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293화 (293/916)

293화. 요족으로 변신하다

붉은색의 주먹은 다시금 경창의 뒤를 노리고 들어와서 그대로 가슴을 관통했다. 흑색 비늘은 방어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경창의 심장이 으깨지면서 입에서 선혈이 뿜어 나왔다. 그는 불신이 가득 찬 눈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방금까지 앞에 있던 청년이 무표정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경창은 원한이 가득한 표정으로 청년을 보았지만, 그의 눈에서는 빠르게 생기가 빠져나갔다.

그 청년, 즉 석목이 팔을 회수하자 경창의 시체가 천천히 바닥에 쓰러졌다.

청년이 손짓을 하자 경창의 손에 끼워져 있던 팔찌가 그의 손으로 날아왔다.

바로 그때, 흑색의 빛이 번쩍이더니 경창의 시체가 점점 좁아지고 길어져서 거대 흑색 구렁이로 변했다. 그 길이는 이삼 장은 족히 되었다.

석목은 눈을 반짝이며 팔찌를 챙겼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화염을 일으켜서 손에 묻은 피를 다 태워버렸다.

그가 다시 손을 휘두르자 주위에 있는 진법의 불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다만 가장 바깥쪽에 있던 붉은색 보호막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저택에는 영월동과 후새뢰, 여의가 서 있었다. 이곳은 바로 여의의 저택이었다.

“목 오라버니는 과연 대단하네요. 선천 요괴도 상대가 안 된다니.”

영월동은 땅 위의 시체를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할 시간은 없습니다. 서둘러 움직이도록 하죠.”

석목은 금색 단도 하나를 꺼내서 검은 구렁이의 몸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검은 요단을 적출해서 영월동에게 주었다.

“목 오라버니는 나와 들어가요. 내가 도와줄 테니.”

영월동은 요단을 받아들고 그것을 대충 가늠해보더니,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너도 들어와라. 시간이 많지 않으니 내가 바로 지금 그 요족으로 역용할 것이다.”

석목이 후새뢰에게 일렀고, 후새뢰는 대답을 하고 석목에게 따라붙었다.

석목은 잠시 생각하다가 여의에게 말했다.

“이 요족의 시체는 이제 쓸모가 없으니까 여 형이 처리해주세요. 단, 절대 꼬리를 잡혀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여의가 대답했다.

여의를 제외한 세 사람은 방안으로 들어가서 장장 한 시진을 넘게 있었다. 그들은 슬슬 어두워질 때가 되어서야 방문을 열고 나왔다.

먼저 나온 사람은 사람의 몸에 뱀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양 어깨에는 검은 비늘이 있었고 몸에선 요기를 뿜어냈다. 바로 전에 죽은 경창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그는 역용술로 변신한 석목이었다.

이어서 영월동과 후새뢰가 나왔다. 술법을 펼쳐서인지 영월동은 조금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떤가요?”

석목이 여의에게 말했다. 심지어 목소리도 경창과 똑같았다.

“완벽합니다. 최소한 저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겠는데요.”

여의는 석목을 몇 번 훑어보고는 말했다.

“그럼 됐군요.”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고 회색 옷을 꺼내서 경창이 그랬던 것처럼 둘러 입었다.

“영 소저, 신세를 졌군요.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오래 걸리면 일 년, 빠르면 칠팔 개월 안에 제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당신을 돕겠습니다.”

석목이 영월동에게 말했다.

“저는 당연히 목 오라버니를 믿지요. 그래도 능천봉으로 잠입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으니 조심하세요.”

영월동이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의와 후새뢰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다. 지금부터 내가 소식을 전할 때까지 잠시 쉬고 있도록 해라.”

“네.”

여의와 후새뢰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서 문 밖으로 나갔다.

멀어져가는 석목을 바라보는 영월동의 얼굴은 조금 굳어 있었다.

반 시진이 지나자 석목은 요족들이 기거하는 저택의 문 앞에 도착했다.

그는 문 앞에서 잠시 멈칫했지만, 곧 안으로 들어갔다.

“경창, 오늘은 좀 늦었네.”

그가 막 저택에 들어서자 곰 머리를 한 거대한 요족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석목은 아무 말 없이 그 곰 요족을 그냥 지나쳤다.

최근 한 달 간 그는 채아의 시야를 통해 이 저택에 있는 모든 요족의 이름을 조사했다.

눈앞에 있는 이 곰 요족은 이번에 적염성에 온 요족 중 가장 경지가 높아서, 다른 요족들은 그를 우두머리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경창과 그나마 교류가 있는 요족 중 하나이기도 했다.

곰 요족은 자신을 무시하는 석목을 보고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경창은 성격이 다소 괴팍하고 독불장군이었다.

곰 요족은 점점 멀어지는 석목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지만,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버렸다.

석목은 저택의 복도를 지나 경창의 거처로 들어가서 문을 큰 소리가 나게 닫았다.

근처에 있던 몇 명의 요족이 그 소리에 눈을 찌푸렸지만, 그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석목은 방 안의 침상 위에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채아는 밖에서 대기하며 석목과 시야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저택 내에 있는 모든 요족의 움직임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보였다.

지금까지는 아직 석목의 정체를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만약 그렇다 해도 요족 한둘 정도는 아무도 모르게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잠시 뒤 눈을 뜬 석목은 경창의 저장 팔찌를 꺼내서 그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팔찌 내부의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았다. 석목의 반지보다 한참이나 작았지만, 그래도 안쪽은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석목이 손짓하자 그의 손에 뼈로 만들어진 옥간이 나타났다. 이번에 경창이 사야 하는 물건들의 목록이 적힌 것이었다.

팔찌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이 목록에 있는 것이었다. 석목이 다시 살펴보니 기본적인 것은 이미 다 있었고, 다만 중급 부적이 모자랐다.

석목은 가볍게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에게는 남아도는 게 바로 부적이었기 때문이다.

석목은 부적 한 다발을 꺼내서 팔찌에 넣고 잠시 고민하다가, 고급 부적도 몇 장 안에 넣었다.

지사족(뱀 종족)이 이번 임무를 위해 경창에게 내준 영석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목록에 적힌 물건을 다 사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경창이 자신의 의지로 맡은 임무였다.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할수록 이번 화형대전에 참가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는 채아와 여의가 다른 요족들에게서 알아온 정보였다. 요족들이 각자 임무를 맡고 있는 건 그러한 연유에서였다.

석목은 속으로 계산을 해본 뒤 다시 신식(神識)으로 팔찌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안에 있는 물건들의 품질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무언가를 결심한 석목은 보름이 안 되는 남은 기간 동안 경창의 신분으로 적염성의 상점을 빈번하게 드나들었다.

보름 후, 경창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저택 내의 요족들은 각자 정리를 한 뒤 성 중앙에 모여서 흑염산 정상의 전송 대전으로 갔다.

전송 대전은 높이가 사오십 장은 족히 되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대전의 중앙에는 하얀색의 원형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 면적이 사오 장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무수히 많은 고대 부문이 새겨져서 방대한 진법을 구성하고 있었다.

테이블 주위는 돌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겉에는 금색 부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지면의 진법과 연동되어 거대한 전송 법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법진이 발산하는 금빛은 그 법력의 파동이 먼 거리에서도 명확하게 느껴졌다.

석목은 이곳에는 처음 와보는 것이었는데, 일부러 여기저기 둘러보지 않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채아는 마치 평범한 앵무새처럼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

다른 요족들은 갑자기 나타난 채아를 의아하게 보았지만, 석목이 별 말을 하지 않는 만큼 굳이 물어볼 수도 없었다. 요족 중에도 애완동물을 키우는 이가 적지 않았고, 적염성에도 애완동물을 취급하는 상점이 있으니 다들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대전에는 돌로 만들어진 탁자가 몇 개 있었다. 그 탁자에는 붉은 옷을 입은 야만족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복장으로 보아 적염성의 사람 같았다.

요족 일행 중에서 거대한 몸집의 만웅족(蠻熊族: 곰 종족)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붉은 옷을 입은 야만족과 뭔가 교섭을 하더니 영석 한 보따리를 건넸다.

석목은 적염성에서 삼 년간 지내는 동안 이곳에 온 적은 없었지만, 전송에 관한 이야기는 여의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이곳은 화옥성으로 사람을 전송하는 장소로, 한 번에 최대 오십 명 정도까지 보낼 수 있었다. 인원에 따라 요금을 받았는데, 한 사람당 영석 1천 개를 받으니 비싼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렴한 것도 아니었다.

요족 일행은 이십여 명이었기 때문에 먼저 비용을 지불하고 한편에서 대기했다. 반 시진 정도 기다리자 요족과 야만족 몇 명이 와서 오십 명이 채워졌다. 그들은 다 같이 하얀 단상 위로 올라갔다.

곧 눈을 찌르는 듯한 금빛이 반짝였다. 잠시 뒤 시야가 회복되고 나니 그들은 규모가 비슷한 다른 대전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피곤했어. 어서 돌아가자고.”

만웅족 남자가 기지개를 펴고 말하며 먼저 대전 밖으로 나갔다.

석목은 다른 이들의 뒤에 서서 빠르게 대전을 벗어났다.

전송 대전은 족히 백 장이 넘는 흑색 거탑의 정상에 지어져 있었는데, 이 탑은 화옥성의 상징 같은 곳이었다. 적염성에 흑염산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보니 화옥성이 한눈에 보였다. 적염성과 달리 성 안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요족이였고, 인족과 야만족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석목 일행은 탑 위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 * *

삼 개월 뒤, 지사족 부락의 어느 거대한 막사 안.

회색 옷을 두른 뱀 머리의 남자가 상석에 앉은 요족에게 무언가를 정중하게 보고하고 있었다.

요족 청년은 다름 아닌 석목이었다.

“안 사백, 일전에 말씀하신 상급 법기의 추가 구매는 적염성에 물량이 없는 관계로, 발품을 팔아서 간신히 수량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제 재량으로 남은 돈으로 고급 부적 몇 개를 샀으니 확인해주십시오.”

석목은 그렇게 말하며 조잡하게 생긴 저장 팔찌를 건넸다.

안 사백이 팔찌를 받아들고 휘두르자 각종 물건이 방 안에 나타났다.

그는 법기들을 훑어보다가 다양한 색의 부적을 보고 얼굴이 굳었고, 그것들을 더 상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건 뇌운폭 부적……. 게다가 상천수인 부적까지!”

잠시 후 안 사백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하, 경창의 능력이 뛰어나구나! 매번 밖으로 나갈 때마다 이렇게 예상 외의 결과를 가져오다니!”

“다 안 사백 덕분입니다. 운 좋게 영석이 급히 필요한 이를 만나서, 적은 비용으로 고급 부적 두 장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좋다, 좋아! 교육도 잘 받았구나! 남은 건 더 살펴볼 필요도 없지. 이번에 네가 절약한 영석의 액수가 작지 않구나. 족장도 네 칭찬을 하던데, 왜 내가 너 같은 인재를 지금껏 몰라봤을까!”

안 사백은 두 장의 고급 부적을 거두며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석목은 속으로 기뻐하며 겸손하게 말했다.

막사를 나선 석목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부락의 변두리에 있는 자신의 작은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지사족으로 돌아온 뒤 그는 구매를 책임졌는데,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빠를 뿐 아니라 늘 결과도 좋았다. 게다가 때때로 자신이 만든 고급 부적도 같이 가져왔다.

요족은 선천적인 요인 때문에 술법에는 그다지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강한 위력을 지니고 실용성이 높은 부적을 늘 필요로 했다.

그렇기에 늘 전란 속에서 살아가는 요족들, 특히 삼 대 요족 인근에 사는 작은 부족에게 석목이 최근 보여주는 행보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그 때문에 석목은 비록 자신의 영석 재료를 소모하긴 했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석목이 다른 곳에서 듣기로는, 그가 최근 몇 달간 부족에서 쌓은 공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이 때문에 족장을 포함한 부족의 고위층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한 달 뒤에 있는 능천봉 화형대전에는 지사족에서 열 명이 참가할 수 있었다.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석목은 순조롭게 출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석목은 다음날 아침 족장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두말없이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부락 중심에 위치한 제일 큰 막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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