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진짜 모습
연나는 석목의 부름을 들은 듯,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을 살짝 움직이더니 두 눈을 천천히 떴다. 그녀는 가을호수처럼 일렁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멍하니 둘러보았다.
석목은 그런 연나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두 뺨이 붉어졌다.
바로 그때, 연나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머리를 부둥켜 잡았다. 마치 무언가가 갑자기 떠오른 듯, 얼굴에는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그녀는 온 몸을 떨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아악!”
순간 석목의 두 귀에서 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곧이어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혼절해버렸다.
석목은 한잠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 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연나가 명수호 옆에 모로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다시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석목은 잰걸음으로 연나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기혈이 솟구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연나의 길고 풍성한 머리가 몸의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속으로 그녀의 백옥 같은 속살이 적당히 드러나 보였다. 연나는 하얀 목덜미를 위아래로 살며시 들먹이며 얕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의 속눈썹이 살짝 움직이더니 눈이 번쩍 뜨였다. 보석 같이 그윽한 두 눈이 석목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석목은 세상 모든 것이 무색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석목의 얼굴과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고, 그는 연나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연나의 두 볼에도 분홍색 기운이 살짝 감돌았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석목의 앞에 알몸으로 누워 있다는 걸 깨닫고 잽싸게 양팔로 가슴을 가렸다.
그녀가 석목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뭘 봐?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죽여 버릴 거야!”
연나의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구슬처럼 맑았다. 예전에 자신과 신식을 통해 대화를 나눌 때와 비슷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이 연나의 몸에서 눈길을 떼기도 전에, 그녀의 두 눈에서 은빛이 감돌았다. 이어서 그녀의 몸이 갑자기 은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곧 촘촘한 은색의 빛들이 연나의 몸 주변을 맴돌면서 눈부시게 빛났다. 석목은 그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은빛이 사라지자 연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은 새로운 은빛 갑옷으로 감싸여 있었다.
연나는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더니, 석목은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서서 호수로 걸어갔다.
호숫가로 다가간 연나는 몸을 굽혀 수면을 보았고, 연나가 호수를 살짝 건드리자 수면이 은빛을 발하더니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핏빛 호수가 마치 수증기가 드리운 듯 거울처럼 투명해졌다.
반짝이는 물빛을 배경으로 은빛 갑옷을 입고 있는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서 있는 자태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연나는 이마로 흘러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호수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 입을 살짝 오므려 웃으며 보조개를 만들었다.
그러나 연나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석목은 연나의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마음 속에서 왠지 모를 이상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연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곧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은빛이 번뜩이더니 작고 정교한 가면이 나타나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연나는 이 모든 걸 마친 뒤에야 몸을 돌려서 석목을 똑바로 보았다.
석목은 연나가 자신을 바라보자 무의식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연나, 이게 네 본래 모습이구나.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는데…….”
석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나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석목의 머리 위에 추선대가 나타났다.
“이건 내게 필요한 것이니, 내가 가질게.”
연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석목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그녀가 손을 흔들자 추선대는 한 줄기 검은 빛으로 변하더니 그녀의 손아귀로 날아들었다.
추선대를 바라보는 연나의 두 눈에서 속을 읽기 어려운 변화무쌍한 은빛이 감돌았다.
추선대는 갑자기 가볍게 떨리더니 그녀의 손을 떠나 날아올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동시에 천상의 소리 같은 말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천하만물은 모두 영이 있거늘, 영이 다하면 무의 형태로 돌아가네…….”
연나가 갑자기 <추선록>의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 반쪽을 가리고 있던 은색 가면이 어느새 사라지고, 절세미모의 얼굴이 드러났다.
주문을 외우자 연나의 몸이 가볍게 허공에 떠올랐다. 그녀의 두 눈에는 은빛이 감돌고 있었고, 은빛은 점점 두 개의 은색 소용돌이로 변하더니 하늘에 떠 있는 추선대에 닿았다.
연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리면서 눈썹 사이에 있는 검은 연꽃이 밝게 빛났다.
석목은 온 몸을 붉은 빛으로 감싸서 주위의 짙은 음기를 막았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우선은 그대로 조용히 연나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살아 있는 자든 죽은 자든 핏줄로 맺어져 천상과 황천에서 떠도네. 청명은 근곤을 흔들고 시공은 그것을 뒤엎어, 혼돈의 세계는 지속되고 하늘은 아득하기만 하네…….”
<추선록>의 첫 대목은 석목도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연나는 경전 전체를 물 흐르듯 막힘없이 외우고 있었다.
석목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두 눈을 반짝이며 속으로 그것을 따라서 외웠다.
연나가 마지막 글자까지 읊고 나자 그녀의 두 눈에서 갑자기 은빛이 발산됐다. 이어 연나가 팔을 들어 올리자 손끝에서 은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 빛은 추선대로 날아 들어갔다.
은빛을 흡수한 추선대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추선대의 표면에 있는 어두운 금색 무늬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원래는 선명하지 않았던 어두운 무늬가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기괴한 모양의 도안으로 변했다.
그 순간, 추선대에서 눈부신 금빛이 쏟아졌다.
연나는 그 빛 속에서 온 몸에 금색 망토를 두른 것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름답고 여린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의 은빛 눈망울과 눈썹 사이에 있는 검은 연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엄을 내뿜었다.
호수 주변에서 해골들의 뼈가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여 구의 사령생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땅에 엎드렸다.
석목은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시선을 허공에 있는 연나에게로 다시 옮겼다.
연나가 수인을 맺자 또 한 줄기의 빛이 생겨나서 추선대로 향했다. 한참 뒤, 심하게 흔들리던 추선대가 곧 조용해지더니 튀어나왔던 금빛 무늬도 다시 사라졌다.
그때 연나가 입을 벌리자 추선대가 갑자기 금빛으로 변하더니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가서 종적을 감추었다.
연나는 석목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며시 그의 앞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두 눈이 뿜어내던 은빛도 서서히 사라졌다.
“연나, 추선대를 알고 있었어?”
석목은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며,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 물건의 이름이 추선대였구나.”
연나가 말하며 입을 벌리자 금빛 덩어리가 손 안으로 날아와서 다시 원래의 모양으로 변했다.
석목은 그 모습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그가 다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연나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석목에게 던졌다.
석목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받았고,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나를 바라보았다.
“제단을 만들 때 필요한 재료는 내가 대신 준비해줄게. 그동안 이 물건은 네가 보관해.”
석목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연나는 이 한마디만 던진 뒤 몸을 돌려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두 눈에서 다시 은빛이 감돌았다.
그러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천여 구의 해골들이 일사분란하게 일어났고, 그들은 두말없이 뒤돌아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 * *
열흘 후, 호숫가의 공터에서 갑자기 희뿌연 빛줄기가 떠올랐다.
빛줄기의 주변에서는 원형의 물결이 겹겹이 출렁이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인근 전체가 흐릿해지고 희미해졌다.
흰색 빛줄기는 그 아래에 있는 반경 수 장 크기의 검은색 제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단 주변은 백골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제단 위의 공중에는 추선대가 떠 있었는데, 그 표면에는 금색 무늬가 돌출되어 있었고, 추선대는 천천히 회전하면서 금빛을 발산하는 중이었다. 그 금빛은 크지 않은 제단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석목이 그 안에서 금빛에 몸을 담그고 서 있었다.
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은색 갑옷 차림의 소녀에게로 향했다.
연나도 때마침 그를 보았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연나가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준비됐어?”
“응.”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석목의 마음은 아주 복잡했다.
과거에 국 사숙을 따라서 사령계에 들어온 석목은 얼떨결에 연나를 자신이 부리는 사령으로 삼았다. 그런데 연나의 실력이 자신보다 빠르게 향상됐을 뿐더러, 이제는 육신까지 얻어서 절세미인으로 변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동안 석목은 연나의 과거가 궁금해서 몇 차례 물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연나는 그때마다 머리를 감싸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는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석목은 그녀의 비명에 한 차례 더 정신을 잃고 나자, 더 이상 캐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사색에 잠겨 있는 사이에 연나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한 줄기 은빛이 반짝이며 공중에 떠 있는 추선대로 날아갔다.
은빛이 추선대에 흡수되는 찰나, 아래 제단에서 솟아오른 하얀 빛이 커지면서 석목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흰 빛이 사라졌을 때는 석목도 자취를 감추었다.
연나의 두 눈에 떠올랐던 은빛이 사라졌고, 그녀가 다시 손을 휘두르자 공중에 떠 있던 추선대가 금빛으로 변해서 그녀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연나는 검은 제단 쪽으로 가서 손을 뻗어 제단 가장자리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뒤돌아서 명수호로 눈길을 돌렸다.
연나의 깊고 영롱한 두 눈은 멀리 있는 호수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고, 호수 너머에 있는 더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그녀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은빛이 줄기줄기 생겨나서 그녀의 몸이 빛났다. 무형의 기류가 주위를 빠르게 흐르면서 그녀의 새까맣고 긴 머리를 가볍게 흩날렸다.
연나가 얼마 후에 눈을 뜨자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두 줄기의 은빛이 발산되더니 기세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펑! 펑! 펑!
연이은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조용하던 호수가 갑자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항아리 굵기만 한 물줄기 수십 개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피의 비를 내리는 것처럼 다시 호수로 떨어졌다.
연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면서 그대로 호숫가에 조용히 서 있었고, 그녀는 그저 물기둥이 피의 비가 되어 흩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호숫물이 피의 비로 변해 아래로 사정없이 떨어졌지만, 연나의 몸은 조금도 젖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기(氣)로 그것을 차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