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오조
이름 없는 언덕 위로 반달이 은은한 달빛을 뿌렸다.
언덕 위에는 볼록 튀어나온 봉분이 있었는데, 주위에는 잡초가 허리까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무덤 앞의 비석은 한껏 닳아서 ‘석’, ‘왕 씨’ 등의 글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석목은 무덤 앞에 서서 과거를 추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어머니의 얼굴이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기억은 그의 마음에 조각조각 남아 있었다.
석목은 잡초를 하나하나 뽑으며 무덤을 정돈했고, 그 앞에 향초와 술, 그리고 제사에 쓰는 물품들을 놓았다.
“어머니, 아들이 어머니를 뵈러 왔어요.”
그는 두 무릎을 꿇고 무덤 앞에서 아홉 번 절을 한 뒤,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머니, 제가 예전에 약속했죠? 이 세상에서 최강의 무인이 되겠다고요. 아직 남해성의 일인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작게나마 성과를 거두었으니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은 셈이에요…….”
석목은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일단 입을 열자 그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요 몇 년간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이번에는 함께 인사드리러 오지 못했어요. 하지만 다음에는 꼭 데려올게요.”
몇 년간 석목은 무슨 일을 하든 거의 혼자서 처리해왔다. 그렇기에 그의 마음속에 있는 괴로움을 아는 사람은 적었다. 지금껏 다른 사람에게 이런 것들을 말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에 구구절절 쉬지 않고 털어놓게 된 것이었다.
달이 중천에 뜨고 나서야 석목은 비로소 이야기를 멈추었다.
그는 그제야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혼자 중얼거린 것을 깨닫고는, 자신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렇게 털어놓고 나니 줄곧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가벼워지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편안함이 밀려왔다. 마치 가슴을 짓눌러온 커다란 바위를 옮겨놓은 것만 같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의 달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탄월식의 자세를 취한 뒤 수련을 시작했다.
곧 달빛이 내려와서 석목의 체내로 녹아들었다.
시간이 흐른 후 석목의 머리 뒤로 은빛 달의 둥근 허영이 조금씩 나타났다.
하룻밤이 빠르게 지나고 동쪽 하늘 끝이 하얗게 바뀔 즈음, 석목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젯밤의 수련으로 인해 그의 법력이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평온함이 밀려오고 있었다. 더불어 지금까지 수련을 할 때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도 거의 다 해결이 되었다.
그가 몸에서 붉은빛을 반짝이자, 한 호흡도 되지 않아서 몸 뒤에 붉은 원숭이 법상이 만들어졌다.
“어?”
그 순간, 석목은 체내의 진기가 이전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깨닫고 놀랐다.
그는 왼손을 내려다보았는데, 까맣게 변한 왼손의 겉에는 붉은 부문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어 그곳에서 흰 화염이 떠올랐다.
석목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왼손에 구전현공의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이전의 힘들었던 느낌이 사라지면서 매우 가벼워졌다.
그때 몹시 뜨거운 흰색 화염이 갑자기 왼쪽 팔에서 흘러나오더니, 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왼팔의 화염은 그의 몸을 해치지 않으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그의 경맥으로 자연스럽게 흘렀다. 그리고 본래 적원화경의 진기와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붉은 원숭이 법상의 몸에서 나오는 붉은 빛 속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몇 호흡 후, 법상은 붉은색과 흰색의 두 가지 색으로 변했고, 기운의 파동은 이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으르렁!”
법상이 두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공기 중에 수면과 같은 파문이 일었다. 그것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난폭한 기류의 파동을 불러일으켰지만, 석목이 주위에 깔아 놓은 금제에 부딪쳐 잠잠해졌다.
그때 채아가 갑자기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날아오르다가 기류의 파동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었다.
“악!”
놀란 석목은 손을 들어 붉은빛을 쏘아서 채아를 끌어냈다.
“깜짝 놀랐네.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채아는 시끄럽게 떠들다가 붉은 원숭이 법상의 변화를 보고 놀랐다.
“어라? 네 법상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석목은 채아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손을 흔들어서 무덤 근처의 금제를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묘를 향해 절을 한 뒤, 푸른빛에 올라 바다 위로 날아갔다.
석목은 백 리 정도를 날아가서 한 무인도에 도착했고, 그는 가는 길에 채아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런 것이었구나. 네 왼손의 지양(至陽)화염에도 이런 것이 있네. 정말 신기해!”
채아가 석목의 어깨 위에서 말했다.
“그런데 지금의 법상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는 시험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석목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래의 무인도를 바라보았다. 그 무인도의 크기는 십여 리 정도였고, 나무 하나 없이 민둥민둥하게 바위만 가득했다.
석목은 붉고 흰빛을 뿜어내면서 거대한 붉은 원숭이의 법상을 만들어냈다.
“가자!”
그가 손을 흔들자 법상이 아래의 무인도로 날아갔고, 그 법상은 손에서 화염을 반짝이며 두 개의 거대한 불의 검을 만들어냈다.
촤앗!
법상이 검을 휘두르니 붉고 하얀 거대한 화염의 검광이 날아갔다.
우르르! 쾅쾅!
무인도 위에 길이 수십 장, 너비 수 장에 달하는 거대한 골짜기가 생겼다. 단단한 바위가 검광에 두부처럼 으스러진 것이다.
원숭이 법상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무인도를 공격했다. 그는 두 손의 거대한 검을 위아래로 내려치는 동시에 입에서 화염을 뿜어냈다.
어느새 거센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공격으로 인해 섬 전체가 잠겨버렸고, 주위의 바다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며 거대한 파도가 일었다. 그 소리는 마치 하늘에서 들리는 격렬한 천둥소리 같았다.
불과 몇 호흡 만에 작지 않은 무인도는 수면에서 그대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거대한 물결 속에서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석목은 이를 보며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왼손의 힘을 합친 후 붉은 법상의 위력은 더욱 대단해졌다. 특히 법상이 펼치는 혼원진화(混元眞火)가 흰 화염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 위력이 몇 배나 상승했다.
방금 그 무인도는 그 혼원진화에 의해 지반이 무너지면서 바닷속으로 깊이 가라앉은 것이었다.
“좋아!”
석목은 흥분한 듯 웃음을 지었다.
채아는 어안이 벙벙해 하면서 원숭이 법상이 보여준 힘에 놀란 듯했다.
그때 석목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었다. 이어 법상을 다시 몸 안으로 거두어들인 그의 안색이 약간 창백해졌다.
법상의 위력은 어마어마했지만 많은 진기가 소모되는 것이었기에, 지금 그로서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석목은 중급 영석을 하나 꺼내서 진기를 회복했다.
잠시 후 그는 희미해진 영석을 던져버리고 등 뒤에서 불빛을 반짝이며 날개를 펼쳤다.
법상이 왼손의 불의 힘을 흡수하였으니, 이는 불의 날개에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었다.
석목의 왼쪽 팔이 다시 새까맣게 변하며 왼손의 불의 힘이 불의 날개 속으로 들어갔다.
우르르!
그러자 석목의 등 뒤에 있는 불의 날개의 크기가 십여 배는 커졌다. 그중에는 흰색도 섞여 있었는데, 그것은 날개 전체에 혈맥의 경락처럼 감돌고 있었다.
“이건…….”
석목은 놀라서 무의식적으로 날개를 움직였다. 그러자 그의 몸이 움직이더니 수면 위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잔상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어 백여 장 밖에서 인영이 보이더니 갑자기 석목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고,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석목은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흥분된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고 거대한 불의 날개를 펼치고 그것을 다시 움직여보았다.
그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 날아갔다. 이전보다 속도가 족히 열 배 이상은 빨라져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이각 후 바다 위의 허공이 반짝이더니 석목의 모습이 드러났고, 그는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천위의 존재라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만약 추후에 천위의 강자와 맞닥뜨릴 경우에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것이다. 비록 그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충분히 달아날 수는 있게 되었다.
다만 이 불의 날개 역시 법상과 마찬가지로 진기의 소모가 극심한 것이 문제였다. 지금 석목의 진기로는 이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겨우 일각 정도에 불과할 듯했다.
하지만 일각의 시간만 주어진다 해도 수천 리는 족히 날아갈 수 있었다. 게다가 상급 영석으로 진기를 보충한다면 비행하는 시간을 늘릴 수 있을 것이고, 천위의 강자가 날개를 사용한다 해도 그를 쫓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석목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의 흥분을 가라앉힌 후, 청익비차에 올라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석목은 방금 여러 차례 불의 날개를 펼치는 동안 채아에게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해서 수 리 밖으로 멀리 떨어진 듯 했다. 채아를 찾을 생각이었다.
* * *
육산왕조의 극동 지역.
육산왕조와 야만족의 황무지가 교차하는 변경에는 동림성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었고, 그곳은 육산왕조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 중 하나였다.
동림성은 면적이 크지 않고 인구도 십만 명이 채 되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변경의 백성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각자의 일에 몰두하던 그들이 오늘은 예외 없이 전부 거리로 나와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신선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선들의 우두머리는 애제자를 막 잃은 통천선교의 자옥 도인이었다. 그는 선인의 풍채와 도사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남색 팔괘 문양의 옷자락을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의 흰 얼굴은 상당히 어두워보였다.
그의 뒤에는 세 명의 지계 강자가 있었다. 그중에는 흰 얼굴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청목 도인, 둥근 얼굴의 백석 도인도 있었다. 청목 도인은 여섯 개의 귀를 가진 기괴하게 생긴 개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이 네 명의 지계 강자 뒤에는 세 대의 금색 비차가 있었고, 선천 경지에 있는 수십 명의 무인이 통천선교의 남색 팔괘 문양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했다.
그들 앞에는 금빛 수염과 머리카락을 가지고, 금색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있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금색 옷차림의 그 남자를 보며 수군거렸다.
“저 자가 감히 우리 통천선교의 금지구역에 들어와서 우수한 제자들을 죽인 나쁜 놈이라는 말이지?”
그때 백석 도인의 큰 목소리가 하늘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우리는 통천선교다!”
그러나 금색 옷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래에서 지켜보던 백성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 그들은 쉽게 볼 수 없었던 통천교의 선인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볼 수 있게 되어서 잔뜩 흥분해 있었다.
“저 금색 옷을 입은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왔기에 우리 통천선교를 건드린 거지? 진짜로 죽으려고 작정했나?”
백성들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색 옷의 남자가 계속 말이 없자, 화가 난 백석 도인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물었다.
“네놈은 누구이며, 무슨 연유로 우리 통천선교의 구역에 침입해서 제자들을 죽인 것이냐?”
백석 도인의 말을 듣고 금색 옷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는 백석 도인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파리 같은 놈들을 밟아 죽이는데 굳이 이유까지 말해야 하나?”
“뭐라고……?”
백석 도인은 기가 막혀서 순간 말을 잊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옥 도인이 분노를 억누르며 나와서 말했다.
“네놈이 내 제자 우성을 죽였느냐?”
“아, 영기로 몸을 보호하던 그 겁쟁이? 교우들을 버리고 도망간 녀석 말이지? 제일 처음에 죽였지.”
금색 옷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그러자 자옥 도인이 이를 악물고 다시 물었다.
“감히 통천선교의 제자들을 죽인 네놈의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 파리 같은 놈들 따위는 알 필요 없다. 허나 자신이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면, 그것도 참 억울하기 짝이 없겠지. 그러니 내 이름이 오조라는 것만 알면 된다.”
금색 옷을 입은 남자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오조?”
순간 통천선교의 모든 이가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이름이 유명해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로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자옥 도인은 사부인 무진 진인이 예전에 오 씨라는 성을 언급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마도 신비롭고 유서 깊은 가문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