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296화 (296/916)

296화. 십자가

잠시 후, 석목은 드디어 21층에 도착했다.

21층 입구에도 역시나 시체가 몇 구 있었는데, 그 복장이나 외형으로 보아 경비들은 아까 죽은 자들보다 강한 실력자들 이었다. 아마도 선천 후기의 실력을 지닌 이들로 보였는데,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죽어 있었다.

21층은 16층과 비슷했다. 단지 이곳은 종유석이 더 많아서 시야가 가려질 정도였고, 구불구불한 통로가 나 있었다.

석목은 눈에서 금빛을 반짝이며 종유석을 살펴보았는데, 이곳에는 아래의 층에 있던 광선이 없었다. 누군가가 부순 것인지 혹은 원래부터 없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석목은 조용히 앞으로 향했다. 누가 있든 간에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막 통로에 진입하자 모퉁이가 나왔는데, 앞쪽에서 새소리가 들려왔고, 석목의 안색이 변했다. 순간 모퉁이에 몸을 기대고 전방을 본 그의 동공이 수축되었다.

앞쪽에는 일 장 높이의 석문이 있었고, 그 표면에는 백색 보호막이 어려 있었다.

석문 앞에는 회색 옷을 두른 세 명이 서 있었고, 그중 키가 큰 두 사람이 좌우에서 두 손에 불빛을 두른 채 석문으로 빛을 날리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체격이 왜소한 가운데 사람은 별 다른 움직임 없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입으로 뭔가 중얼거리는 중이었다.

세 사람의 기운으로 보아서 모두 지계급의 실력이었다.

그때 빛이 번쩍이더니 팔각형의 손잡이가 작은 체구의 인영 앞에 나타났다.

그 인영이 그것을 두 손으로 돌리자 손잡이에 흰색과 푸른색, 붉은색의 세 종류 빛이 나타났다. 그 빛은 빠르게 밝아지더니 그대로 석문으로 날아갔다.

석문 위의 흰 빛은 그 세 빛과 접촉하더니 결국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고, 잠시 뒤 흰 빛은 얕은 한 층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왜소한 인영이 낮게 일갈하자 세 빛의 굵기가 더해졌다. 곧 빛의 기둥에 세 가지 색의 부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체구가 큰 다른 두 인영의 두 손에 두른 회광도 빛을 더했고, 이어 회광에 초록빛도 섞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석문 위의 백색 장막이 출렁이더니 결국 산산이 깨져나갔고, 석문이 거대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렸다.

석목은 그 광경을 보고 표정이 변했다.

중간의 왜소한 인영이 손잡이를 거두고 손짓했고, 셋은 석문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자리를 떠나고 잠시 뒤 석목도 그 뒤를 따랐다.

석문의 뒤는 또 다시 어두운 통로로 이어져 있었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석목은 앞의 셋에게 들킬까봐 신식(神識)으로 탐색하지도 못했고, 오직 육안에 의지하며 셋의 뒤를 밟았다.

그의 시력은 비록 채아에게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동급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몸에 두른 녹색 망토 덕분에 정신력의 감지를 피할 수 있는 만큼, 앞의 셋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통로는 그리 길지는 않았다. 대략 십 장에서 이십 장 정도의 길이였다.

세 인영은 빠르게 통로를 지났다. 그들은 곧 종유석이 늘어져있는 십 여장의 공간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통로의 맞은편에는 일 장 높이의 석문이 또 있었다. 그 문의 좌우에는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원숭이 조각상이 있었다.

석목은 그걸 보고 속으로 기뻐했다. 이곳의 석문은 16층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았기 때문이다.

석문 위에는 마찬가지로 백색 보호막이 금제로 걸려 있었다. 다만 이곳의 금제는 이전의 석문에 있던 것보다 훨씬 단단해보였다.

세 사람은 석문 앞에 서서 전처럼 보호막을 깨뜨릴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한쪽에 있는 종유석이 굉음을 내며 터져나가면서 구멍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더니 구멍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덩치 큰 인영과 부딪쳤다.

그 큰 체구의 인영도 곧바로 반응하며 몸에서 회색빛을 뿌리면서 반격했다.

펑! 펑!

격렬한 타격음과 함께 양쪽 모두 뒤로 물러섰다.

석목은 튀어나온 그림자가 전신이 까만 늑대 인형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신장은 이삼 장 정도에 유연한 몸이었고, 사지에는 예리한 발톱이 마치 칼날처럼 벼려져 있었다. 주둥이에도 비수와 같은 이빨이 있었다.

늑대 인형의 등에는 가시 같은 것이 있었는데, 꽤나 굵직한 것이 무척이나 사나워보였다.

석목은 그 인형을 잠시 가늠해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생김새는 조잡했지만 발산하는 기운은 강대했기 때문이다. 그 늑대 인형은 이미 지계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석목은 일전에도 짐승 인형을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매우 약했다. 이곳 능천봉에서 저런 지계급의 인형을 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는 늑대 인형을 한 번 더 살피고는 회색 옷을 입은 인영 쪽을 다시 보았다. 늑대 인형과 한 번 맞부딪힌 그의 두건이 찢어져서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그를 본 석목의 낯빛이 바뀌었다.

회색 옷 아래 있는 것은 각진 얼굴의 야만족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의 손과 발에는 녹색 털이 길게 나 있었고, 손에도 긴 녹색 손톱이 나있었다. 그리고 시선은 음침하고 생기가 없었다.

회색 두건은 기운을 가려주는 효과가 있었는지, 그것이 찢기고 나니 각진 얼굴의 남자에게서도 강렬한 사령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강시공!”

석목이 크게 놀랐다.

늑대 인형는 몸을 바로잡더니 곧바로 검은 빛이 되어 야만족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주둥이를 크게 벌려서 남자의 머리를 노렸고, 한쪽 발은 가슴을, 다른 한쪽 발은 복부 쪽을 노리고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야만족 남자는 미동도 없이 늑대 인형의 공격에 맞섰고, 피할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푹! 푹!

둔탁한 소리와 함께 늑대 인형의 날카로운 앞발이 남자의 몸을 찔렀다. 그러나 앞발은 깊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남자의 목을 문 이빨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각진 얼굴의 남자의 눈에서 녹색 빛이 번뜩였다. 그는 두 손으로 늑대인형을 단단히 끌어안고는 죽일 듯이 조였다.

바로 그때 늑대 인형의 뒤에 인영이 나타났다. 체구가 큰 남은 한 명이었고, 그의 얼굴 역시 이미 드러나 있었는데, 무표정한 중년의 야만족 남자였다. 그 역시 강렬한 사령의 기운을 뿜고 있었고 몸에는 긴 초록색 털이 나있었다.

중년의 야만족은 사납게 녹색 빛을 번뜩이며 낮게 포효했다. 이어 그의 오른손이 잔상을 남기며 늑대 인형의 등 뒤를 찔렀고, 곧 늑대 인형의 몸에서 계란 크기 정도의 흑색 결정을 뽑아냈다.

늑대 인형의 몸에서 뿜어 나오던 빛이 사라졌고, 늑대 인형은 그대로 땅에 엎어져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운을 뿜던 흑색 결정이 사라지자 그냥 껍데기만 남아버린 것이다.

왜소한 체구의 인영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고, 심지어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도 않았다. 그의 두 눈은 오직 석문의 금제를 향해 있었다.

그 인영은 아까의 팔각형 손잡이를 다시 꺼내더니, 삼색의 빛기둥을 석문에 쏘았다.

그러자 석문 위의 금제는 마치 살아 있는 듯, 하얀 빛을 한 점에 집중해서 방패를 형성해 삼색 빛기둥을 저지했다.

“이중의 금제라니. 시간이 조금 걸리겠어.”

회색 옷을 입은 자는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팔각 손잡이를 회수했다.

곧이어 손을 휘두르자, 회색 깃발이 날아가서 지면에 꽂히며 하나의 법진을 형성했다.

멀리서 숨어 있던 석목은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는 이마를 찌푸렸다.

회색 옷을 두른 그 사람의 목소리는 어딘가 익숙했다. 아는 사람의 목소리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잠시 뒤, 그 회색 옷의 사람이 깃발 하나를 꺼내서 땅에 꽂으니 타원형의 법진이 완성되었다.

이어 그가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땅 위에 꽂힌 수십 개의 깃발이 회색 빛기둥을 쏘았다. 그 빛들은 한 군데로 뭉쳐지며 두꺼운 하나의 빛이 되어 석문으로 날아갔다.

석문 위에 있는 금제가 흰 빛을 번쩍이며 다시 방패를 형성해 회색 빛기둥에 저항했다.

그러자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이 가볍게 웃으며 법결 하나를 내보냈다.

순간 회색의 빛기둥이 갑자기 쪼개지더니 여러 줄기가 되어 백색의 방패에 들러붙었다.

회색 옷의 사람이 다시 아까의 팔각 손잡이를 소환해서 삼색 빛기둥을 석문으로 쏘았다.

하얀 방패가 격렬하게 떨리더니 회색빛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아쉽게도 별 효과는 없었다. 회색빛은 단단하게 방패를 묶어두고 있었다.

삼색 빛기둥으로 인해 석문의 금제가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두 야만족 남자도 다시 두 손에 회색빛을 띠면서 석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약 일 각을 지나자 석문에서 빛이 두 번 반짝이더니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왜소한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의 얼굴에 기쁨이 서리며 손짓을 했고, 중년의 야만족 남자가 석문 앞에서 두 팔에 힘을 주자 석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석목은 몸을 조금 내밀어서 석문 뒤의 공간을 확인하고는, 곧 안색이 바뀌었다.

석문 안의 내부는 16층의 공간과 거의 비슷했는데, 바닥에는 비취색이 깔려 있었고 사면과 천장은 검은색이었다. 꽤나 기괴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석실의 녹색 바닥에는 굵은 금색 부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마치 거미줄처럼 석실을 온통 감싸서 거대한 법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법진의 중앙에는 하얀 단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이삼 장 높이의 흑색 십자가가 놓여 있었다.

십자가의 위에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의 형체가 매달려 있었다. 그는 갖은 고초를 겪었는지 전신에 상처가 가득했고, 성한 곳이 거의 없어 보였다.

석목은 드러난 석실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사람처럼 보이는 그 인물은 사지가 십자가에 거대한 녹색 못으로 박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십자가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서 아래의 단상에 떨어지고 있었다.

왜소한 체구의 인영은 석실의 광경에 놀란 듯 보였으나,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그때, 쇠약하지만 웅장한 목소리가 석실에 울려 퍼졌다.

“너희는 누구냐. 이곳까지 들어오다니…….”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은 깜짝 놀랐다. 밖에 있던 석목도 마찬가지로 놀란 기색이었다. 그의 시선이 십자가를 향했다.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은 소리가 난 곳을 찾다가 십자가 위의 피투성이 형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직 살아 있는 건가?”

그 형체는 이미 눈이 없어진 채였지만, 고개를 힘겹게 들어서 회색 옷차림의 사람을 향했다.

숨어서 지켜보던 석목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 그 형제가 방금 자신이 있는 곳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명월교의 사람이었나……. 거기에 반은 강시인 야만족 둘이라니. 보아하니 야만족의 장로 아니면 족장 정도는 되어 보이는군. 허허, 또 뒤따라와서 숨어 있는 자까지……. 이곳이 이렇게 복작복작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그 형체가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었다.

회색 옷의 사람은 그 말을 듣고는 두 말 없이 몸을 돌려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십여 개의 긴 창이 공중에 나타나서 석목이 몸을 숨긴 곳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우르르 쾅쾅!

창이 석문 밖의 구석에 꽂히면서 돌이 박살이 났고, 그 사이에서 한 인영이 석문 안으로 날아와서 가볍게 착지했다. 당연히 그는 석목이었다.

석목이 녹색 망토를 걷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은 숨어 있던 석목이 공격을 피한 게 의외였는지, 아래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이고, 무슨 목적으로 우리의 뒤를 쫓아온 것인가?”

석목은 그때까지도 아직 뱀 머리를 가진 요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의 질문에 그저 웃어보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할수없지. 죽여라!”

회색 옷을 입은 사람이 석목을 향해 손짓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좌우에 있던 강시가 번개처럼 움직여서 석목을 향해 덮쳤다. 농밀한 사령의 기운이 그를 공격해왔다.

석목은 정신을 집중했다. 저 두 강시는 모두 지계의 실력자였다. 방심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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