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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299화 (299/916)

299화. 그림자

유안이 두 손을 몸 앞으로 가져와 결인하자 핏빛이 반짝이더니 커다란 번개가 떠올랐고, 그 앞에 금빛 해골이 수놓아졌다. 바로 천귀번(天鬼幡)이었다.

핏빛이 반짝이자 천귀번의 금색 해골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입에서 커다란 핏빛 기둥 한 줄기가 뿜어져 나와서 푸른색 손바닥에 부딪혔다.

쿠쿵!

커다란 소리가 울려퍼졌다.

푸른색 손바닥은 핏빛 기둥에 단번에 꿰뚫렸고, 두어 번 반짝이더니 마침내 흩어졌다.

순간 유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다리가 후들거리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가 곧 다시 똑바로 섰다.

바로 그때, 다른 쪽에서도 굉음이 들려왔다.

석목이 천천히 붉게 변한 왼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손 위에서는 붉은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에게 빠르게 다가오던 푸른색의 거대한 손바닥은 이미 사라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석목의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는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고 푸른색의 손바닥을 없애버렸다.

유안은 그 광경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선배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설마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단약을 하나 꺼내 먹고 안색이 돌아온 유안이 창원왕을 돌아보며 물었다.

붉게 물들었던 석목의 왼손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는 중급의 불 속성 영석을 손에 쥐고 그 영력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었다.

석목은 변함없는 눈빛으로 창원왕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왼손을 본 창원왕이 얼굴에 의아하다는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좋아, 너희 두 사람이 본좌의 공격을 막아낸 걸 보니 능력이 미천하지 않을 터, 나와 협력 할 자격이 있다.”

창원왕은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우리가 당신을 구했는데, 당신은 아무 이유 없이 우리를 습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협력하자고 이야기하니,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입니까?”

유안이 말했다.

“하! 너 같은 애송이가 감히 나 창원왕에게 따지고 드는 것이냐?”

창원왕이 차갑게 말하며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그때 조용히 있던 석목이 입을 열어 말했다.

“선배님, 이곳은 금제가 발동됐기에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밀실을 열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겠다는 약속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창원왕은 석목을 쳐다보더니 분노의 기색을 조금 가라앉혔다.

“하하, 이 꼬맹이는 뭘 좀 아는군. 잘 보아라!”

다음 순간, 창원왕이 두 팔을 펴자 온몸에서 눈부신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 안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뼈마디가 떨리는 듯하더니, 갑자기 몸집이 몇 배로 커졌다.

이와 함께 몸을 뒤덮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형태가 흉측하게 변했다.

석목과 유안의 안색이 점점 변했다. 그들은 서둘러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며 동시에 방어 자세를 취했다.

석목은 오른손에 운철흑도를 든 채 몸의 진기를 왼손으로 집중시켰다. 유안은 검붉은색 깃발을 올리며 야만족 강시 두 구를 불러 앞을 막았다.

창원왕은 두 사람의 움직임을 보지 못한 듯, 한 순간에 밀실 정중앙으로 움직인 뒤 고개를 들어 지붕 위를 바라보았다.

석목은 그 모습을 보고 무언가가 생각나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창원왕 주변에 푸른빛이 퍼져나갔고, 거대한 푸른빛이 머리 위로 물밀듯이 밀려왔다.

다음 순간 창원왕의 머리 위에 왜소한 무언가의 모습이 나타났다.

석목과 유안은 순간 멍해졌다.

그것은 겨우 반 자 크기에 몸 전체가 푸른색 털로 뒤덮인 원숭이의 허영이었다. 보기에 작고, 두 눈은 날렵하며,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창원왕의 원신이었다.

“원신이 나타났다!”

석목이 중얼거렸다.

원신이 눈을 뜨자 창원왕의 두 눈은 어두워졌다. 두 팔을 늘어뜨려 약간 위축된 모습이었다.

작은 원숭이의 허영은 나타나고 석목과 유안을 바라보지 않고, 목을 들고 입을 크게 벌리더니 작은 이빨들을 드러냈다.

사람을 오싹하게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밀실의 지붕은 원래 촘촘한 부문이 가득했지만, 석목이 들어와서 금색 눈으로 훑어봤을 때는 특별한 것은 없어보였다. 그저 일반적인 결계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원숭이의 허영이 소리를 내며 지나가자 지붕 표면의 무늬들이 갑자기 밝아졌다. 이어 그것들은 서로 뒤엉켜서 이삼 장 크기의 담청색 원형막이 되었다.

둥근 빛의 막의 표면이 마치 봄바람이 호수를 스치듯 소용돌이를 이루며 물결쳤다. 이내 헤아릴 수 없이 심오한 금제 부문이 하나 더해지면서, 마치 호수의 작은 물고기처럼 푸른빛을 띠었다. 그것은 빛의 장막 사이로 쏟아져 나와서 파문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옅은 청색을 띤 빛의 막 표면 전체가 빼곡한 부문들로 가득 찼다.

동시에 작은 원숭이 허영은 푸른빛이 되어 날렵하게 창원왕의 몸에 내리꽂히더니 종적을 감췄다.

창원왕의 원신이 나타났다가 다시 체내로 들어가기까지는 꽤 오래 걸린 것 같았지만, 사실 이는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짧은 순간 석목과 유안은 아연실색했다.

원신이 몸으로 다시 돌아가고 난 후, 갑자기 창원왕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창원왕은 양손을 재빠르게 비틀어서 법결을 펼쳤고, 그러자 한 덩어리의 청색 빛이 몸 앞에 촘촘히 떠올라 움찔거리더니 모두 지붕의 담청색 원형 빛의 막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러나 기세등등하던 청색 빛은 옅은 담청색 빛의 막에 닿는 순간 진흙처럼 소리 없이 녹아들었다. 빛의 장막은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듯했다.

창원왕은 법결을 움켜쥐고 푸른 빛을 끊임없이 불러내며 위로 솟구쳤다.

유안은 허공에 흐르는 빛들을 바라보면서도 얼굴색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석목의 두 눈이 슬그머니 금빛을 띠었다. 그는 푸른 불빛이 들어오면서 천장에 빼곡히 들어찬 부문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푸른색 빛 한 덩어리마다 그에 상응하는 부문 하나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부문이 빠르게 감소함에 따라 푸른빛의 표면은 약간 떨리기 시작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푸른 빛의 표면에 있는 마지막 부문도 사라졌다. 푸른 빛의 표면은 마치 처음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듯이 크게 떨리고 있었다.

“후!”

그때 창원왕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혈을 세 번에 걸쳐 뿜어냈다.

그가 양손을 비비고 휙 휘두르니, 그 세 뭉치의 정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번에 세 개의 커다란 핏빛 부문이 그려졌다. 완성된 글자가 천장의 담청색 원형 빛의 막을 향해 날아가서 번쩍하더니 그 속으로 들어갔다.

빛의 표면에서 푸른빛이 퍼지다가 순식간에 분해돼 흩어졌다. 그것은 한 줄기의 푸른빛이 되어 사방을 향해 돌진했다.

원래 담청색 빛의 막이 있던 자리에 굳게 닫힌 순백의 석문이 나타났다.

유안은 이 광경을 보고 안색이 편해졌다.

석목은 마음속으로 무척 설레고 있었다. 과연 그의 짐작이 맞았다. 이 석문은 꿈속에서 흰 원숭이가 네 요괴를 이끌고 들어갔던 바로 그 문이었다.

세월을 계산해보면 지금은 그때보다 수천 년이 흘렀지만, 이 석문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하! 그 비열한 자식, 이 몸을 수백 년 동안 구금하고 온갖 방법으로 이 비밀 창고가 있는 곳을 캐내려 했지만, 나는 절대 말하지 않았지. 사실 창고는 네놈이 올 때마다 네 머리 위에 있었다!”

창원왕은 금제를 깨는 술법을 쓰고 나자 얼굴에 창백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들고 웃으며 비아냥거리는 말을 했다.

“선배님, 그럼 저 문 뒤에 추선대의 비밀 창고가 있단 말인가요?”

유안이 침착하게 물었다.

“쓸데없는 소리! 내가 직접 넣은 것인데 어찌 틀릴 수 있겠는가! 성왕폐하께서 나를 이끌고 서하를 휩쓸었을 때, 너 꼬맹이는 어디 있었는지도 모르겠구나! 너희 교주는 성왕폐하의 일격도 버텨내지 못했고, 추선대를 꺼내들었지만 성왕폐하의 일격에 두 동강이 났다. 그중 절반을 내가 전리품으로 성지로 가져와 여태 봉인해 놓았으니 너희 명월교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느냐? 거룩한 성왕폐하께서 행방불명이 되지 않으셨다면 이 망망한 서하에 어찌 너희 같은 인간들이 설자리가 있었겠느냐!”

창원왕은 두 눈을 부릅뜨고 유안을 보며 말했다.

“선배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창고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유안은 창원왕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창원왕은 유안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몇 마디 더 비아냥거렸다간 화만 더 날 것 같았다. 결국 유안이 이런 반응을 보이니 허공에 헛주먹질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돌아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석목을 바라보더니,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푸른 털 하나를 뽑아서 날렸다.

그리고 입을 벌려서 뽑아낸 푸른 털을 향해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그 털이 금빛의 명패로 바뀌었다.

그는 명패를 움켜쥐고 머리 위에 있는 석문을 향해 흔들면서, 몇 마디 난해한 주문을 중얼거렸다.

명패의 표면에 금빛이 흐르면서, 옅은 금색 부문이 날아가서 빙빙 돌면서 바로 석문으로 날아 들어갔다.

석문은 진동하는 소리를 내더니 안에서 밖으로 천천히 열렸고, 그 사이에서 금색의 빛이 흘러나왔다. 보아하니 안의 공간이 작지 않아보였다.

석문이 열리는 순간, 석목은 문득 어디에서 본 듯한 익숙한 기운이 전해져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누르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여기가 바로 능천밀고(凌天密庫)다. 우리 요족의 성지 중에서 제일 큰 비밀 장소지. 따라와라.”

창원왕이 머리 위의 석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에 추억을 회상하는 듯한 빛이 스쳤다.

그런데 그들이 막 몸을 움직여 석문으로 향하려는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쿵!

굉음이 울리면서 검은 십자가의 표면에서 검은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십자가가 있던 자리에 검은 점 하나가 허공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점은 이내 커져서 검은색 소용돌이가 되었고, 그 사이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석목과 유안, 창원왕은 크게 놀랐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그 사람의 그림자에 손을 뻗었다.

석목 뒤에는 붉은 빛이 퍼지면서 적원법상이 다시 나타났다. 그의 두 붉은 주먹이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며 번개처럼 사람의 그림자를 향해 날아갔다.

그 주먹이 만들어내는 권풍은 마치 광풍이 노성을 지르고 마귀 원숭이가 포효하는 것 같아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유안의 손에 있는 천귀판도 피를 뿜었다. 그러자 금색 해골이 입을 크게 벌리더니 핏빛 기둥을 뿜었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 용처럼 사람의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옆에 있던 강시 두 마리도 사람 그림자를 향해 회색 주먹을 날렸다.

창원왕은 그 사람의 그림자를 보는 순간, 눈에서 갑자기 불이 켜졌다. 그의 입에서 경천동지할 소리가 났다.

사람의 그림자가 머리를 들어 푸른빛을 반짝이자 푸른색의 거대한 손바닥이 나타났다. 그것은 조금 전에 석목과 유안을 공격한 것과 같았다.

다만 이번 것은 더 단단했고, 두 사람을 공격했던 것보다 두 배 이상 컸다. 손바닥 위에는 두꺼운 근육이 있어 주위의 공간까지 흔들리며 수많은 기류가 소용돌이 쳤다.

창원왕은 곤경에서 벗어난 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천위의 존재답게 그 위세가 엄청났다. 그런 그에게 석목과 유안, 그리고 두 구의 강시가 가세한 것이다.

한 명은 천상의 경지이고 둘은 땅에서 최고 수준인 데다, 거기에 사령기운을 가진 존재까지 합세한 위력은 아마도 하늘까지 뚫을 수 있을 듯했다.

“하하!”

그 사람의 그림자는 다섯 명이 손을 잡은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그저 미친 듯이 웃기만 했다. 그의 몸에서 노란 빛이 날아와서 순식간에 커졌고, 순식간에 그의 몸을 중심으로 인근의 공간을 가득 채우며 거대한 공 모양이 되었다.

또한 노란 안개 속에서 수많은 자갈이 날아다녔는데, 그것은 마치 하늘을 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금빛이 반짝였다.

석목 등이 가한 공격이 온 하늘을 뒤덮었고, 이내 내리꽂히는 곳마다 크고 작게 움푹 파여 들어갔다. 그 중 금빛이 빠르게 날아들어 번쩍이며 파문을 일으켰지만 그들의 공격은 어떠한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 채 집어삼켜졌다.

석목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바로 그때, 둥근 모래공이 계속 파도처럼 사방으로 밀려왔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석목 일행에게 다가와서 강하게 부딪혔다.

그 바람에 몇 사람이 튕겨나갔고, 그 반동으로 석문 안까지 날아갔다.

이어 하늘에 자욱한 황사가 그 그림자를 휙 감싸더니 노란 용으로 바뀌었고, 그 또한 석문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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