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비밀스레 찾아온 손님
어느덧 세월이 흘러서 이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서하대륙에 산봉우리로 가득한 어느 거대한 검은 섬이 있었다. 섬의 반경은 백 리 정도로 그리 작지 않은 크기였다.
섬에서 가장 큰 산봉우리의 꼭대기에서 짙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때때로 거대한 굉음을 내는 그것은 바로 활화산이었다.
산봉우리 내부에는 지하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으로 붉은 용암이 흘러내려서 들끓는 호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수 수면에서는 이따금 뜨거운 기포가 솟아올라 터지곤 했다. 용암은 때때로 세차게 요동치며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고, 그럴 때마다 동굴 전체가 붉은 색으로 뒤덮였다.
또한 용암 호수의 중심에는 거대한 검은 바위가 있었고, 그것은 마치 호수 한복판에 있는 검은 섬처럼 돌출해 있었다. 검은 바위는 수면보다 높았기 때문에 용암이 튀어 올라도 닿지 않았다.
바위 위에는 푸른 옷을 입은 사내 한 명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사내는 체격이 크고 피부가 까무잡잡했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밖으로 드러난 왼팔은 불에 구운 것처럼 시커먼 색이었다.
이곳의 타는 듯한 열기는 사내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듯했다.
그의 몸에서는 붉은 빛이 은은하게 감돌았는데, 안개가 허공에서 한 가닥의 붉은 실로 변해서 그의 체내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사내는 바로 석목이었다.
그는 야만족과 요족의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폐관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석목이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새까만 팔뚝에서 흰색의 불꽃이 일어났다.
확!
불꽃은 서서히 밝아지더니 마침내 하얀 화염이 되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얀 화염은 석목의 왼팔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몸에 걸치고 있던 푸른 옷이 금세 재가 되어 날아오르며 상반신이 드러났다.
그의 근육은 금속처럼 그윽한 빛을 발산하고 있어서, 마치 무쇠처럼 단단해보였다. 예전에도 팽팽했던 근육이 지금은 오히려 응축되어서 철근처럼 단단하고 늘씬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석목의 체내에서 감도는 사나운 힘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만약 조금만 부추기면 화산처럼 폭발할 수 있는 강한 힘이 그의 몸에서 돌고 있었다.
곧이어 석목의 왼팔 전체가 까맣게 변했다. 하얀 화염이 타오르며 팔 전체를 뒤덮었고, 표면에서 붉은 영문(靈紋)이 일어나서 마치 달아오른 용암 같았다.
석목이 왼팔을 들어 올리자 지독한 고온이 사방으로 퍼졌고, 그것은 주변의 열기를 압도할 정도로 뜨거웠다. 곧 팔뚝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며 파동을 일으켰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떠서 불에 타는 듯한 왼팔을 보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아래쪽의 용암 호수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와 그의 왼팔에 녹아들었다.
왼팔에서 타오르는 화염이 점점 커졌고, 팔의 색깔이 점차 밝아지더니 열기가 곧 임계점에 달했다.
순간 석목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 년 간의 고생 끝에, 그는 체내에 녹아든 두 번째 흰 원숭이 정혈의 힘을 빌려서 왼팔에 봉인된 뼈 벌레의 힘을 완전히 정련했다. 그리고 구전현공의 첫 단계를 최고봉으로 이끌었다. 이제 완성까지는 단 한 걸음만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왼팔에서 치솟은 불길이 흔들리더니 주변 열기를 흡수하는 것을 멈췄고, 잠시 후 빛이 빠르게 어두워지더니 뿜어내던 열기도 가라앉았다.
석목은 이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왼팔 표면의 영문(靈紋)과 화염이 빠르게 사라지자 왼쪽 팔은 이내 원래의 피부색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었다. 매번 간발의 차이로 구전현공의 첫 단계를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왼팔이 포화 상태에 이르러서 불 속성의 영력을 더 이상 흡수할 수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석목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진묘계에서 푸른색 옷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발을 한 번 튕기자 그의 몸이 총알처럼 튀어 오르더니 동굴 앞의 통로에 내려섰다.
우르릉!
그가 땅에 발을 딛자 아래의 거대한 검은 돌이 갑자기 한바탕 흔들리면서 동굴 전체가 진동했다. 용암 호수가 출렁이다가 용솟음치며 절벽에 부딪쳐서 와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본 석목의 얼굴에서 근심이 조금이나마 사라졌다. 비록 구전현공은 더 이상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었으나, 다른 역량은 이 년 사이에 많이 향상됐기 때문이다. 흰 원숭이의 정혈로 인해서 적원화경의 경지가 빠르게 상승한 듯했다.
그의 실력은 이제 지계의 중기에 가까워져 있었다. 온신술의 법결은 더 이상 할 수 없었지만, 그는 매일 밤 탄월식을 수련해온 터라 그 법력 또한 갈수록 숙달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향상을 이룬 것은 대력마원탈태결(大力魔猿脫胎決)이었다.
일전에 창원왕으로부터 흰 원숭이 정혈을 받은 덕분에, 석목은 대력마원탈태결을 두 단계나 돌파해서 대원만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예전보다 몇 배나 힘이 세지면서 바위 같았던 왼팔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이제 석목은 맨손으로도 쉽게 영기에 흡집을 내고, 주먹과 발만으로 산천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방금 전에도 발로 가볍게 바닥을 튕겼을 뿐인데 동굴 전체가 흔들리면서 검은 돌이 박살이 날 뻔했다.
그의 육체 또한 상당히 강인해지고 무시무시해졌다. 금전검 정도의 하급 영기로는, 아무리 진기를 불어넣는다고 해도 더 이상 그를 해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전현공의 첫 단계까지 더한다면, 그는 어떤 공법과 영기도 쓰지 않고 육체만으로도 천위 요수와 맞먹을 만큼 강해져 있었다.
석목은 이것저것 생각하며 동굴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청익비차를 타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 * *
잠시 후, 청익비차는 멀지 않은 동굴 앞에 멈추었다.
석목은 동굴의 밀실에 들어가서 돌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은 뒤, 구전현공 첫 단계의 법결을 묵묵히 외우기 시작했다.
구전현공의 첫 단계에서 막힌 이유는 그의 왼손이 불 속성의 영력을 흡수하지 못해서였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몸에 녹아들어 있는 흰 원숭이 정혈과 흡수한 불 속성의 영력, 그리고 더 나아가서 왼팔 전체의 상태까지 모두 구전현공의 첫 단계 완성에 적합한 조건이었다.
즉, 이 정도 조건을 갖추고 있다면 첫 단계가 충분히 원만하게 완성되어야 마땅했다.
석목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을 때, 귓가에서 갑자기 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석두, 염합회에서 누가 찾아왔어. 폐관 수련 중이니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어.”
“알았어.”
석목이 조용히 답했다.
“그냥 돌려보낼까?”
“아니, 잠깐 기다리라고 해.”
채아의 물음에 석목은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가 동굴을 나서자 갈색 옷을 입고 회색 수염을 기른 노인이 서 있었다.
석목은 갈색 옷을 입은 노인을 바라보며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목은 노인의 가슴과 소맷부리의 무늬를 보고 그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서미군도(西尾群島)의 스물두 개 섬에서 가장 큰 세력 중의 하나인 염합회의 관리인이었다. 지금 석목이 지내고 있는 섬도 염합회가 장악하고 있는 몇 개의 화산섬 중 하나였다.
물론 가장 큰 세력이라도 염합회는 동주대륙이나 서하대륙의 명문 종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인원수도 수백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이 섬에서는 맹주라고 할 수 있었다.
이곳 화산섬은 불 속성의 영석과 재료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염합회는 능염정 등 희귀한 광석을 채굴해 서하대륙에 팔면서 세력을 키워왔다.
이 년 전에 석목은 자신의 실력을 믿고 무작정 이곳을 찾아와 염합회 회장을 만났다. 그리고 많은 영석을 지불하고 분화구를 일시적으로 사용하겠다는 계약을 맺었다. 단, 그는 자신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염합회 사람들이 와서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석 공자,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노인은 석목을 보자 예를 갖추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전에 회장님과 약조한 것은 잊지 않으셨을 텐데요.”
석목이 차갑게 말했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이렇게 불쑥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석 공자를 꼭 만나야 한다는 사람이 있어서요.”
노인이 말했다.
“그게 누구죠?”
석목이 물었다.
“석 공자의 오래된 벗이라며, 꼭 만나줄 거라고 하더군요.”
“이름도 밝히지 않는 자는 만나지 않습니다.”
노인의 말에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노인은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또 말하기를…… 석 공자가 간절히 원하는 소식을 가지고 왔답니다. 참, 능천봉을 언급하라는 말도 전했지요.”
석목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 사람에게 안내하십시오.”
* * *
일각 후, 석목은 노인의 안내를 받아 인근의 섬에 도착했다.
그 섬은 석목이 거주하고 있는 곳과는 달랐다. 푸르른 풀과 나무들이 무성했고, 정자와 누각도 많이 지어져 있었다.
석목과 노인은 섬의 오솔길을 지나 잘 정리된 관목 숲을 가로질렀고, 이윽고 어느 한적한 마당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노인은 석목에게 인사를 한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채아, 밖에서 살펴보다가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알려줘.”
석목이 채아에게 말했다.
채아가 멀리 날아간 후, 석목은 닫혀 있는 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정원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문 앞으로 굽은 오솔길이 나 있었는데, 길 주변에는 온갖 화초가 울창했다. 석목은 곧바로 정원의 안쪽에 있는 각루(角樓)로 향했다. 그는 걸어가면서 신식을 이용해서 사방을 훑어보았다.
각루 앞에 도착한 석목은 입구에서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서 나무로 만들어진 주홍색 문을 열었다.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각루 입구의 맞은편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푸른색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었다.
석목이 들어서자 노인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셨군요.”
석목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오래된 벗이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처음 뵙는 분이군요.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석목의 말을 들은 노인의 입가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하지만 그는 석목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석목은 순간 위험을 감지하고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그가 다시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노인이 두 눈에서 푸른빛을 반짝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의 가느다란 팔이 느린 듯 보이지만 빠르게 석목을 향해 뻗어나갔다.
뻗을 때는 평범했던 노인의 팔은 석목의 어깨 앞에 다다르자 갑자기 푸른빛이 감돌더니, 그 힘이 열 배가량이나 커졌다.
노인의 손에서 순식간에 십여 장이나 되는 푸른색의 거대한 손바닥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것은 하늘을 뒤덮는 연기를 내뿜으며 석목을 향해 날아왔다. 그 손바닥에서는 천위의 기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석목은 속으로 크게 놀라며 발을 튕겨서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노인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피할 수가 없었다.
석목은 몸을 획 돌렸다. 그의 두 눈이 금빛으로 이글거렸다. 그의 등 뒤에서 순식간에 빛이 번쩍이더니 벌겋게 달아오른 붉은 원숭이 법상이 나타났다.
석목이 두 손을 들자 법상도 그의 움직임에 따라 두 팔을 들었다. 그리고 붉은 화염이 이글거리는 팔로 푸른색 손바닥을 맞받아쳤다.
쾅!
굉음과 함께 붉은 원숭이 법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두 팔은 거대한 압력에 눌려서 불꽃을 튕기며 힘겹게 버티는 중이었다. 법상의 몸은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푸른 손바닥의 압력은 어느 정도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법상과 석목을 조금씩 아래로 누르고 있었다.
석목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느새 한쪽 무릎을 꿇은 그의 두 다리가 땅속으로 박혀들고 있었다. 곧이어 바닥이 깨지면서 갈라진 틈이 그물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이내 주위에 있는 담까지 금이 갔다.
노인은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석목의 실력에 놀란 눈치였다. 그의 손바닥이 갑자기 푸른빛을 뿜어내면서 더욱 강하게 내리눌렀다.
그러자 푸른색 손바닥이 눈부신 빛을 발하며 더욱 강한 위력을 발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