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292화 (292/916)

292화. 만에 하나

“농담은 이쯤 하고 다시 유안의 이야기를 해볼게요.”

영월동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저번에 창욱성에서 식사를 하면서 바로 알아봤어요. 목 오라버니와 유안은 비록 같은 대륙에서 왔지만 절대 같은 길을 걸을 리 없다구요.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어요. 유안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목 오라버니뿐이에요.”

영월동은 석목을 보며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석목은 시선을 떨구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최근에 급한 일이 있어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영월동은 조용히 석목을 보았다. 석목이 거절을 했지만 안색이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목 오라버니의 수하를 찾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창욱성 경매장에서 그렇게 감쪽같이 연기를 펼칠 줄이야. 거기에 모두 속았잖아요. 나도 상당히 공을 들인 후에야 겨우 단서를 찾았어요.”

영월동은 옆에 있는 후새뢰를 보며 말했다.

후새뢰는 그 말에 속으로 화들짝 놀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석목도 마찬가지로 말이 없었다.

“나는 목 오라버니의 수하를 찾은 뒤 계속 몰래 감시해왔죠. 그리고 그가 목 오라버니와 연락하는 걸 보았고, 역용술에 필요한 재료를 사는 것도 보았어요. 내가 알기로는 요족으로 변하기에 쉬운 물건들이더군요. 목 오라버니, 설마 그걸 이용해서 요족들에게 잠입하려는 생각인가요?”

영월동은 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애매한 표정으로 석목을 보며 말했다.

석목은 눈을 찌푸렸다.

확실히 석목은 그런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직접 능천봉으로 잡입하는 건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에, 역용술을 사용하면 위험이 덜할 것 같았다. 그가 요즘 준비하고 있는 것 역시 다 그 계획을 위한 것이었다. 다만 영월동이 그걸 한눈에 파악할 줄은 몰랐다.

영월동이 말했다.

“그렇게 살기 가득한 눈으로 볼 것 없어요. 내가 이런 이야기를 어디에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거예요. 목 오라버니의 계획이 어긋나면 나에게도 좋을 게 없으니까요.”

“계속 말해요.”

석목의 말에 영월동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목 오라버니 수하의 역용술은 상당히 정교하지만, 그건 단지 외형만을 바꾸는 거죠. 몸에 서린 기운까지는 바꿀 수 없으니 요족의 실력자들을 속일 수는 없어요. 다만 내가 기운까지 요기로 바꿔주는 비술을 알고 있어요.”

“정말인가요?”

석목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녀의 말에 그의 마음이 움직였다.

사실 기운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그도 하루 종일 고민해왔지만, 아직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영월동이 말한 대로라면 이 계획은 완벽해지는 것이었다.

“당연하죠. 우리 명월교는 이 비술을 사용해서 요족들 사이로 잡입한 적이 있어요. 보통 지계의 요족들은 전혀 구별하지 못해요.”

영월동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석목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좋아요. 만약 그 비술이 정말로 효과가 있다면, 내 일이 끝나면 당신을 도와줄지 고려해보죠.”

“약속한 거예요!”

영월동은 석목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 * *

그 뒤 세 사람은 주점을 나서서 여의의 거처로 갔다.

여의의 거처는 굉장히 넓었다. 방도 많아서 서너 명이 지내는 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원래 서로 아는 사이인 여의와 후새뢰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여기는 변변치 못한 곳이니, 영 소저는 불편하겠지만 좀 참아주세요.”

석목이 말했다.

“몸만 뉘일 곳이면 충분해요.”

영월동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금 말한 비술을 한번 보고 싶은데, 준비가 필요한가요?”

석목이 물었다.

그러자 영월동은 주저하지 않고 옥간 하나를 꺼내 석목에게 주었다.

석목은 그걸 받아서 신식(神識:정신력)으로 조사해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일각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옥간에 기록된 비술은 상상 외의 것이었다. 특수한 방법을 통해 요족의 요단을 몸 안에 심고, 그걸로 본래의 기를 요기로 바꾸는 것이었다.

석목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이런 비술이 있다니, 정말 세상은 넓군요. 그런데 요단을 몸속에 넣어야 하는데, 이게 몸에 무슨 해를 끼치지는 않겠죠?”

“일 년 안에 요단을 꺼내기만 하면 별 위험은 없어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석목은 영월동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체내에 넣을 요단은 신선할수록 좋아요. 또 변신하려는 요족의 요단을 구해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죠.”

영월동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석목의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

“우선 여기에서 머무르도록 해요. 그 물건들은 며칠 내로 준비하겠습니다. 나중에 좀 도와주세요.”

석목이 말했다. 영월동은 석목의 시선에 담긴 차가움을 느끼고 속으로 조금 놀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석목은 영월동과 잠시 잡담을 나누고는 저택을 나섰다.

석목은 반 시진 만에 요족들이 머무는 저택 근처에 도착했다.

“석두, 여긴 왜 왔어?”

석목을 본 채아가 그의 어깨로 날아와 앉으며 물었다. 채아는 계속 이 부근에서 저택 안에 있는 뱀 요족 남자를 감시하고 있었다.

석목은 채아에게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만큼, 영월동을 만난 일을 전부 설명해주었다.

“기를 바꾸는 비술이 있었다니! 그러면 지금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어? 저 요족들, 가끔 능천봉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하던데,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거든.”

채아가 말했다.

“경창이 이곳을 떠난 적 있어?”

석목이 물었다.

“오늘 만금당에 가서 부적을 사려고 했던 것 같은데, 사지 못하고 일찍 돌아왔어.”

“그럼 우린 내일 다시 오자.”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

회색 옷을 입은 요족 남자가 저택에서 나와서 적염성의 상점가로 향했다.

그의 이름은 경창으로, 지사족(地蛇族: 뱀 종족)의 선천 초기의 요족이었다.

경창은 이번에 막중한 임무를 띠고 적염성을 찾았다. 필요한 물품을 사서 반드시 정해진 기간 내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돌아가야 하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그는 아직 필요한 부적을 다 구하지 못해 초조해져 있었다.

사실 중급 이상의 부적은 적염성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 동쪽으로 가서 인족과 야만족이 비교적 많은 곳을 찾아야 구할 수 있었다.

경창은 속으로 욕을 몇 마디 내뱉었다. 그는 인족과 야만족 모두에게 털끝 만큼의 호감도 없었다. 만약 상금만 아니었다면 다른 종족이 많은 이곳에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는 금세 적염성의 번화가에 도착해 있었다.

경창은 큰 규모의 상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그가 듣기로는 예전에 이곳에서 부적을 판매했다고 했다.

일각 후, 상점으로 들어갔던 그가 다시 나왔고, 회색 두건으로 감춘 얼굴에는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이곳에서도 아무 소득이 없었던 것이다.

경창은 적염성의 지도를 꺼내서 몇 번 보고는, 다시 어디론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반나절 후, 중간 규모의 상점에서 나온 경창은 속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는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녔는데도 얻은 게 거의 없었다. 하급 부적 몇 개를 샀을 뿐이었다. 부족에서 지시한 중급 부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번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상금은 물 건너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경창의 귀에 들려왔다.

“석두, 너 운 진짜 좋다. 어떻게 그런 부적들을 그 정도 가격으로 산 거야?”

며칠 동안 부적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경창은 부적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바로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쪽에서 인족 청년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는 다름이 아니라 그의 어깨에 있는 화려한 색의 앵무새였다.

“하하, 운이 좋았지. 그 자식이 영석이 급해서 싼값에 부적을 넘긴 거니까 말이야. 이 중급 부적 스무 장이 있으면 십만화산도 몇 바퀴는 돌 수 있겠어!”

청년의 말에 앵무새도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경창의 앞을 지나서 골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두 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마음이 급한 경창은 인족에 대한 혐오감을 억누르며 둘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청년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말을 건 사람이 요족이라는 걸 확인하고 곧바로 경계를 했다.

“하하,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방금 그쪽이 대화하는 걸 들었는데,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경창은 못생긴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쥐어짜내며 말했다.

“우리 대화를 엿들은 겁니까?”

청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쩌다 우연히 들은 겁니다.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

경창이 말했다. 그는 이를 꽉 깨물고 물 속성 중급 영석 하나를 꺼내서 청년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청년의 얼굴에서 경계의 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영석을 빠르게 챙긴 청년의 표정이 밝아지며 말투도 온화해졌다.

“하하, 그렇군요. 뭐가 궁금하신 겁니까?”

경창은 석목을 가늠해보며 물었다.

“방금 중급 부적을 샀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혹시 어디에서 사신 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급히 부적이 필요한데 이 적염성에서는 찾기가 어려워서요.”

“아, 저는 알고 지내는 친구에게서 산겁니다. 그 친구가 부적사인데 중급 부적을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재고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네요.”

청년은 곧바로 답해주었다.

“혹시 그 부적사는 어디 계십니까? 그러고 그분을 저에게 소개해주실 수 있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경창은 그렇게 말하면서 또 한 번 이를 악물고, 다시 중급 영석 하나를 청년에게 건넸다.

약간은 의심하는 낌새가 남아 있던 청년은 두 번째 영석을 받자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하하, 그건 일도 아니죠! 저를 따라오시지요.”

청년은 웃으며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경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멀어지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고 혀를 날름거리며 쫒아갔다.

두 사람은 거리를 걸으며 점점 인적이 드문 구역으로 향했다. 그들은 가는 길에 몇 마디 시시한 잡담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경창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다시 시선을 청년의 뒷모습에 고정했다. 무언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석 형의 친구는 인적이 드문 곳에 사나 보군요.”

경창이 청년을 몇 발자국 따라잡으며 말했다.

“네, 성격이 조금 괴팍해서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합니다. 부적을 그리려면 조용한 곳이 좋다는군요. 그래서 이렇게 외진 곳에서 살고 있죠. 아, 이제 거의 다왔습니다.”

청년은 웃으며 전방의 회색 저택을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이는 경창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저택의 앞까지 다가간 청년은 문도 두들기지 않고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경창은 저택 주위를 슬쩍 보고는 그를 따랐다.

바로 그때, 그의 눈앞 풍경이 변하더니 사방팔방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며 불바다로 변했다. 그 불길은 주위를 둘러싸고 경창을 압박해왔다.

“이런, 법진이잖아! 이런 야비한 인간, 죽여 버리겠다!”

경창은 안색이 변하며 분노의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몸에서 흑색 빛이 번쩍이더니 두르고 있던 겉옷이 찢겨졌다. 흑색 빛은 그 위로 보호막을 형성해 몸을 보호했다. 그와 동시에 흑색 비늘이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비늘이 막 전신을 뒤덮은 순간 붉은색 장갑을 낀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 주먹은 경창의 보호막에 적중했다.

펑!

굉음과 함께 방어막이 종잇장이 찢기듯 손쉽게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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