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323화 (323/916)

323화. 두 번째 각성

반 년 후, 서하고국의 고도인 곡양성.

삿갓을 쓰고 회색 도포를 입은 꼿꼿한 사내가 성내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거리 양쪽에는 맹렬한 불길에 타고 남은 무너진 담벼락이 보였다. 붕괴된 건물의 꼭대기마다 이끼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무너진 정원들에는 높고 낮은 나무가 자라 있었고, 뿌리가 많이 자란 관목들은 길가 한가운데까지 줄기를 쭉 뻗기도 했다.

삿갓을 쓴 사내는 보폭은 크지 않았지만 걸음이 묘하게 빨랐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여러 개의 거리를 지나갔다. 하지만 길에는 행인들이 매우 적었다.

성 안으로 조금 들어가니 상황이 좀 괜찮았다.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적지 않았고, 거리 양쪽으로는 작은 상점들이 다양하게 보였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오가는 상인이나 손님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물건을 사라고 재촉하는 상인들의 목소리는 처참하게 파괴된 고성에 생기를 더해주었다. 다만 번화했던 수년 전의 광경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삿갓을 쓴 사내는 거리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곧장 동성구(東城區)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동성구의 모습은 오는 길에 보았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나았다. 성 외곽 지역에 무너진 건물들이 있긴 했지만, 중심부로 들어서니 전쟁의 화를 당하기 이전과 거의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전쟁의 불길이 이곳까지는 미치지 않은 것 같았다.

동성구의 서광가(西匡街)에 이르니 높고 큰 건물이 눈에 띄었다. 누각 위에는 천오상점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사내는 그 건물로 들어섰다. 안에는 손님들은 많지 않았고, 두세 명의 점원이 각자 일을 보고 있었다.

“저희 상회에는 각종 영기와 재료들이 있습니다. 손님께서는 어떤 것이 필요하신지요?”

사내가 들어서자 한 젊은 간사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맞았다.

“서노자 대사님을 뵈러 왔습니다.”

삿갓을 쓴 사내가 말했다.

“송구하오나 지금 서 장로께서는 연기방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그 간사는 사내를 위아래로 훑더니 웃으며 말했다.

삿갓을 쓴 사내는 말없이 손에 쥔 물건을 내보였다.

그것은 맑고 투명한 주황색 옥패였다. 옥패의 여덟 면에는 모두 괴물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젊은 간사는 안색이 변하더니 다급하게 말했다.

“알고 보니 귀빈께서 오셨군요. 실례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제가 가서 전하겠습니다.”

잠시 후 삿갓 쓴 사내는 간사의 안내를 받아 삼 층에 자리한 별실로 향했다.

별실의 내부는 소박했는데, 금박을 입힌 삼첩 병풍 앞에 원탁이 놓여 있었다. 그 원탁에는 푸른색 옷을 입은 서노자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서노자는 사람이 온 것을 보고도 일어서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삿갓을 쓴 사내는 서노자의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노자가 손을 흔들자 젊은 간사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문을 닫고 나갔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그 사내는 서노자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삿갓을 벗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까무잡잡한 얼굴을 한 청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서노자는 잠시 멍해 있다가 곧 입을 열었다.

“석목!”

석목은 웃으며 물었다.

“몇 년간 뵙지 못했는데 서 대사님께서는 저를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하하, 그럭저럭 지냈지요. 당신이 이렇게 빠르게 지계의 경지에 이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서노자는 입을 열고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갑자기 얼버무렸다.

“서하대륙을 떠난 후에 기우를 만났습니다. 운이 좋았죠.”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가 말하지 않은 게 있었는데, 창원왕의 말이 신경 쓰인 탓에, 지난 반 년 동안 적원화경의 10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미 지계 중기에 들어섰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너무 겸손하군요. 소위 운이라는 것도 실력의 일부입니다. 자,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지요.”

서노자는 석목이 말을 아끼는 것을 보고는 더 묻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권했다.

“서 대사님, 제가 이번에 온 것은 어떤 사람의 소식을 알고 싶어서입니다.”

석목은 자리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그게 누군가요?”

서노자가 물었다.

“종수입니다”

“종 장로 말입니까?”

석목의 말에 서노자가 눈썹을 올리며 물었다.

“맞습니다. 대사님은 혹시 그녀에 대한 소식을 들으신 게 있나요?”

석목이 말했다.

서노자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석목이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알려주지 않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상회도 그녀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노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든 대륙에 소식통을 가지고 있는 천오상회도 그녀의 행적에 관한 소식을 모른다는 말인가요?”

석목이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종 장로는 뛰어난 자질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 상회가 매우 아끼는 인재였습니다. 그녀는 서하대륙에 있는 동안 우리 상회를 위해 적지 않은 공을 세웠지요. 그래서 회장님은 그녀를 키워서 일찍이 요족 특사로 임명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서 창욱성 경매를 맡긴 겁니다.”

서노자는 그렇게 말하며 석목을 바라보았다.

“네, 경매 기간 동안 종수는 분명히 저와 같이 있었어요.”

석목이 말했다.

“음……. 기이하게도 경매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종 장로가 사라져버렸지요. 어떤 이들은 그 일이 당신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당신도 실종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지요.”

서노자가 말했다.

“서 대사님께서도 설마 종수가 실종된 게 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석목이 물었다.

“하하, 상회가 사실을 확인한 뒤 당신은 의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종 장로가 상회와 계약을 맺은 기간에는 비술을 통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위치를 파악할 수 있지요. 그녀의 안전을 고려한 조치였습니다.”

서노자는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은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건가요?”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급히 물었다.

“종 장로가 실종된 이후 상회에서는 이미 여러 번 비술을 통해 찾아보려 했지만,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마치 종 장로가 이 세상에서 증발해버린 것 같아요.”

서노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석목은 침묵하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사실 종수가 실종되었을 때 제가 바로 옆에 있었어요.”

“뭐라고요? 그럼 그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서노자는 놀라서 물었다.

석목은 얼굴을 찌푸리며 한참을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종수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고, 온몸이 뜨거워지더니 잠시 후 몸에서 맹렬한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저는 종수를 살리려 했는데 화염에 휩싸이면서 의식을 잃었죠. 깨어나 보니 종수가 보이지 않았고요.”

이어 석목은 그날의 상황을 서노자에게 대강 알려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화염을 흡수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서노자는 석목의 말을 듣고 눈썹을 찌푸리며 깊이 생각에 잠겼다.

“아, 그리고 제가 의식을 잃었을 때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그게 무엇이었나요?”

서노자가 물었다.

“기절해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여자가 천봉, 그리고 반서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게 희미하게 귀에 들렸죠. 하지만 말했듯이 저는 그때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분명하게 듣지 는 못했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서노자는 석목의 말을 듣고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제가 보기에 종 장로는 아마 체내의 혈맥에 있는 힘이 두 번째 각성을 일으킨 것 같군요.”

“두 번째 각성이요?”

석목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소위 혈맥의 두 번째 각성이 일어나는 이유는 매우 복잡합니다. 대부분은 첫 각성이 일어날 때는 혈맥의 힘이 크지 않죠. 하지만 종 장로의 상황으로 볼 때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것은 봉음혈맥이 아닐 겁니다.”

서노자가 말했다.

“봉음혈맥이 아니라면 뭔가요?”

석목이 물었다.

“이 삼품 봉음혈맥은 보기 힘든 희귀한 것이지만, 각성이 일어날 때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그 신비로운 낯선 여자의 말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종 장로에게는 전설 속에 나오는 최고의 혈맥인 천봉의 각성이 일어난 것일 겁니다. 이 정도 수준의 혈맥이 되면 많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각성한 사람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죠.”

서노자가 말했다.

석목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천봉혈맥이요? 그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저도 천봉혈맥에 대해서는 이전에 회장님께서 무심결에 이야기한 것을 들었을 뿐입니다. 아주 신비스럽고 오래된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서노자는 약간 민망한 듯 말했다.

“오래된 가문이요? 서 대사님께서는 그 가문이 어딘지 아십니까?”

“그건 나도 알 방도가 없군요.”

석목의 다급한 물음에 서노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상회에서도 모른다면……. 설마 남해성이 아닌 다른 성역에 있지 않을까요?”

석목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당신도 성역에 대해서 알고 있군요. 오히려 그쪽이 가능성이 높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노자는 석목의 말을 듣고 잠시 멍하게 있다가 대답했다.

석목은 이어서 성역에 관해 서노자에게 질문했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을 알자 곧 흥미를 잃었다.

“오늘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석목은 일어서서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했다.

그가 몸을 돌리려 할 때 뒤에서 서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본래 명월교와 친분이 깊었죠. 이전에 통천선교와 천마종에서 현상금을 걸고 수배를 했으니, 이 곡양성에서는 부디 몸조심을 하길 바랍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석목은 몸을 돌려 서노자에게 인사를 하고는 삿갓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

서노자는 석목이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회장님께서 일찍이 보통이 아니라고 하시더니……. 과연 평범한 인물이 아니로군.”

* * *

천오상회를 나온 석목은 더 이상 성내에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동성문 쪽으로 향했다.

어느 길목을 지나자 맞은편에서 회색 겉옷을 걸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석 형.”

두 사람이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그들은 바로 후새뢰와 여의였다.

석목은 동주대륙으로 돌아올 때 이 두 사람도 같이 데리고 왔다.

그들과 함께 있던 채아가 석목을 보고 빠르게 날아가서 그의 어깨에 앉았다.

“석두, 종수 누님의 소식은 좀 알아봤어?”

채아가 물었다.

석목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번화한 성 안을 두리번거리더니 일행에게 자리를 뜨자고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동성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여의와 후새뢰도 곧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변장을 하고 곡양성을 빠르게 빠져나왔고, 지계의 범위에서 벗어나서 동쪽으로 향했다.

* * *

보름 후 어느 날, 석목 일행은 어느 산봉우리에 앉아 있었다.

주위에는 산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는데, 이상하게 푸른 나무가 거의 없이 황폐했다. 이따금 거대한 구덩이들이 보였는데, 이미 못쓰게 된 곳이었다.

이곳에 있는 자연의 영기는 몇 년 전보다 확실히 많이 줄어 있었다. 심지어 당시의 동주대륙보다도 못했다.

“통천선교는 진짜 썩을 놈들입니다! 곳곳의 영석이라는 영석은 다 캐버렸어요. 그 바람에 머지않아 서하고국은 영맥이 모두 사라져 불모지가 될 겁니다.”

후새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분노하며 말했다. 어쨌든 서하고국은 그의 고향이었다. 고향이 침략을 당하여 짓밟혔으니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석목은 눈앞의 황폐한 산맥을 보며, 문득 자신이 흑마문을 떠난 뒤에 동주대륙을 떠돌던 시절이 생각났다.

야만족의 황무지나 육산왕조, 심지어 지금의 서하고국까지 도처에서 영석의 폐광맥이 발견되고 있었다. 동주대륙의 영기가 날로 약해지고 무인들이 수련이 더뎌지는 이유였다.

일부 유명한 산봉우리에 영기가 많은 것은 수천만 년 동안 산맥의 아래에 형성된 영맥 때문이었다. 만약 영맥을 형성하고 있는 영석을 적당히 캤다면 영기가 조금씩 회복되었을 테지만, 지나친 채굴을 하게 되면 영맥이 완전히 훼손되어 향후 오랜 시간 황무지가 될 것이었다.

통천선교가 이렇듯 미친 듯이 영석을 캐내는 이유는 도대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가자.”

석목은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통천선교의 일에 마음을 쓸 여력도 없고,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관여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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