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295화 (295/916)

295화. 잠입

해가 중천에 뜨자, 작열하는 햇빛이 능천봉으로 내리꽂혔다. 그빛은 마치 눈을 찌르는 듯했다.

바로 그때, 능천봉의 한 곳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한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광장에 모여 있던 요족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며, 순간 현장이 조용해졌다.

나타난 인영은 속도가 엄청 빨라서, 눈 깜짝할 사이에 능천봉 앞의 거대한 암석 위에 떨어졌다.

나타난 이는 기다란 몸에 푸른색 옷을 입은 노인이었다. 그는 턱이 짧고 생긴 모습이 다소 기괴한 걸 제외하면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다.

바로 그때, 삼 대 요족 부족원들이 일시에 외쳤다.

“창원왕을 뵙습니다!”

그러자 광장에 있는 이들이 모두 소리쳤고, 함성이 계곡을 울려댔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짐승형 요족들도 바닥에 엎드려 존경을 표했다.

창원왕은 광장을 한번 둘러보고는 느긋하게 선포했다.

“다시 십 년 만에 화형대전이…….”

화형대전의 개막이 선포되는 그때, 석목은 능천봉을 돌아서 산 밑에 있는 어느 절벽 앞에 도착했다. 그는 일전에 얻은 정보로 감시망을 피하는 중이었다.

석목은 절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풀에 숨었다.

그 절벽 앞에는 호랑이 머리를 한 수인 넷이 미동도 하지 않고 서서 망을 보고 있었다.

넷은 안광을 번뜩이며 털이 숭숭한 팔을 앞으로 모으고 있거나, 도를 어깨에 걸쳐 메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 경지가 선천급에 다다른 요족이었다.

이런 광경은 능천봉 아래의 십 장마다 펼쳐져 있었다. 다들 네 명이 한 조를 이루고 있었고, 반쯤 사람으로 변신한 선천급의 요족이었다. 지계급 강자라 할지라도 소리 없이 이들을 처지하는 건 불가능해보였다.

석목은 네 요족을 훑어보고는 다시 암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끝에 청색 부적 하나를 꺼내서는 몸에 붙였다.

이어서 그의 손에서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붉은색 장궁 하나가 생겨났다.

화살의 시위를 손가락에 걸자 그의 두 눈이 금색으로 빛났다.

쉭! 쉭!

두 번의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그러자 두 줄기 화살이 마치 벼락처럼 쏘아져서 호랑이 수인 두 명의 목을 정확이 관통했다.

나머지 두 요족이 놀라서 막 움직이려는 찰나, 눈앞에서 뭔가 번쩍였다. 어느새 소리 없이 나타난 석목이 오른손에 쥔 도와 왼손의 주먹을 각각 내질렀다.

순식간에 두 요족은 그대로 소리 없이 쓰러져 죽었다. 하나는 도에 그대로 양단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머리가 수박처럼 으깨졌다.

석목은 수혼주머니를 꺼내서 그대로 네 요족의 영혼을 거두고, 화구로 시체를 태워버렸다.

이어 그가 손을 뒤집자 그 위에 어두운 붉은 빛의 결정이 생겨났다. 바로 능염정이었다.

석목은 결정을 전방의 암벽에 겨누고 입으로 뭔가를 외웠다. 그러자 결정에서 발사된 빛이 암벽에 굴을 만들어냈다.

석목은 심호흡을 한 번 하며 속에서 차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힌 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길을 지나자 석목의 눈앞에 광활한 공간이 나타났다.

석목은 주위를 한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곳을 지키는 호위나 다른 금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비록 꿈속에서 이곳에 온 적은 있지만, 직접 눈앞에서 보니 흥분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열두 개의 회색 돌기둥……. 모든 것이 꿈과 동일했다.

단지 모든 것이 조금 오래되어 보이고,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게 차이점이었다.

그는 능염정을 이용해 능천봉을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걸 직접 보고 나니 점점 더 믿음이 갔다. 자신이 꿈속에서 본 그 흰 원숭이는 요족을 이끌고 서하대륙을 제패한 백원요왕이 틀림없었다.

단지 그가 꿈속에서 본 몇몇 장면은 아직 수수께끼였다.

석목은 회색 돌기둥은 만지지 않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향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으며 어느 공간으로 향하는 통로에 들어섰다. 그 안에는 회전하듯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일전의 꿈에서 흰 원숭이는 일행을 데리고 계단을 날 듯 통과했기 때문에, 중간에 있는 많은 층에 잠시도 머무르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그 밀실의 대략적인 형상이었고, 정확하게 몇 층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계산에 따르면 최소 10층 이상인 듯했다.

그가 능천봉 주위로 잠입한 뒤 어떤 월웅족 경비병에게 들은 정보에 의하면, 자신이 꿈에서 본 그 밀실과 가장 비슷한 곳은 16층과 이11층이었다.

어두운 석실의 계단 위는 썰렁하고 습했다. 게다가 간간히 썩은 냄새가 났다. 계단에는 이끼가 잔뜩 껴 있었고 이상한 녹색 액체가 계단을 타고 흘러내려서, 밟으면 미끄러질 것 같았다.

석목은 두 눈에 금빛을 반짝이며 벽 위의 미세한 부문을 보았다. 그는 아마도 요족이 이곳에 모종의 경비 금제를 걸어놓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조심성 없이 만진다면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랬다가는 곧바로 경비병들이 달려올 것이었다.

비록 창원왕은 화형대전의 주최를 위해 잠시 내려가 있었으나, 만약 이곳에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게 알려진다면 가장 먼저 달려올 것이 뻔했다.

석목은 자신이 천위급의 요족 강자를 속여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흰 원숭이의 정혈을 취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석목은 눈에 영기를 불어넣어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며, 통로에 있는 각종 금제를 피해갔다.

경비들은 층마다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석목은 경비가 있는 층은 녹색 망토를 사용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돌아갔고, 도저히 어렵겠다 싶으면 구석에 잠시 숨어 있다가 경비가 방심할 때 몰래 지나갔다.

석목은 10층까지는 머뭇거리지 않고 나아갔지만, 11층부터는 한층을 지날 때마다 잠시 멈춰서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시간이 지나면 능천봉 내부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고 월웅족에게서 얻은 정보가 정확한 건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렵사리 얻은 기회를 사소한 가능성 때문에 놓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살펴본 결과 11층부터 15층은 꿈에서 본 것과는 전혀 달랐다.

16층에 도달해보니, 그곳은 전방에 불이 밝혀져 있고 앞선 층들과 마찬가지로 수백 장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다만 이곳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가득한 종유석이 빛을 내며 공간 전체를 밝히고 있다는 게 달랐다.

석목은 이렇게 거대한 공간에 경비가 하나도 없는 걸 보고 기뻐했다.

이곳은 그가 염두에 두고 있던 두 군데 중 하나였는데, 꿈속에서 본 것과 매우 비슷했다.

석목은 속에서 차오르는 흥분을 자제하며, 바로 들어가지 않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역시 종유석의 표면에 빼곡한 부문이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은 돌마다 광선으로 연결되어, 길 하나만 남겨둔 채 마치 거미줄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만약 다른 길로 가다가 저 광선을 건드리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석목의 놀랄만한 시력이 아니었다면 이를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석목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신식(神識)을 통해 공간을 한 번 흝어보았다. 그리고 경비가 없는 걸 재차 확인하고서야 밀실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석실과 십여 장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통로 쪽에서 누군가가 대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은 가슴이 철렁하며 신식(神識)으로 조사해보았다. 선천 요족 둘이 그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석목은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지면의 광선을 절대 건드리지 않기 위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두 경비가 오기 전에 석실 입구에 도착해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석실이 문이 닫히자마자 문밖으로 점점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쯧쯧, 십 년에 한 번 열리는 화형대전인데 아쉽게도 올해는 못가는구만.”

“뭐 하러 그런 대전에 참가해? 몇 년 정도만 더 열심히 경비 업무를 해내면 창원왕께서 화형단을 내려주실 텐데.”

“응?”

“왜?”

“여기서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누가 왔다 갔나?”

“네 개코는 진짜 너무 민감한 거 아니야? 오늘 여기에 너하고 나 빼고 누가 있다고. 게다가 여기는 16층이야.”

“그것도 그러네. 가서 아래층을 보고 오자.”

둘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석목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문에 귀를 대고 들었다. 그는 자신이 발각되지 않았다는 걸 확신한 뒤에야 몸을 돌려 밀실을 살펴보았다.

순간 그는 밀실을 보고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이 밀실에는 별다른 금제는 없었다. 그러나 꿈속의 밀실과 닮아 있기는 했지만, 내부의 구조를 보니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그래도 석목은 이곳까지 온 이상 곧바로 떠날 생각은 없었다.

밀실 한 편의 수납장에는 정교한 초록색 병들이 놓여 있었다.

석목이 작은 병을 들고 마개를 열자, 내부에서 농밀한 피냄새가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병의 입구에서 핏빛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는 놀라서 바로 마개를 덮었다. 보아하니 무슨 정혈인 것 같았는데, 그 품질이 결코 낮지는 않아보였다.

석목은 일단 병들을 모두 챙기고는 실내를 한 바퀴 돌다가, 이상하게 생긴 영초를 발견했다. 그중 몇몇은 그의 눈에도 익은 것이었다.

석목은 무릎을 탁 치며 무언가를 기억해냈다. 이 영초들은 바로 지사부의 안 사백이 말했던, 화형단을 제조하는데 필요한 진귀한 재료였다.

석목은 다시 초록병을 꺼내 자세히 보았다. 듣기로는 화형단의 핵심은 인족과 야만족의 정혈이라고 했는데, 이게 바로 그것인 것 같았다. 화형단을 만들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석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것들은 그에게는 별 가치가 없었다. 그래도 석목은 일단 반지에 저장해두었다.

밀실을 살펴본 결과, 꿈속에서 본 백색문은 이곳에는 없는 것 같았다. 석목은 쓰게 웃었다.

그는 정신을 다시 차리고는 다시 밀실 입구로 가서 귀를 문에 붙였다. 그는 밖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석목은 밀실을 떠나서 지상의 금제를 피해 조심스럽게 다시 위로 올라갔다.

앞의 경험을 토대로, 석목은 별다른 이상이 없으면 층마다 오래 머물지 않았고, 그대로 21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일전에는 시간을 많이 소모했는데, 창원왕이 도중에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서두른 것이다.

21층에 거의 도착할 즈음에 석목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그는 멈춰서더니 재빠르게 계단의 어두운 곳에 숨었다.

전방의 계단 위에 경비하는 요족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전부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는데 선혈이 아직 낭자한 것으로 보아,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석목은 눈을 번득이며 시체를 보다가 더 높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능천봉의 경비들은 전부 선천급의 실력자였다. 그들을 이렇듯 단번에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최소한 지계급의 실력자라는 뜻이었다.

‘설마 나 이외의 누군가가 지금 능천봉에 잠입한 건가?’

석목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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