌다. 일행은 한 줄기 금빛으로 변해서 석문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잠시 눈앞이 번쩍인다 싶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어느 거대한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의 중앙에는 금색의 제단이 있었는데, 그 표면에는 현묘하기 이를 데 없는 영문이 새겨져 있었다.

제단 앞으로 걸어간 흰 원숭이는 몸의 어디에선가 사각형 목함 하나를 꺼냈다. 그 목함은 아마 흑단으로 만든 듯, 백색의 은은한 불빛 아래서 검게 빛났다.

흰 원숭이는 그 목함을 제단의 중앙에 놓더니 네 명의 요족과 무언가 이야기를 했다.

네 요족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단에 네 방위로 앉더니 입으로 무언가 쉼 없이 중얼거렸다. 아마도 법결을 외우는 것 같았다.

바로 다음 순간, 제단 표면에 있는 영문이 빛나더니 빽빽하게 채워진 부문이 허공에 나타났다. 부문은 목함을 둘러싸고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다.

그러자 네 명의 요족은 모두 땅에 정혈을 내뿜었다. 정혈은 서서히 핏빛 구슬로 변하더니 그대로 목함의 위로 내려앉았다.

핏빛 구슬이 내려앉은 순간, 목함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자잘하게 진동했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려는 것 같았다.

사방에 앉은 네 요족은 안색이 변하더니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이를 본 흰 원숭이가 한 팔을 들어 손끝으로 붉은 빛을 쏘아냈다. 그것은 바로 정혈 한 방울이었는데, 정혈은 그 목함의 위로 떨어지자 빠르게 회전을 시작했다.

그러자 대량의 금빛이 정혈 속에서 내려왔다. 목함은 금빛을 받으면서 마침내 조용해졌다.

흰 원숭이가 크게 울부짖자 주위의 네 요족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들은 빠르게 법술을 행했다.

제단의 표면에 떠오른 부문의 회전 범위는 갈수록 작아지더니 결국 목함 위에 붙었다. 빛의 막이 번득이면서 목함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목함 위에서 회전하던 흰 원숭이의 정혈은 회전을 멈추었다. 그것은 엄지 정도 크기의 결정이 되어 제단의 중앙에 자리하고, 밝은 핏빛을 번득였다.

순간 석목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잠시 멈칫하던 그는 곧 얼굴에 희색이 만연해졌다. 능천봉에 흰 원숭이가 남긴 정혈 한 방울이 있었던 것이다. 잠이 들었는데 누가 마침 베개를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능천봉으로 가는 것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단지 그곳은 요족의 성지인 만큼, 석목이 지계의 경지에 올라섰다고는 해도 조심성 없이 접근하면 큰 위험이 따를 것이었다.

석목은 말없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여의의 원신주였다. 석목은 한줄기 빛을 그 내부로 흘려보냈다.

반 시진 후, 여의가 용암지로 들어섰다.

“석 형,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여의가 공손하게 석목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여 형과 교류하던 그 변신 요족들, 아직도 연락이 되나요?”

석목이 물었다.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의가 대답했다.

“그들에게서 능천봉에 관해 무언가 들은 이야기가 없습니까?”

석목의 말에 여의가 잠시 멈칫하다가 물었다.

“석 형께서 어떤 종류의 소식을 원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능천봉 주위의 상황을 알고 싶습니다.”

석목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며 여의를 향했다.

“제가 알기로는 능천봉은 월웅, 천호, 창원 이 세 대부족이 지키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방비가 삼엄하고 외부인은 거의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봉우리 안쪽에는 한 명의 천계 요왕이 상주하고 있어서 들어가기 곤란합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의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아미를 찌푸렸다.

“석 형, 제가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혹시 능천봉으로 향하시려는 것입니까?”

여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물었다.

석목은 잠시 눈을 빛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상 수긍한 것이었다.

“석 형, 감히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만약 석 형께서 그런 계획이시라면 반 년 뒤에 좋은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여의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석목이 물었다.

“일전에 제가 어느 요족에게 들었는데, 앞으로 칠팔 개월 뒤에 능천봉에서 성대한 의식이 열린다고 합니다. 그 이름은 화형대전이라고 하죠. 그때가 되면 대륙에 있는 모든 요족에서 능천봉으로 부족원을 보낸다고 합니다. 능천봉 안에 있는 요왕도 산을 내려와서 직접 대전을 주관한다고 합니다.”

석목이 그 말에 눈을 반짝였다.

만약 정말로 요족에서 그런 큰 규모의 대전을 개최한다면, 그리고 요왕이 그것을 직접 주관한다면 능천봉의 경계는 당연히 느슨해질 것이다. 확실히 잠입하기에는 절호의 기회였다.

“여 형은 다시 가서 알아보세요. 그 요족의 대전에 관한 소식을 최대한 알아봐주십시오.”

잠시 침묵하던 석목이 말했다.

“네.”

여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리고 여 형이 거래할 때 접촉한 요족들의 자료도 정리해서 가져다주세요. 상세할수록 좋습니다.”

석목이 덧붙였다.

“네, 바로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여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고 했다.

“무언가 더 볼일이 있습니까?”

석목이 망설이는 여의를 보고 물었다.

“제가 요 며칠 전에 요족과 야만족 양쪽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데, 석 형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여의가 말했다.

“말해보세요.”

석목의 말에 여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요족과 야만족의 영토 각지에서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데, 소규모 전쟁은 이미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그 이유를 알아봤는데,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요족이 영내에 있던 영석을 대규모로 채굴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야만족 장정을 잡아서 노예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서 양측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전투 중에 상당수 야만족 부락에서 용사들의 시체를 강시로 만들어서 싸우는 전법으로 요족과의 전투에서 괜찮은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 공법은 강시공으로 본디 명월교의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여 형은 일단 먼저 가보세요.”

석목은 그의 말을 듣고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의는 석목에게 인사를 하고 빠르게 물러났다.

석목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후 능천봉의 지도를 다시 꺼냈다.

지도를 자세하게 들여다보던 석목은 하얀 진반을 꺼내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진반에서 흰 빛이 일더니 하얀 진법을 구성했다.

그가 진반에 낮은 소리로 무언가를 말하자 하얀 글자들이 진반으로 녹아들더니 번쩍이며 금세 사라졌다.

* * *

여의의 일처리는 확실히 신속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는 요족 대전에 관한 소식을 석목에게 보내왔고, 능천봉 부근에서 온 적염성의 요족들에 대한 정보도 보냈다.

이 요족들은 능천봉 부근에 있는 부족의 사람이었다. 이들은 종종 적염성에 와서 물건을 사고팔고 했다. 여의가 처음으로 석목에게 보고하러 갔을 때 석목은 이미 이 요족들에 대한 소식을 모아두라고 지시를 내린 바 있었다.

석목은 여의가 보낸 정보를 본 뒤 곧장 채아를 데리고 나갔다.

보름쯤 지난 후 석목은 적염성의 어느 주점 이 층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식탁에는 몇 종류의 요리, 청주 한 주전자와 가득 채워진 술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석목은 술과 음식은 건드리지도 않은 채 창밖을 보며 맞은편의 상점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채아는 식탁에서 고개를 처박고 정신없이 요리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채아는 최근 긴 잠에서 깨어난 뒤, 영석을 먹는 것 외에도 어째서인지 술에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종종 석목에게서 술을 한 모금씩 빼앗아 마시고는 만족한 표정을 짓곤 했다.

순간 석목의 이마가 꿈틀거렸다. 맞은편의 상점에서 나온 회색 옷의 인영을 본 것이다. 상점에서 나온 사람은 키가 크고 마른 몸이었으며, 전신을 검고 긴 옷으로 둘둘 말고 있어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회색 옷차림의 그 사람은 상점을 나선 뒤 멈추지 않고 곧장 어디론가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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