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별바다의 세계
석목은 전과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느꼈다. 푸른 손바닥의 압력으로 인해 그의 몸은 계속해서 눌리고 있었다.
하지만 석목은 이를 악물고 몸의 영력을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왼쪽 손바닥 전체가 갑자기 새까맣게 변했다.
화악!
상하좌우로 교차하는 적홍색의 영문(靈紋)이 밝게 빛나더니 이내 팔뚝까지 번졌다. 마치 팔 전체가 불에 타는 듯한 모습이었다.
“으윽!”
석목은 큰 소리를 내뱉으며 왼팔을 굽혀 힘을 가다듬었고, 이어 푸른 손바닥을 향해 다시 거칠게 내뻗었다. 그러자 붉은 원숭이 법상의 왼쪽 주먹이 푸른색 손바닥에 맞부딪혔다.
펑!
붉은 원숭이 법상의 주먹과 푸른 손바닥이 충돌해 맹렬한 불꽃을 튀겼다. 거대한 힘에 의해 공기에 파장이 일며 사방으로 퍼졌다.
쿵쾅!
각루가 와르르 무너지고 마당도 순식간에 평지로 변했다.
파장의 중심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옷이 세찬 바람에 나부끼며 소리를 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처음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치릭치릭!
푸른색 손바닥 그림자의 표면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가 났다. 그 균열은 점점 더 크게 번지더니 그대로 터져버렸다.
바로 그때, 노인이 갑자기 갈라진 목소리로 웃었다.
곧이어 노인의 몸에서 한줄기 푸른빛이 떠올랐고, 푸른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더니 우락부락한 근육이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몸집도 커지더니 거대한 푸른색의 원숭이로 변했다.
“창원왕!”
석목은 그 원숭이를 보고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창원왕이 풍기는 기운은 전과 비슷하거나 한 단계 높아져 있었다. 다만 풍모가 예전보다는 조금 초췌해진 느낌이었다.
석목이 기억하기로는 그날 창원왕은 폭발 속에서 몸의 절반이 터져 없어졌고, 해골의 몰골로 황룡 도인의 손에서 간신히 도망쳤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온전한 상태였다. 원기를 대량으로 소모하는 무슨 비술을 동원한 것이 틀림없었다.
창원왕은 석목에게로 다가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콜록, 콜록…….”
그가 입을 열자 연이서 기침이 흘러나왔다.
놀란 석목은 경계 태세를 유지한 채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겁니까?”
창원왕은 즉시 대답하지 않고 기침을 몇 차례 더 했다. 그리고는 석목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석 도우, 그대는 혹시 몸속에 흰 원숭이 정혈을 가지고 있는가?”
석목은 그 말을 듣고 살짝 놀랐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나 창원왕은 그의 한순간의 표정 변화를 눈치 챘다.
“내 생각이 맞았나 보군. 능천봉의 비밀창고에서부터 이미 알아봤지.”
창원왕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석목은 덜컹 내려앉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부인했다.
“석 도우, 다 알고 왔으니 부인할 필요 없네.”
창원왕이 한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당신이 아무리 천위의 강자라지만 지금은 몸이 많이 상한 상태입니다. 본격적으로 실력을 겨룬다면 아마도 나를 이기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다른 볼일이 없으면, 저는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더 이상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다.
“허허, 싸우자고 찾아온 거 아니네. 방금 전은 단지 자네의 실력을 시험해본 것뿐이다. 나야 괜찮지만 자네는 큰 화를 목전에 두고도 모르고 있다니, 참으로 슬프고 개탄할 일이로군.”
창원왕은 얼굴에 묘한 웃음을 띠며 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석목은 그의 말을 듣고 얼굴빛이 약간 변했다. 순간적으로 무수히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근거 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는 않습니다만.”
석목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능천봉 비밀창고에 있는 제단에 설치된 봉인은 서하대륙 칠십이 요족을 다스리던 백원왕께서 친히 세운 것이네. 정혈의 기운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천위의 경지에 있는 자라 해도 그곳에 접근할 수가 없지. 자네도 그날 황룡이 당하는 꼴을 보지 않았는가?”
창원왕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밖으로 향하던 석목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봉인 속에 있던 나무상자에 무슨 물건이 들어있었는지는 본왕도 모르네. 다만 백원왕께서 아주 중요한 물건이라고 이르며, 그 상자가 열리는 날에는 엄청난 숙적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창원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석목의 얼굴빛이 약간 변했다. 일전에 싸웠던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금색의 뱀, 구수금교(九首金蛟)를 떠올리자 마음에 약간의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가 꿈에서 본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 창원왕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닌 것 같았다. 백원왕마저 걱정할 정도의 상대라면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었다. 아직 부족한 자신의 실력으로는 더더욱 그랬다.
석목이 몸을 돌리며 물었다.
“그 나무상자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물건이라면 왜 삼대 요족 중 다른 두 요왕은 탐내지 않죠? 게다가 창원왕께서는 능천봉에 수백 년을 갇혀 있었는데,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 두 늙은이는 나무상자의 존재를 모르네. 백원왕의 뜻에 따라 능천봉 비밀창고는 우리 푸른 원숭이족이 대대로 비밀리에 지켜왔기 때문이지. 그 비밀 또한 본왕의 선조만 알고 있네.”
창원왕은 조금 자부심이 넘치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의 얼굴에 고심의 그늘이 밀려왔다.
그가 사령계에서 겪은 일, 그리고 일전에 꿈속에서 본 일들을 생각해보면 창원왕이 괜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황룡 그 늙은이가 일을 그르쳤어. 석 도우의 표정을 보니 벌써 그 나무상자를 열어본 것 같군. 그래서 나는 백원왕의 유언을 전하러 온 것이야. 나무상자를 연 자는 당장 남해성(藍海星)을 떠나 다른 해성(海星)으로 도망가야 하네. 그 숙적이 나타나는 날에는 남해성은 물론 미양성(彌陽星) 전체의 모든 살아 있는 것이 큰 화를 입을 것이야.”
창원왕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해성, 미양성이요?”
석목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물었다.
“그렇네. 설마 처음 듣는 이야기인가?”
창원왕은 약간 의외라는 듯이 석목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러자 석목은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예를 갖추어 말했다.
“선배님,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런 석목을 본 창원왕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정말 하나도 모르는 것 같군. 좋아. 내 알려주지.”
창원왕이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석목이 계속 예를 갖추며 말했다.
“우선 질문 하나 하겠네. 자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어디인 것 같나?”
창원왕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석목을 보며 물었다.
“서하대륙이죠.”
“그럼 서하대륙의 바깥은?”
석목이 답하자 창원왕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거야 동주대륙 아닙니까? 두 대륙의 거리가 멀긴 하지만, 양쪽 모두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는 곳이죠.”
석목이 대답했다.
“그럼 석 도우는 서하대륙과 동주대륙, 그리고 주변의 바다와 섬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
석목은 창원왕의 질문에 망설였다.
사실 그는 지금껏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창원왕의 표정을 보니 그게 아닌 것도 같았다.
창원왕은 한숨을 쉬며 씁쓸한 표정을 드러냈다.
“석 도우, 사실 서하대륙이든 동주대륙이든 거대한 행성 위의 두 점일 뿐이야.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행성 위에서 살고 있다네. 바로 남해성이라고 하는 곳이지.”
석목은 그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그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모든 상식을 뒤흔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남해성도 무궁무진한 성해(*星海, 별바다)에서는 작은 별에 불과하지. 성해의 세계에는 수많은 성역(*星域, 별을 일정 구역으로 나눈 것)이 있고, 모든 성역에는 또 몇 천 개, 몇 만 개의 성구(星毬, 별)가 존재하네. 어떤 성구는 천지의 기운이 짙어서 생명체가 번성하고 있지만, 어떤 성구는 그 반대라고 하지. 우리가 살고 있는 남해성도 수많은 성구 중의 하나일 뿐이네. 다시 말해서, 성해의 세계에서는 좁쌀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말이지.”
창원왕은 유유히 말을 이어갔다.
석목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면서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창원왕은 석목의 반응을 일찍이 예상했다는 듯,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석목은 일각이 지난 뒤에야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면 백원왕이 말씀하신 그 숙적도 남해성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허허, 맞네. 사실 백원 선조께서도 남해성의 생명체가 아니라 다른 성역에서 온 강력한 존재라네.”
창원왕이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 그의 마음속에서는 격렬한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는 현재 실력은 비록 지계에 불과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천위의 존재와도 가까스로 대적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다고 은근히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 단순한 생각일 뿐이었다.
석목의 마음속에 유명한 옛말이 절로 떠올랐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창원왕이 말한 대로라면, 광활한 성해의 세계에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존재가, 그것도 무수히 많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석목의 마음속에서는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흥분이 넘치고 있었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창원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성해의 세계에는 강한 존재가 아주 많지. 남해성의 강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말일세. 듣자 하니 몇몇 유능한 실력자는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몇 개의 성구를 연기처럼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고 하네.”
석목은 창원왕의 말에 크게 놀랐다.
생각만으로 여러 개의 성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존재는 도대체 어떤 실력자일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석목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백원왕도 여러 개의 성구를 파괴할 수 있는 강자였습니까?”
“그것까지는 이 노부가 알 길이 없었네.”
창원왕은 석목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석목은 생각 끝에 결심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능천봉 비밀창고에서 얻은 나무상자를 제가 열었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남해성을 떠나도록 하게. 비록 자네의 실력이 지계의 경지이지만 몸은 우리의 요족과 비슷한 것 같네. 심지어 자네의 몸에서 우리 요족의 냄새를 맡았지……. 자네의 실력이라면 성역을 넘나드는 전송진(傳送陣)은 충분히 부담할 수 있을 것이야.”
창원왕이 말했다.
“성역 전송진이요?”
석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서로 다른 성구를 연결하는 초대형 전송 법진이지. 성구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고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미 탐지된 성구들 사이를 서로 왕래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법진이라네. 다만 전송진의 공간은 찢는 힘이 아주 강한데, 특별한 보호수단을 지니거나 천위의 존재, 혹은 일계술사(日階術士) 이상이라야만 강한 육신과 신식으로 그 힘을 이길 수 있지. 또 그곳을 통하기 위해서는 성석이라는 희귀한 공간 속성의 영석도 필요하다네.”
창원왕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