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받아들일 수 없다
막사로 들어간 석목은 이미 적지 않은 이가 그곳에 와 있는 걸 확인했다. 그가 들어서자 많은 이의 시선이 쏠렸다.
사실 경창은 이 부락에서는 딱히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기에, 대부분은 그저 힐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들 경창이 누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는 물론 석목이 바라던 바였다. 그는 경창 특유의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구석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잠시 후, 지사족 족장과 안 사백을 포함한 세 장로가 회의실에 도착했다.
지사족의 족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깡마른 노인이었는데, 경지는 지계 중급에 달했다. 신체는 대부분 변형돼 있었는데, 다만 얼굴과 어깨에는 여전히 비늘이 남아 있었다.
족장이 그대로 막사의 상석에 앉자 양쪽에 네 장로가 자리를 잡았다.
“좋다. 다들 모였으니 간단하게 말하지. 이번에 다들 부른 이유는 우리 부족의 번성에 대해 선포할 게 있기 때문이다.”
그 말에 현장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바뀌었다. 다들 족장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들 알겠지만, 십 년에 한번 열리는 능천봉 화형대전이 다음 달 열린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리 부족은 늘 그랬듯 열 명의 참가자를 뽑을 것이다. 인선의 절차에 대해서는 나와 여기 네 장로가 상의해서 어느 정도 정해두었다.”
족장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오른쪽을 향해 손짓을 했다.
옆에 있던 동안의 장로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서 명단을 펼쳤다. 거기에는 경창의 이름도 있었는데, 그는 딱 십 위에 걸쳐 있었다.
명단을 본 이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이는 기뻐했고 어떤 이는 침울해 했다. 다들 요족에게 이 화형대전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화형단을 얻을 수 있다면 일찌감치 지계의 경지로 올라갈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처럼 작은 부족에게는 큰 기회나 다름없었다.
‘아슬아슬했네!’
석목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설마 부족 내에서 삼 위에 해당하는 공로를 세우고도 간신히 십 위에 턱걸이를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갈 수 만 있다면 계획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때 석목은 안 사백이 자신 쪽을 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걸 보았다.
석목은 속으로 움찔했다. 그래도 여태껏 아부을 한 게 효과는 있었던 것 같았다. 그나마 안 사백이 힘을 써서 십 등이라도 하게 된 듯했다.
“좋다. 그럼 여기 명단에 있는 이들은 돌아가서 떠날 채비를 해라. 사흘 뒤에 출발한다.”
지사족 족장이 말했다.
그때 검은 옷을 입은 부족원 하나가 돌연 외쳤다.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경창이 나가는 겁니까? 제가 실력이든 자질이든 경창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막 나가려던 지사족 족장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그 검은 옷의 부족원은 몸이 길고 녹색 빛이 번뜩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가슴을 쭉 펴고는 앞으로 한 발 나서서 낭랑하게 말했다.
“품 족장님, 저는 강진이라고 합니다. 삼 년 전 이미 요장 중급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경창은 아직 요장 초입에 불과합니다. 제가 나머지 아홉 명의 형제들과는 비할 수 없다 해도, 경창이 포함된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지사족 족장은 그 말을 듣고 옆에 있는 안 사백을 말없이 보았다.
“화형대전에 출전하는 기회는 흔치 않은 것이다. 모든 참가자는 족장님과 우리 장로들이 신중하게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 경창은 자신이 맡은 임무에서 특출난 공을 세웠으며, 그 성과는 주목받을 만했다. 그가 쌓은 공적은 삼 등에 이른다.”
안 사백이 강진을 보며 말했다.
“안 장로님의 말씀은 어폐가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저 강진은 홀로 야만족의 영지에 잠입, 부족을 위해 인족과 야만족 열여섯 명을 광산의 노예로 잡아왔습니다. 게다가 그중 한 명은 선천의 경계에 있는 야만족입니다. 제 공로가 비록 세 손가락에 들지는 못하더라도 오 등은 되고도 남습니다.”
동안의 장로가 돌연 입을 열어 말했다. 그의 말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둘의 공로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실력은 한 단계 차이가 났다. 그러니 화형대전에 참가하는 자격에 있어서 누가 적합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실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화형대전에서 화형단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은 더욱 높아지는 게 당연했다. 화형단 한 알이면 지계급의 요족이 생기는 것이니, 부족 전체의 세력도 커지는 것이다.
“강진, 너는 어찌하고 싶은 것이냐?”
마침내 족장이 입을 열었다.
“저는 경창과의 결투를 원합니다.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강진은 담담히 말하며 석목에게 도전적인 눈빛을 보냈다.
“경창, 강진의 결투를 받아들이겠느냐?”
지사족 족장이 석목을 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다들 석목을 향해 시선이 쏠렸다. 다만 어차피 선택받지 못한 몇몇의 선천 요족은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강진의 실력은 이미 중급을 넘어섰으니, 경창이 운이 없네!”
“후후, 재미있겠어.”
“그러고 보니 저 경창이란 자는 어디서 갑자기 솟아난 거야? 왜 난 지금까지 몰랐지?”
* * *
“저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다들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석목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 말에 현장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들 석목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예부터 지금까지 요족은 강자를 숭상했다. 그렇기에 상대가 신청한 결투는 거절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하물며 명예를 걸고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족장님, 이번 화형대전의 참가자는 어르신들께서 심사숙고를 거쳐 결정하신 것입니다. 저는 출전 기회를 얻었고, 결투에서 이긴다고 해도 아무런 이득조차 없는데 왜 받아들여야 합니까? 다만, 강진이 질 경우 출전 기회와 맞먹는 무언가를 준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출전이 납득되지 않는다면 결투를 신청해도 되지만, 동등한 가치의 무언가를 가져오셔야만 받아들이겠습니다.”
석목은 족장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뭐라고 말하려던 강진은 석목의 한마디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화형대전 출전 기회와 맞먹는 무언가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다른 선천 요족들도 대부분 멍해 있었다. 이때까지 결투를 거절할 때 이런 논리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석목을 보는 많은 요족의 시선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어찌됐든 모두의 앞에서 결투를 거절하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경창이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니, 명단은 확정이다.”
족장은 그렇게 한마디를 던지고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막사를 떠났다.
안 사백은 막사를 떠나기 전에 석목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고 나갔다.
석목도 더 지체하지 않고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막사를 떠나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안 그래도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고 있는 석목으로서는 이런 작은 부족에서 명예나 지위를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만약 상대의 결투를 받아들였다가 혹시라도 신분이 노출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의 계획은 실패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 * *
다음날, 경창이 모두의 앞에서 결투를 거절한 사건은 부락 전체로 퍼져나갔다.
다들 경창을 욕했고, 그와 교류가 있었던 요족들도 그의 행태를 비난했다. 그와 좋은 관계였던 안 사백도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석목은 그런 걸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경창은 괴팍한 성격의 외톨이라서 다른 요족과 그다지 왕래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없으니 오히려 귀찮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이틀 후 아침, 지계급 장로 한 명의 인솔 아래, 석목을 포함한 지사족 열 명은 공물과 함께 능천봉 쪽으로 향했다.
* * *
석목 일행은 보름의 여정 끝에 드디어 능천봉과 멀지않은 유천곡에 도착했다.
유천곡은 영기가 충만한 곳이었다. 석목은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전신이 가벼워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천곡 안에는 일부 천호족을 제외하고도 적지 않은 다른 요족 부족이 와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구역을 조금씩 차지하고 막사를 설치하는 중이었다.
석목은 지사족에 온 뒤 화형대전과 능천봉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 유천곡은 지사족 인근에 있는 천호족의 영역이고, 이번에 지사족이 가져온 공물 또한 여기 천호족에게 진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열 명의 출전권을 얻으려는 것이다.
천호족은 삼 대 요족 중 하나로, 지사족과는 그 크기를 비교할 수가 없었다. 각 부족에서 온 이들에게 내어준 유천곡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지사족에서 이번에 파견한 지계급 장로의 이름은 경홍이었다. 그는 공물을 천호쪽 책임자에게 전달한 뒤, 석목 일행에게 한쪽 구석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다.
석목은 결투를 거절한 이래로 모두의 눈밖에 난 상태였고, 그래서 그의 자리는 제일 구석이었다. 물론 석목으로서는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밤이 되자 석목은 어둠을 틈타 소리 없이 유천곡을 떠났고, 인근에 있는 능천봉으로 잠입했다.
가는 길에 허공에서 작은 그림자가 내려와서 그의 어깨에 앉았다. 바로 채아였다.
“어때? 뭔가 좀 알아봤어?”
석목이 조용히 말했다.
“석두, 이 몸이 나섰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런데 능천봉은 진짜 높더라! 거의 하늘을 뚫을 기세던데?”
채아가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요점만 말해!”
“석두, 뭐가 그렇게 급해?”
석목의 재촉에 채아가 불만인 듯 중얼거렸다.
* * *
며칠 후 아침, 능천봉에는 구름이 가득했다. 푸른 잎의 고목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산봉우리의 동쪽, 그리고 유천곡 사이에는 아주 거대한 광장이 있었다.
광장의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 단상이 다섯 개 있었다. 각 단상의 높이는 몇 장 정도는 되어 보였는데, 마치 다섯 마리의 거대한 짐승이 능천봉 앞에 엎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단상 주위에는 각지에서 온 다양한 요족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가장 바깥쪽에 있는 이들은 변신도 하지 못하는 후천 이하의 요수들로, 표범도 있고 날짐승도 있었다. 그보다 안쪽에는 일부분만 변신한 선천 이상의 요족들이 있있다. 그들은 비록 머리는 여전히 짐승이지만 몸은 인간의 것이었다.
이미 광장은 요산요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차 있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사방에서 인파가 몰려오고 있었다.
다섯 개 거대 단상 사이의 공간에는 칠팔백 명 정도가 서 있었다. 그들은 각각의 경계에 따라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공간은 칠팔백 명을 세우고도 남을 정도로 넓었지만, 어느 간 큰 요족도 이곳에 함부로 오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세 요족이야말로 서하대륙 요족 중에서고 세력이 가장 막강한 세 종족인 월웅, 천호, 창원이었다. 이들 부족의 세 족장은 전설 속의 천위급으로, 진정한 요왕이라 칭할 만한 자들이었다.
주위의 다른 요족들은 이들이 있는 곳을 수시로 바라보면서 경외의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며 모인 요족의 수가 더 많아지자, 거대 광장은 세 요족이 모인 곳을 빼고는 이미 물샐 틈 하나 없어졌다.
주위에서는 시끄럽게 떠들며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단상의 오른쪽에 근접한 곳에는 뱀 머리를 가진 십여 명의 요족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이번 화형대전에 참가하는 이들이었다.
그중 어느 부족원이 말했다.
“경창, 이 자식은 왜 안 보여?”
“아까는 있었는데? 설마 길을 잃은 건가?”
다른 이가 말했다.
“경 장로님, 사람을 풀어서 찾아야 할까요?”
앞서 입을 연 부족원이 물었다. 그러자 경홍이 말했다.
“대전이 곧 시작된다. 일단 그는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래야 우리 지사족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