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서염(噬燄)
여인의 법상이 다시 팔을 휘두르자 은색 창이 갑자기 눈부신 빛을 발했고, 그 빛은 날카로운 칼로 변해 신속하게 뼈 벌레의 머리를 베었다.
뼈 벌레는 그제야 반응했지만 이미 피할 겨를이 없었다. 벌레는 화염으로 만들어진 두 눈에서 광기의 빛을 발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온 몸에서는 눈부신 하얀 빛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
벌레의 거대한 몸집이 흰 빛 속에서 갑자기 절반 크기로 줄어들었고, 뼈 벌레가 입을 크게 벌리며 희뿌연 돌풍을 수차례 뿜어냈다. 그 돌풍은 하얀색의 풍룡(風龍)이 되어 은색 창과 맞섰다.
우르릉! 쾅!
두 세력이 충돌하며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을 냈다. 동시에 강풍이 일어나며 주변의 모든 것이 휩쓸렸다.
그 속에서 발산된 눈부신 빛이 연나와 뼈 벌레를 완전히 감쌌다. 밖에서는 그 눈부신 빛 안에서 무슨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었다.
곧 하늘을 찌르던 흰 빛이 금세 사라지면서 허공에서 그림자 하나가 떨어졌다.
그 그림자는 바로 연나였다.
연나의 모습은 매우 처참했다. 갑옷은 절반이 부서져 있었고, 회복된 지 얼마 안 된 몸에는 선명한 균열들이 나 있었다. 게다가 두 눈의 영혼의 화염은 어두웠다. 지극히 많은 원기를 소모한 탓이었다.
쿵!
그때 뼈 벌레의 거대한 몸집도 뒤이어 땅에 떨어지며 굉음을 냈다. 그 바람에 자욱한 먼지와 연기가 피어나며 주변이 순식간에 뿌옇게 변했다.
거대한 뼈 벌레의 머리는 다시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회복하지 못했다. 이미 영혼의 불꽃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다.
연나는 몸을 가누고 일어서더니 뼈 벌레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눈에서 영혼의 화염이 이글거리며 빛을 발했다.
연나는 뼈 벌레 시체의 아랫배 부근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더니 손에 든 운철 흑곤을 휘둘러서 벌레의 복부를 찔렀다.
연나가 손목을 비틀자 곤봉은 이내 벌레의 몸에 큰 구멍을 냈고, 연나는 그 구멍 속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석목은 멀지 않은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단약 한 개를 꺼내 복용하자 비로소 얼굴색이 조금씩 돌아왔다. 다만 그는 방금 전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였다.
한참 후, 석목은 몸을 일으켜서 뼈 벌레의 시체 옆으로 갔다.
연나가 경지를 뛰어넘어서 천위의 뼈 벌레를 죽인 사실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뼈 벌레의 아랫배 근처에 난 커다란 구멍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석목은 전부터 연나가 말 못한 비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혹은 생전에 대단한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연나는 일각이 지나서야 뼈 벌레의 몸에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반짝거리는 등뼈 한 개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연나의 몸에 있는 뼈와 매우 흡사했다.
그 등뼈는 강한 파동을 내뿜고 있었는데, 그것은 왠지 일반적인 법력의 진기가 아니라 어떤 본능적인 힘 같았다.
연나의 은빛 갑옷은 전부 망가져서 그 안쪽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석목은 그런 연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연나의 몸에는 마침 등뼈 일부가 비어 있었다. 이전에는 확실하지 않았는데,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그 비어 있는 곳이 다른 부위와는 조금 다른 듯했다.
그 순간 연나가 손에 든 뼈에서 옅은 회색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그녀의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고, 뼈에 생긴 균열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참 뒤 연나는 고개를 들어 석목을 바라보더니 영혼의 화염을 움직이며 물었다.
“아까는 왜 막아섰어? 너…… 괜찮아?”
석목이 입을 열었다.
“걱정 마. 괜찮아.”
그의 대답에 연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네가 찾던 그 뼈야?”
석목은 연나가 손에 든 등뼈를 보며 물었다.
“응. 돌아가면 한동안 폐관수련을 할 거니까 그동안 네가 호위를 해줘.”
연나가 석목을 보며 말했다.
석목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할게.”
연나는 몸을 돌려서 무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석목은 비령이 있는 반대쪽으로 향했다.
* * *
하루 뒤, 석목과 연나는 명수호로 돌아왔다. 호수를 둘러싼 사령생물의 군단은 여전히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연나는 아무 말 없이 호수 한가운데로 갔다. 그리고 그 안으로 서서히 가라앉더니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석목은 연나가 사라지는 것을 본 뒤, 주변을 살피다가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두 손에 영석을 쥐고 앉아서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며칠 뒤, 석목은 갑자기 깊게 한숨을 들이마시며 두 눈을 떴다.
석목은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일전에 뼈 벌레가 내뿜은 흰색 화염을 흡수한 그의 왼팔은 온통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점점 무겁게 느껴 지는 듯했다.
하지만 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석목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뼈 벌레가 내뿜은 화염의 힘, 그리고 몸속에 있는 붉은 원숭이 법상의 정혈을 잘 다루면 구전현공의 경지가 크게 상승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다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구전현공의 법문에 따라 천천히 몸속의 진기를 움직였다.
원래대로라면 석목은 어떻게 해서든 서하대륙으로 돌아간 뒤 구전현공을 제대로 수련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흡수한 화염의 힘으로 체내에 불 속성 원기가 충만해졌고, 어차피 연나를 위해 이곳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에 수련을 할 생각이었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며칠이 흘렀다.
석목은 명수호의 물가에서 두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의 얼굴색은 하얘졌다가 빨갛게 변하기를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이마에서부터 콩알만 한 땀방울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는데, 고통을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새까만 왼팔 표면에서는 붉은 무늬가 희미하게 가물거렸고, 온 몸은 옅은 적백색 화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화염은 마치 영혼이 있는 것처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사방팔방으로 퍼지면서 인근의 온도가 급속히 치솟았다.
그때 석목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몸 주변에서 감돌던 적백색 화염이 소용돌이치며 머리 위로 모여들었고, 맹렬한 불꽃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불꽃은 고래가 물을 흡수하듯 왼손으로 빨려 들어가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왜 이러지?”
석목이 중얼거렸다.
그는 며칠 내내 골똘히 연구했지만, 뼈 벌레로부터 흡수한 화염의 힘을 아직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구전현공을 이용하면 화염의 힘을 빌려서 왼팔을 단련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그 뒤로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구전현공의 기록에 의하면, 이는 두 번째로 흡수한 흰 원숭이의 정혈이 몸속에서 완전히 섞이지 않아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석목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의 두 눈에는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과거에 바다 속에서 우연히 흡수한 핏빛 안개가 천수 백원왕의 첫 번째 정혈인 것이 틀림없었다.
당시 그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피가 들끓는 것을 경험했다. 이는 능천봉의 비밀창고에서 두 번째 정혈을 흡수했을 때와 증상이 흡사했다.
첫 번째 정혈을 흡수한지는 벌써 십 년도 더 되었다. 그동안 석목은 여러 차례 흰 원숭이로 변했는데, 깨어날 때마다 몸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 뒤로 신비로운 여인에 의해 몸이 타는 고통을 겪으면서, 구전현공의 첫 단계를 순조롭게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럼 흰 원숭이의 정혈이 몸에 녹아드는 것은 시간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두 번째 정혈도 십 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그 작용을 한다는 뜻이 되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석목은 말문이 막혔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을 때,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렸고, 이어서 멀지 않은 호수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은 벌떡 일어나서 호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거울처럼 잔잔했던 호수의 수면에서 마치 끓는 것처럼 보글보글 기포가 솟아올랐다. 뒤이어 수면이 격렬하게 솟아오르더니 핏빛 파도를 일으켰고, 호수 중앙에 거대한 핏빛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소용돌이가 점점 높아지더니 그 가운데서 맑고 투명한 해골이 나타났다. 해골의 두 눈에서는 연한 은빛 영혼의 화염이 흔들리고 있었다.
핏빛 소용돌이가 십여 장 높이로 솟아올랐을 때, 해골의 전신이 공중에 완전히 드러났다.
해골이 허공에서 옅은 흰 빛을 뿌렸다. 그러자 온 몸의 뼈마디에서 부드러운 빛살이 일렁였다.
“연나!”
석목이 소용돌이 꼭대기에 있는 투명한 해골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다시 흰 빛을 따라 허공을 바라보았고, 그 순간 깜짝 놀랐다.
호수 위의 하늘에서 어느새 흰 구름이 하나 둘 모여 큰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하얗고 깨끗한 흰 구름의 덩어리는 성스럽고 정결한 기운을 풍겼다.
알고 보니 그 흰 빛들은 구름에서 쏟아져 내린 것이었다.
석목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놀랐다. 이곳은 음기로 가득한 사령계였기 때문이다.
신식으로 왔을 때나 진짜 육체로 왔을 때나, 이곳 주변은 온통 생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심지어 하늘과 공중에 떠 있는 구름들도 모두 희뿌연 색이라 침울하고 답답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령계의 하늘에 흰 구름이 뜬 것이다.
새하얀 구름은 주변의 희뿌연 하늘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석목이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흰 구름 속에서 갑자기 요동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석목은 그제야 흠칫하면서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한 줄기의 금빛 번개가 흰 구름을 뚫고 호수 한가운데를 향해 내리꽂혔고, 그곳에는 연나가 있었다.
금빛 천둥 번개는 연나의 몸에 떨어질 때마다 황금색 빛의 뱀으로 변했고, 그녀의 몸에서 상하좌우로 꿈틀거렸다.
번개가 거듭 칠수록 연나의 몸은 더욱 많은 금빛 뱀으로 뒤덮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은 금빛에 완전히 파묻혔다. 그리고 마지막 번개가 떨어진 뒤에 연나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멀리서 보는 그 광경은 마치 핏빛 소용돌이가 금빛 누에고치를 떠받들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만 그 고치는 누에가 짠 것이 아니라 흰색 구름에서 내리친 금빛 번개가 만든 것이었다.
하늘의 뭉게구름은 번개를 다 쏘아버린 뒤 층층이 갈라졌고, 흰 연기처럼 변하더니 금세 사라져버렸다.
호수 위에서는 금색 번개가 누에고치의 표면에서 꿈틀거렸다. 동시에 그것은 강력한 금빛을 발산해서 핏빛 호수를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여놓았다.
한바탕 거창하고 요란한 소리에 호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령생물의 군단에서 일련의 소동이 일어났다. 모든 사령생물의 두 눈에서 영혼의 화염이 심하게 흔들렸고, 심지어 그들의 몸까지 으스스 떨리고 있었다.
촤악!
금빛 누에고치에서 한 줄기 거대한 흰색 빛줄기가 발산되더니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그 뒤 눈 깜짝할 사이에 빛줄기가 사라지더니 흰 궁중의장을 입은 소녀의 형상이 공중에 나타났다. 그 형상은 온통 밝고 투명한 빛으로 덮여 있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잠시 나타났던 소녀의 형상은 다시 한 줄기의 흰색 빛으로 바뀌어서 금빛 누에고치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흰색 빛이 들어가자 누에고치가 한 차례 크게 떨렸다. 그러더니 이내 생명을 부여받은 듯 규칙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소녀의 형상을 보는 순간, 석목의 마음속에서는 왠지 모를 감동이 솟아올랐다. 눈앞의 믿지 못할 광경에 그는 금빛 누에고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마 후, 우레 같은 굉음과 함께 금빛 누에고치 표면의 금색 번개가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졌고, 석목은 반짝이는 강렬한 금빛에 눈을 감고 말았다.
잠시 뒤 눈을 뜬 석목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져서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핏빛 소용돌이 위에 있던 금빛 누에고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한 소녀가 두 손으로 무릎을 껴안고 웅크린 채 있었다.
소녀는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고, 새까만 머리가 폭포수처럼 발목까지 드리워져서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 머리카락 뒤로 분홍빛이 감도는 맑고 투명한 소녀의 몸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잠이 든 듯 두 눈을 반쯤 감은 소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경국지색이 따로 없었다. 버드나무 잎처럼 가늘고 긴 눈, 아름다운 각도를 자랑하며 오똑 솟은 코, 앵두같이 탐스러운 입술……. 마치 정교한 조각상처럼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 소녀의 미간에 있는, 영혼의 무늬인 연꽃은 가장 눈에 띄었다. 그 연꽃무늬는 소녀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주었다.
“연나……. 너 맞아?”
석목이 머뭇거리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