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철천지 원수
흑마문의 종파 소재지 대염국.
정오의 높은 하늘에서 따뜻한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흑마의 열세 개 산봉우리는 검고 어두운 안개로 뒤덮여 거대한 먹구름을 이루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열세 개 흑마봉과 봉우리의 먹구름은 마치 열세 개의 거대한 버섯 같았다.
먹구름은 지면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냈는데, 아래에서 보면 산꼭대기의 기괴한 봉우리와 암석들이 희미하게 검은색으로 물들어 험상궂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열세 개 산봉우리 아래에는 흑마문의 제자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풍경에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듯, 전혀 개의치 않고 각자 자기 일을 하느라 바빴다.
흑마문의 제자 수는 알게 모르게 이전보다 많이 늘어 있었다. 최근 들어 꽤나 잘 나가고 있는 듯했다.
열세 번째 산봉우리의 은밀한 곳에는 여러 층으로 된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그 누각은 오랫동안 방치된 듯 문과 창문에 거미줄이 잔뜩 있었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돌계단 옆에도 허리까지 오는 잡초들이 가득한 걸 보니, 확실히 오랫동안 드나든 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누각 꼭대기에서 한 푸른색 인영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바로 석목이었다.
이곳은 예전에 국 사숙이 머물던 곳이었는데, 흑마문에서는 그가 죽은 뒤 무슨 까닭인지 이곳을 다른 장로들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열흘 전쯤에 석목이 소리도 없이 이곳에 온 것을 흑마문의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석목은 황량하고 인적이 없는 이 오랜 누각에서 며칠째 머물고 있었다.
그가 두 손을 들자 허공에서 흰 빛이 모여들더니 그의 체내로 쉬지 않고 들어갔다.
꿈속에서 석목은 흰 원숭이가 되어서 구름 속에 우뚝 솟은 위험한 봉우리 위에 이상한 자세로 엎드려 있었고, 그의 주위에는 옅은 구름이 피어올라서 공중에서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이어 뜨거운 태양이 구름을 뚫고 쏟아지면서 흰 원숭이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흰 원숭이의 몸을 덮은 금색 털이 반짝였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금빛은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그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시종일관 고요하던 하늘의 바람과 구름에 갑자기 변화가 일어났다. 커다란 흰 구름이 격렬하게 용솟음치면서 뜨거운 태양을 가렸고, 그 바람에 일순간 하늘이 어두컴컴해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흰 구름에 한 줄기의 황금빛이 쏟아졌다.
이에 흰 원숭이는 크게 놀랐다.
그때 흰 구름 사이에서 거대한 금빛 눈동자의 허영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래 있는 흰 원숭이를 원한이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흰 원숭이의 몸 안에서 그 눈을 본 석목은 가슴이 철렁했다. 마치 태고의 거대한 짐승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온몸이 오싹해졌다. 보이지 않는 밧줄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듯,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력감과 함께 끝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와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 흡일식(吸日式)을 중단한 흰 원숭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하늘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원숭이는 격노한 표정이었고, 갑자기 나타난 금빛 눈동자를 보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순간, 커다란 금빛 눈동자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금색의 빛이 발사됐다.
“으악!”
흰 원숭이는 두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천지를 울릴만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그 순간 석목은 누각 위에서 몸을 흔들며 꿈에서 깨어났다.
“이게 무슨 일이지?”
석목은 숨을 크게 헐떡이고 있었고, 가슴은 튀어나올 것처럼 두방망이질을 쳤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여러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귀를 찌르는 듯한 굉음이 멀리서부터 길게 울려 퍼졌다. 천둥처럼 귓가를 때리는 그 소리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석목은 체내의 기혈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특히 머리가 침이 꽂히는 것처럼 쑤셔 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바다의 파도 소리 같은 그 소리는 흑마문의 열세 개 봉우리를 에워싸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 소리에 흑마문의 제자들은 큰 타격을 입은 듯했다. 선천 이하의 경지에 있는 제자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는데, 그들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
선천 이상의 제자나 성계 이상의 장로들도 피를 토하며, 영문도 모른 채 놀란 얼굴로 힘없이 쓰러졌다.
그때 첫 번째 산봉우리에 있는 대전에서 검은빛이 반짝이더니, 검은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바로 흑마문의 대장로인 금자였다.
금자는 눈빛을 이글거리며 몸에서 검은빛을 번쩍였다.
“이것은……?”
그는 놀라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석목은 열세 번째 산봉우리에 있는 누각 위에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하늘 끝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날아왔다.
그 빛이 가까이 오기 전, 거대한 금빛 눈동자의 허영이 석목 앞에 나타났다.
그 눈동자는 석목을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살기는 마치 온 세상의 물을 다 가져다 씻어도 없어질 것 같지 않은 살기였다.
그것은 석목이 꿈속에서 본 그 금빛 눈동자와 똑같았다.
석목은 꿈속에서처럼 또다시 몸이 굳더니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이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몸에서 정혈이 갑자기 끓어오르면서 온몸이 후끈거렸다. 정혈이 온몸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자 팔다리와 기경팔맥이 화염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러자 그의 몸을 속박하고 있는 무형의 힘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
석목은 하늘을 찌를 듯한 큰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서는 바다처럼 깊고 넓은, 그리고 충만한 힘이 느껴졌다. 그 소리는 순식간에 흑마문의 열세 개 봉우리에 울려 퍼져서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그 소리가 지나간 후 석목의 몸에서 무언가 튀어오르는 듯한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이어 몸에서 굵직한 근육이 솟아오르더니 바람을 넣은 것처럼 몸집이 부풀어 올랐다. 피부에는 철심처럼 두꺼운 하얀 털이 자라났다.
석목은 순식간에 이 삽십 장 크기의 거대한 흰 원숭이로 변했다.
흰 원숭이가 금빛 눈동자에서 영롱한 금색 빛을 내뿜었다. 이전에 흰 원숭이가 되면 이성을 잃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 석목의 정신은 또렷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이 거대 원숭이를 통제할 수 없었기에, 그저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혼란으로 인해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흰 원숭이가 거대한 발을 구르자 누각이 그 자리에서 부서졌고, 원숭이의 몸은 거대한 흰 그림자가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흰 원숭이가 날아오르자 노려보던 눈에서 금빛이 반짝였다. 그 노려보던 원숭이는 보이지 않는 강한 힘에 부딪혀 날아갔고, 수백 장 뒤의 산봉우리에 부딪힌 뒤에야 멈추었다.
쾅! 쾅! 우르르!
백여 장 높이의 산봉우리의 허리 부분이 잘려나가면서 무수한 돌이 산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이 봉우리는 흑마문의 주요 거점이 아나라서 아래쪽에 흑마문의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장면을 지켜보던 흑마문의 대장로 금자, 그리고 적지 않은 선천의 장로들은 기겁을 했다.
그들은 갑자기 어디서, 그리고 무슨 이유로 이런 괴물이 나타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 *
흰 거대 원숭이의 가슴에는 몇 군데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상처에서 쏟아진 피가 순식간에 가슴 앞의 하얀 털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흰 원숭이는 대노하며 큰 소리로 포효했다.
그러자 상처 주위에서 흰 빛이 나타나더니 곧 피가 멎었고, 상처도 아물기 시작했다. 깊게 나 있던 상처는 단 몇 호흡 만에 희미한 흔적으로 변했다.
흰 원숭이의 몸 안에 있는 석목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앞을 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안색이 변했다.
허공에는 금색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금발을 휘날리며 서 있었다. 그의 수염과 눈썹 역시 금색이었으며, 얼굴은 마치 무쇠처럼 차가웠다.
그의 체격은 흰색 거대 원숭이보다 한참이나 작았지만, 거칠고 거만한 분위기는 원숭이보다 더했다.
그의 두 손은 커다란 금색 용의 발톱이었는데, 그 위는 금색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발톱에서는 금속 같은 광택이 났다.
흰 원숭이의 몸에 난 상처는 이 발톱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순간 석목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는 남자의 몸 위로 금색 교룡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치는 것을 보았고, 이전에 두 번 본 적이 있는 거대한 금빛 눈동자를 동시에 떠올렸다.
“이것은 구수금교! 아니야. 본래 모습이 아닌…….”
석목은 몸이 격렬하게 떨려왔지만, 곧 그 남자의 정체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다.
금색 옷을 입은 남자가 뿜어내는 기운은 강렬했지만, 천위의 경지였다. 만약 창원왕이 말한 대로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면 천위의 경지에 그칠 리가 없었다.
석목이 생각하는 동안 흰 원숭이의 금빛 눈동자가 작아졌고, 원숭이는 울부짖으며 튼실한 팔뚝으로 반 토막 남은 산봉우리를 치면서 날아올라 금색 옷을 입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몸집이 큰 산봉우리처럼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며 금색 옷의 남자를 뒤덮었다.
금색 옷의 남자는 두 눈에서 금빛을 반짝이며 차갑게 말했다.
“네놈이 이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는 산더미처럼 덮쳐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고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오른손을 뻗어서 커다란 금빛을 뿜어냈고, 그 빛은 물결처럼 소용돌이치면서 거대한 금색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회오리는 흰 원숭이의 거대한 몸을 막아서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흰 원숭이는 대노하며 몸에서 은빛을 뿜으며 손발을 휘저었다. 그러자 은색의 손발 그림자가 폭풍우처럼 뻗어나와 금색 회오리바람을 공격했다.
그러나 회오리바람은 조금 떨리기만 할 뿐 흩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커지면서 흰 원숭이를 그 속에 가두었다.
금색 옷의 남자는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왼손을 위로 들었다. 그러자 금빛이 그의 손에 모여 들더니 금색의 창이 되었다.
“죽어라!”
금색 옷의 남자는 크게 소리 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금색 창은 한 줄기 금빛이 되어 순식간에 흰 원숭이의 가슴을 꿰뚫었고, 빛이 지나간 하늘에는 검은 선이 떠올랐다.
흰 원숭이는 눈에 금빛을 반짝이며 낮은 소리로 포효했다. 그러자 몸에서 흰색 화염이 맹렬하게 타올랐고, 그 거센 화염은 커다란 흰색 손바닥이 되어 금색 회오리바람을 힘껏 가격했다.
쾅!
금색 회오리바람은 흰색 화염 앞에서 기세가 약해지더니 두 동강이 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흰 원숭이는 몸을 뚫은 금색 창의 앞뒤를 두 손으로 각각 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자 창은 그대로 부러졌다.
금색 옷의 남자는 이를 보고 얼굴색이 조금 변했다.
그가 다른 반응을 보일 새도 없이, 원숭이의 왼손에서 흰색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이어 여러 마리의 흰색 불 구렁이가 날아올랐다.
금색 옷의 남자는 구렁이를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곧바로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나면서, 손에 있는 금빛을 모아서 다시 금색의 긴 창을 만들었다.
그가 손을 흔들자 창의 그림자가 마치 나무에 만개한 금꽃처럼 떠올랐고, 그것은 흉흉한 기세로 달려드는 불 구렁이가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